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호텔에 짐을 풀고 옥외 풀장과 연결되는 바닷가로 한걸음에 나갔다.
결 고운 하얀 모래가 아기 볼처럼 보드랍다. 모래밭에 길게 누운 비치 의자, 짚으로 엮어
올린 파라솔, 설렁설렁한 바람에 키 큰 코코넛 나무가 흔들린다. 바람 한 점까지 투명하다.
비행기로 7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 남미의 아름다운 바닷가에 어느새 내가 서 있다.
캔쿤 남부 해안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가면 자연 생태적인 테마 공원 세 군데가 있다.
엑스플로러(Xplor), 셀하(Xelha) 그리고 스칼렛(Xcaret)이다. 이름도 예쁜
스칼렛(Xcaret)은 고대 마야의 단어이고, 실제 발음은 ‘이시카렛’ 이다. 스노클링, 스킨
스쿠버, 씨 트랙, 래프팅…… 짜릿한 체험은 물론 그들의 역사와 문화까지도 즐길 수 있다.
오늘 하루는 스칼렛에서 보내기로 한다. 페소가 아닌 미 달러로 거한 입장료를 내고도
테마마다 비용을 또 내야 한다. 정글에 들어서면 앵무새 무리가 요란하게 반긴다. 오며 가며
'이구아나'도 만나지만 그도 나도 더는 놀라지 않는다. 좁고 푸른 계곡물에 몸을 담근다.
그늘진 바위틈을 지날 땐 차가워서 오싹 어두운 동굴을 지날 땐 으스스하다. 카메라도
아이폰도 모두 라커룸에 넣고 잠그는 바람에 남들은 사진 찍느라 법석을 떨 때 우린 그냥
유유히 떠다니며 물고기와 놀았다. 점심을 위해 호텔서 예약할 때 알려준 뷔페 레스토랑을
찾았다. 다양한 색깔로 맛난 향기로 육 해공 음식이 죄다 모였다. 파파야를 쪼아 먹는 새들과
함께 식사를 하니 소식을 하는 나도 어느새 새가 된 기분이다.
내리쬐는 태양은 거침이 없고 그대로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천연 썬 블록 로션을 떡같이
바르고 긴 팔 티도 입었지만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해먹(hammock)에 몸을 누이고
무심한 눈빛의 노마드가 된다. 푸른색이 햇빛에 반사되어 일곱 가지로 보인다는 카리브해,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느긋하다. 구름을 타고 다닌들 이보다 더 유여裕餘하랴. 부대끼며
살더라도 하찮은 이해득실 같은 건 따지지 말자.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인가. 코발트 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저 뭉게구름, 무엇보다 재탕 삼 탕
읊어도 처음처럼 들어주는 그대와 함께 마시는 ‘피나 꼴라다’ 의 맛은 소소하지만 그윽하다.
신선놀음만 계속된다면 그건 휴식이 아니다. 일에만 치여도 견뎌내기 힘들다. 몸을
수고롭게만 한다면 삶이 너무나 팍팍하다. 인생이 고리타분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더라도
기대감으로 채워가자. 그러면서 또 비우는 것이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게 아니다. 일체의 잡다한 상념을 버리고 무한한 조화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비운다는 것은 나를 꽉 채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무심결에 저 바다가 또 나를
키우고 있다.
주홍빛 노을이 선연하다. 디너 곁들인 다채로운 민속 쇼가 시작되었다. 삼면이 오픈된
공연장이었지만 후덥지근하다. 에피타이저로 나온 차가운 ‘셰리’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촛불을 밝힌 1인 식탁에 계속 날라다 주는 풀 코스 디너도 먹을 만 했다. 그들의 처절한
역사를 현란한 춤과 노래로 보여준다.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민속의상 중에 우리의 색동 옷도
보인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도 우리와 한민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에는 6대
주가 하나로 붙어 있었다. 화산폭발, 지진, 대홍수 같은 자연현상으로 남북이 나뉘고 동서가
갈라지고 결국 6대 주로 나뉘어졌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함께 뒤섞여 살았을 수도
있겠다. 멕시코 사람들도 성격이 화끈하고 우리와 모습이 비슷하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니
그럴 법도 하다. 우리는 우리 말을 찾았지만 그들은 침략자의 말을 사용한다. 호텔 존에서는
영어가 가능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스페인어 외엔 의사소통이 어렵다. 내가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언젠가 멕시코 여행 중에 감기 기운이 있어 약국에 들렀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애를 먹다가 약사가 주는 약을 일단 받아 왔다.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어 다시
가서 물으니 약사는 엉뚱한 약을 내게 준 것이다. 영어가 가능한 클리닉을 소개받고서야
제대로 된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스페인어라고 한다.
스페인이 잘 나가던 때는 120여 개국, 지금은 30여 개국에서 사용한다. 이스라엘 어느
도시에서는 변형된 스페인어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고대 마야문명을 일구어 냈고 아름다운 문화를 간직했지만 우울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스페인 침략으로 우리만큼이나 질곡의 세월을 견디어 왔다. 아직도 피폐해 보이는
그들의 삶이지만 표정만은 밝고 선해 보인다. 심성이 착한 그들에게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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