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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에 얽힌 추억

바들뫼 문철봉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1-29 16:49

바들뫼 문철봉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먼동도 트기 전 미처 눈곱도 닦아내지 못한 아이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나선 읍내 방앗간엔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시루에서 구수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함지를 머리에 이고 온 어머니는 진작부터 길게 늘어선 줄 끝에 함지를 내려놓으신다. 그리고 아이에게 씽긋 눈짓 한번 주자마자 잰걸음으로 난전에 나가시면 아이는 당연히 제집에서 가져온 함지 곁을 지켜 선다. 한참 동안 차례를 놓치지 않고 함지를 들이밀고 또 밀곤 한다. 이 긴 기다림 끝에 만들어져 나온 따뜻하고 몰캉한 가래떡을 한입 베어 먹었을 때의 맛과 기분은 말로 다 표현을 못 한다. 긴 줄서기의 지겨움 같은 건 몇 번을 되풀이해도 좋을 설 대목의 설레는 일감이고 즐거움이다. 이발소에서도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린 다음에야 머리를 깎는다. 그리곤 곧바로 공중목욕탕에 가서 설맞이 목욕을 한다. 설빔 새 옷을 입기 위해서 설날이 다가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절차인 것이다. 이렇게 설을 맞는 끝 꼬리는 섣달 그믐날이다. 이날이 까치설이란다. 멀리 고향을 떠나 타관생활을 하던 삼촌들이 오고 객지에 나갔던 형 누나들이 돌아오는 날 까치가 둥구나무 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분주히 옮겨 앉으며 시끄럽게 울기 때문이다.

그날 밤 아이는 잠들고 싶지 않다. 이날 밤에만 나타나 신발을 훔쳐 간다는 밤불 귀신(야광귀) 얘기가 무섭기도 하고 자정을 지키지 못하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에 겁이 나서다. 하지만 속마음은 어머니와 누나가 떡을 썰며 도란도란하는 얘기가 더 듣고 싶고 누나가 설 선물로 사다 준 털장갑을 끼고 자랑하고픈 설렘에 더욱더 잠들기가 싫은 것이다. 자정을 넘겨보겠다고 안간힘을 쓰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는 잠이 들고 어른들의 일은 밤을 넘긴다. 

이튿날 선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그대로인 눈썹에 안도하며 부리나케 세수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면 설렘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근엄하고 정갈하게 맞던 어른들의 정월 초하룻날 아침과 마주한다. 언제 저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큰방과 대청마루를 다 치웠나 싶은 놀라움이 저절로 엄숙함으로 바뀌던 아침,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활짝 열린 방문 안 방석 위에 정좌하신 어른들을 향해 큰절을 드리면 공부 잘하라며 주시던 세뱃돈, 받아든 빳빳한 세뱃돈만큼이나 모든 것이 새롭던 그때 그 기분 그날 아침이 설날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설 세배는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졌고 외가까지 몇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녔지만 그리 힘들어하거나 피곤한 기색 없이 먼 길을 오갔다. 지금도 아버지와 아제들의 흰 도포 자락 행렬이 구불구불 논두렁을 수놓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인가 음력 설날은 구정(舊正)이라 명절로 쇠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양력을 쓰고 있으니 신정(新正)을 설이라 해야 한다 했다. 이중과세(二重過歲)는 옳지 않은 것이라 가르치는 바람에 설날 명절이 시큰둥해졌다. 그렇다고 신정(新正)을 쇠는 집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그러셨다. “왜정도 아닌데 와 그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설은 우리 설을 쇠야지 어쩌자고 왜놈 설을 쇨까?” 하시면서 그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설빔과 명절 음식들을 장만하셨다. 몇몇은 신정(新正)에 세배를 왔지만 우리는 음력설을 찾아 세배를 드렸다. 이전처럼 문중 일가와 외가까지 일일이 찾아 세배 드리지는 못하고 제 집안과 꼭 해야 할 곳만 가려서 드렸다.

지금 찾아보니 그때 그 당시의 역사를 이렇게 쓰고 있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조선문화말살 정책을 편 일제(日帝)는 조선의 음력설을 없애기 위해 조선인들이 음력설에 세배하러 다니거나 설빔을 차려입은 경우에는 먹물을 뿌려 옷을 얼룩지게 하고 떡 방앗간을 돌리지 못하게 경찰을 동원해 감시하는 등 온갖 탄압과 박해를 가해 우리 설인 음력설 쇠는 풍습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고는「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40여 년간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고 양력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를 공휴일로 지정하여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이유로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가정에서는 여전히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음력설도 공휴일로 지정하여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정부는 198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 1월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했고, 6월 항쟁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민족 고유의 설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에 1989년 음력설을 '설날'로 정하는 한편 섣달그믐(음력 12월 말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지난해 설에 이런 좋지 못한 역사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흔적을 꼬집혔다. 페이스북에 <구정을 맞아, 힘든 이웃에게 연탄 나누기를 합니다!>라고 썼다가 “설, 우리 설이라는 정겹고 바른말을 두고 구정이라는 오염된 말을 쓰느냐?”는 지인의 힐책을 받은 것이다. 부끄러웠다. 

지금은 그때 그 어렸을 적 추억 같은 설렘과 한편으론 엄숙하고 정갈하게 지내던 설날을 쇨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음력설을 우리 설이 아니라고 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세태는 너무나 달라져 있다. 우리 모두가 찾아다니며 나누던 설 인사는 손바닥 안의 전화문자와 카카오톡 따위 오만가지 카드와 동영상으로 주고받기가 예사이다. 설 쇠기가 정성이 사라진 게임이나 오락의 한 행위로 전락한 듯하다. 극대화된 문명의 편리함이 우리의 전통을 앗아간 것이다. 

세태가 이럴수록 어린 시절의 저 설 쇠기가 그립기만 하다. 

그때 그 당시를 살아가신 어른들보다 더 나이 들어가는 지금, 엄동설한보다 더 매섭고 독했을 일본제국주의 치하를 견뎌내면서 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 이날을 온전하게 지키려 애쓰신 우리네 선조 어른들이 더욱더 그리운 기해년 설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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