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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평화, 짧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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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07-15 10:31

박병호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나팔꽃이 순식간에 흰 꽃망울을 터뜨린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전날 밤 제법 큰 줄기의 빗물에도 먼지 땟국이 깨끗이 지워지지 않은 창가에 누워 잠꾸러기 필립이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나팔꽃의 어서 일어나라는 속삭임이 창틈으로 스며든 바람에 실려 왔습니다. 초여름 햇살 아래서 잠이 깬 필립이 눈을 비비며 자연 선생님인 아빠를 찾았습니다. “아빠 선생님! 오늘 유칼립투스 위 코알라 보러 가자고 했지요?”  비온뒤 죽순처럼 키가 쑥쑥 자라기 시작한  7학년 아들이 여전히 인근 ‘타마르 섬’ 산토끼같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아빠가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대나무 밑 태즈메이니아데블 보러 가자고 안 했었나? 아! 아니다. 유칼립투스 맞아. 아침은 블루치즈와 라벤더 민트 빵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시원할 때 출발하자!”



신선한 공기 마음껏 들이켜며 댓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 속을  아빠의 크고 뭉툭한 손을 잡고 뒤따라 걸으며 필립이 물었습니다. “유칼립투스도 대나무처럼 꽃말이 있어요?” 아빠가 느리게 움직이는 오뚜기처럼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더니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글쎄다. 그러나 모든  식물 이름이 뜻이 있듯이 마찬가지겠지? 댓잎 꽃은 차갑고 단단하게 느껴지니 감성에 흔들리지 않는 이성, 인내심 이런 것일 거고.” 이어 “감성과 평화, 이성과 전쟁…?”이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뇌를 향해 치켜뜬 필립이 말을 이었습니다. “지조도 있지 않아요?” 아들의 어깨를 감싸며 미소 띈 얼굴로 아빠가 사뭇 놀라며 답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쓰는 단어가 벌써 어른이 다 되었구나.” 칭찬에 상기되어 필립이 말을 급히 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아빠에 대한 사랑을 오래오래 계속 갖고 싶다는 다짐을 할 때마다 대나무 마디마디의 절개를 떠올렸어요.”



아빠와 필립은 낮은 구릉 아래 깊지 않은 협곡을 은은한 코발트 빛으로 흐르는 캠프 강을 지나고도 두어 시간을 더 걸었습니다. 태즈메이니아 대숲 길보다는 폭이 넓지만 가늘고 긴 ‘딥크릭 길’이 끝나가는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아빠! 저 시들어가는 튤립밭을 보니 ‘윈야드’에 다 온 것 같아요.” 가슴 쪽 윗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끼고 멀리 앞을 바라보며 아빠가 답했습니다. “그래, 그 예쁜 튤립도 때가 되니 시들어가는구나. 누가 그 꽃말이 ‘허무한 사랑’ 아니랄까 봐.” 필립이 아빠 콧등을 바라보며 되물었습니다. “허어무? 허무?” 아빠가 필립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필립이 어려서 그림책에서 보았던 새까만 몸체에 흰 연기 날리며 달리던 기차 기억나지? 그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증기처럼 쉽게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은 거란다.”



똑똑함을 자랑하듯 힘차게 필립이 응수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언젠가는 죽는 목숨처럼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과 같은 거네요.” 하나뿐인 아들을 흐뭇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습관을 지닌 아빠가 필립의 손을 꼭 쥐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각을 잘못 하는 게 있단다. 결국 빈손으로 갈 거니까 아무것도 남기려고 하지 않겠다는 생각. 그 사람들은 튤립이 또 다른 꽃말, ‘기쁜 소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  순간 필립이 주먹 쥔 두 팔을 머리 위에 치켜들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 좋아요.” 아빠가 필립의 주먹을 감싸며 물었습니다. “내 아들 필립이 기쁜 소식을 전하다 죽는 평화 배달부가 되고 싶나 보다.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 놀다가 떠나는 허무 배달부가 될 수는 없지.”



감당하기 무거울 것 같은 허무를 무너뜨린 필립이 꽃과 꽃받침을 떠올렸습니다. 꽃받침이 꽃의 내부를 둘러싸면 꽃이 피기 전에 먼저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잘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는 마음이 근심 걱정을 버리게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 유칼립투스는 왜 사람들 근처에서 살지요?” “음, 아마도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영원히 죽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일거야.” “맑은 공기 외에 사람한테 주는 그 많은 도움이요?”  “응, 지금은 사라진 애보리진이 습기를 매우 싫어했단다.” “여기 습기가 동남아시아보다 훨씬 적은 편인데도요?”  “응, 본토 건조 기후에 수천 년간 적응된 원주민이라 온대우림 기후인 태즈메이니아섬의 습기를 견디기 힘들어했지.” “아 그래서 수분을 많이 흡수하는 유칼립투스 나무를 집 근처에 심었구나.” “아니, 원주민들은 유칼립투스가 수분을 흡수한다는 사실도 몰랐었지.”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유칼립투스가 끊임없이 속삭였지.”  “바람아! 누구든 만나는 사람한테 전해줘 내가 사람들 곁에서 자라면 그들의 땀과 살에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습기를 다 먹어 치울 수 있다고.”



두 사람의 걸음은 어느덧 튤립의 마을 ‘윈야드’에 다다랐습니다. 유칼립투스 나무숲은 보이지 않았지만, 빨강, 노랑, 주황, 보라 등 형형색색 튤립밭이 넓고 붉은 황토색 땅 위에 무지개떡처럼 조화롭게 펼쳐있었습니다. 튤립 앞에 선 필립이 물었습니다. “튤립꽃은 이렇게 예쁜데 왜 한해살이로 끝날까요?” “응, 구근이 살아있다면 아주 죽은 것은 아니지만 튤립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꽃은 1년에 한 번은 죽는 거란다. 아마도 완벽한 우아함이 반감을 유발하기 때문일 거야.” “약간은 어디가 못나기도 하고 부족한 면도 있어야 오래 산다는 거지요?” “맞아, 너무 예쁘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관심은 시기심을 자극하여 물어뜯는 적들이 생겨나는 거니까.” “그냥 예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면 단 1초를 살아도 좋지 않을까요?”  “물론 예쁘다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이지만 1년도 못 넘긴다는 건 행복을 느끼기에는 너무 짧아.” “그런데 아름다움은 왜 오래 가지 못하고 시들어가지요?” “그건 유칼립투스처럼 자기가 인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자기한테 다가오도록 해왔기 때문이지.”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필립이 물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너무 많은 사람이 다가와 예쁘다고 하니까 튤립이 자기 스스로 사람한테 다가갈 여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습관이 굳어져 유전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튤립은 왜 그 많은 사람 중에 단 하나를 선택하지 못할까요?” “한순간의 완벽한 사랑보다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지.” “순간과 영원이 함께 살지 못하는 건가요?” “맞아. 그래서 영원을 위해 많은 지원자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단다.”  “왜요?” “골라야 한다는 것은 긴 고민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대상이 많을수록 더 긴 시간…”  “오랜 고민 후 한 사람을 선택하면 되지 않아요?” “그게 쉬운 것이 아니란다. 긴 시간을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 예쁘다고 반해서 몰려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인내심이 부족해요?” “저 예쁜 꽃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내세울 만한 좋은 조건 하나씩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 조건들이 문제가 있어요?” “아니 조건 문제가 아니라 좋은 조건들을 하나라도 가진 사람들은 기다림에는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야.” “튤립이 선택도 하기 전에 모두가 함께 떠나버리는구나! 일시에.”  “아이코 우리 필립은 하나를 알면 열을 아네.” “아빠, 예쁜 튤립이 불쌍해요.”



“그래 그렇게 인내심도 없이 달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한 색깔로 탄생하지도 못하고 여러 색깔로 태어나 1년도 못 살고 죽고 마니까.” 필립과 아빠는 어느덧 튤립 무지개 밭을 넘어 유칼립투스가 군락을 이룬 언덕에 다다랐습니다. “아빠, 저기 코알라가 있어요. 코알라를 이고 있는 저 유칼립투스는 튤립 같은 실연의 아픔을 겪을 필요가 없겠지요?” “응, 그렇지 애당초 사람들이 다가와 구걸하는 사랑은 헛된 한순간의 꿈으로 끝날 거라는 것을 유전자가 습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스스로가 인간에게 먼저 다가갔구나.” 특별히 자연에 관해 영리한 필립은 상대방보다 자신이 먼저 움직이는 생명체는 무엇이나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빠, 그래서 유칼립투스가 기억력 증진제, 가려움증 제거제, 가래 제거제, 호흡기 윤활제, 기분 전환제, 염증 치료제, 아로마오일, 발열 치료제, 신경통 치료제에서 부터 진드기퇴치제까지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수도 없이 계속해서 창조해 내는 거예요?” “응, 그렇단다. 알고 보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지. 얼굴이 아니라 효능으로 다가가는 거란다.” “필립,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치료제 이름들을 주워들었니?” “아, 선천성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우리 반 여친 들릴라가 유칼립투스 오일과 향기를 바르거나 맡을 때마다 유칼립투스에 대해 말해주었어요.”



필립은 이제 유칼립투스가 호주에서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자라고 재배되는 식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꽃이 많은 수술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꽃 밖으로 뻗어 나와 있는 이유보다 꽃받침통의 밑부분에 잘 발달한 꽃턱이 있는 이유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 아빠!  이 발달한 꽃받침 때문에 열매가 잘 자라는 거예요?” “응 필립! 어떻게 알았어?” “턱이 발달해야 침샘이 발달해 소화를 잘 시키는 사람과 다를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그 넓은 꽃받침 때문에 그들은 죽지 않고 몇백 년을 살며 매우 빠르게 성장한단다. 그리고 인간과의 평화를 위해 사람의 온갖 병을 치료하는 향기와 물질을 전투를 치르듯 만들어왔지. 코알라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주위 환경을 자신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순간순간 전쟁을 치르며….” “그게 이유일까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연의 저서에 자신만의 글 그림을 남기고 죽고 싶어서겠지.” 그날 석양이 진 집에 도착한 필립이 여전히 땟국이 가시지 않은 창에 활짝 핀 자신의 모습을 남겨놓고 시든 꽃잎을 오물어 벌레처럼 땅에 떨어져 있는 나팔꽃을 발견하고 소리쳤습니다. “나팔꽃이 유리창에 오래 지워지지 않을 투명한 꽃을 그려놓았어요!” (joel.park@investorsgrou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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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지 않는 빛 2019.12.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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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숙자
행운목에 기대다 2019.12.23 (월)
동짓날 밤 내내 활짝 핀 꽃송이작은 꽃술이 열리며 피워내는 환한향기 소복한 다발에 취한 발걸음꿈길인 듯 둥둥 어둠을 헤아리는데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첫사랑 그전설 같은 기억 새록새록 피어난다그대를 만나 처음 사랑에 빠질 때우리를 설레게 하는 일 웃게 하는 일그런 일들 사방에 등불로 반짝였지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처럼내일도 새롭지 않을 것 같은 일상지친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그런 것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깨를...
강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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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베로니카
겨울 벌판 2019.12.16 (월)
그렇구나!한때 우리 곁을 스쳐 간 시간들이거기 광야에 죄다 모여 있었구나 연둣빛 새잎 돋던 신열의 봄 아침과불볕 속에서 노동을 바치던 여름 한낮과서성대던 갈잎들의 손 시린 가을 저녁이거기 모두 한자리에 엎드려숨죽이고 온몸으로 흰 눈을 맞고 있었구나 이제 곧 허리 굽은 12월마저 등을 보이면날개 큰 바람들의 휘파람 소리평원을 가로지르는 세월의 바퀴 소리   동상 걸린 대지는 소록소록 그리움 하나로 겨울을 나겠구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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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의 이끌림 2019.12.16 (월)
아침부터 짙은 먹구름이 낮게 깔렸다. 피로에 지친 몸은 금방이라도 비를 출산할구름만큼이나 무거웠다. 늘어진 몸을 마냥 침대에 묻고 싶으면서도 한편 누군가 로부터 이해받고 공감대를 헤집으며 교류하고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와 생활의 염려로 멀어진 문학과인간적 소통의 단절이 가져온 결핍감 때문이었으리라. 몸을 일으켜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위해 집을 나섰다.타국에서 모국어를 등지고 살아가는 이의 고달픔을 달래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권은경
함박눈 2019.12.16 (월)
개가 달을 삼킨 밤길도 눈을 감았다눈을 인 청솔밭이내(川)건너 마을 쓸어천도天道는무상無常하다고종은 덩덩 울어라
조성국
긍정 정서 높이기 2019.12.11 (수)
11월 중순으로 접어들어 대기는 자주 안개에 감싸인다. 산허리에 구름 띠를 두른 겹겹의 산들이 물안개 피는 핏 리버와 어울려 수채화 같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잎을 다 떨군 미루나무 꼭대기에선 먼 곳에 시선을 둔 흰머리 독수리가 묵언 수행 중이다. 서울에서 돌아와 시차를 겪는 요즘, 새삼 밴쿠버의 신선한 공기와 한가로운 주변 풍경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친구들로부터 고국의 현 정치 상황과 사회구조에 대한 결기 어린 성토를 듣지...
조정
엎드리기 2019.12.11 (수)
추적추적 젖어드는 누른 11월씻어도 닦아내어도 초록은 멀기만 하다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잿빛 버거운 하늘과질퍽거리기만 하는 길 달릴수록찢겨 나딩구는 것은 가엾은 수평이다 곧추세워져 덮쳐오는 것은 경건한 수직이다수평과 수직 쪼개질 줄 알면서그러나 만나야 하는 그 가증할공존내 안에 병든 cross녹슨 못 자국그 이름으로 남발한 부도 수표들 구천을 떠도는 헐벗은 유기견들남은 삶을 산다는 건 새벽 서리 하얗게...
백철현
무관심 2019.12.11 (수)
글을 한 편 쓰면 아내나 아이들에게 슬며시 한 번 읽길 청한다.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영국의대시인 쉴러도 밤새워 한 편의 시를 쓰면 가정부에게 읽게 하고 소감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시를모르는 가정부가 비평가의 안목일 수는 없으나 가정부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시가 되지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몇 번이나 고쳐 썼다고 한다. 가족에게 글을 한 번 읽어 주길 청할 때, 첫 번째 독자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정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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