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스스로 목소리를 줄일 때 비로소 드러나는 풍경들이 있다. 어느새 하늘은 저만치 더 높아졌고, 잎새들의 서걱임과 빛바랜 초록 끝에는 엷어진 잔영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충만했던 계절을 비워내며 고요를 맞이하는 백로월(白露月)을 훌쩍 지난 절기는 빛이 제 본질로 돌아가는 겸손의 시간이다. 무성했던 원색 초록이 자리를 비우면 오솔길의 윤곽이 또렷해지고, 서늘한 공기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 폭의 엽서 그 풍경 속을 걸으며 깨닫는다. 원색으로 경쟁하던 시간을 멈추고 대지가 비로소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음을, 비로소 이별 앞에 서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눈을 맞추고 서 있는 것이 아닌 같은 방향을 향해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는 일이다. 지난 성하의 애정이 불꽃 같은 격정이었다면, 시월은 서늘한 햇살 아래 서로의 체온을 포개어가는 담담한 발자국이다. 함께 걷는 시선은 미지의 창공을 향하고, 동행은 부서지는 가을의 잔상까지 따스하게 물들여간다. 함께 걸어간다는 건 서로의 속도를 배우는 일이다. 보폭이 다른 두 사람이 길을 길게 걷기 위해 한쪽은 천천히, 누군가는 조금 더 힘을 내어 걸음을 맞춘다. 이는 자기 리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상대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 부드러운 다정함이다. 그렇게 맞춘 발자국 소리는 가을 숲의 고요 속에서 가장 안정적인 하모니가 된다.
길이 늘 평탄할 수는 없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아래 돌부리에 걸려 휘청이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가을비에 어깨가 젖는다. 서로의 숨결을 포갠 동행의 위대함은 바로 그 경계에서 증명된다. 온전히 맞잡은 손은 삶이 기우는 찰나에 서로를 지탱하는 유일한 중력이 되듯.
꽃별처럼 떨어지는 잎사귀들은 혹한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비워내는 거룩한 은퇴다. 이 아름다운 이별은 숭고함 그 자체이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겨울의 깊은 침묵을 품어 안는 생명의
성찬(聖餐)이다. 애정의 가장 깊은 결실 역시 내 안의 무성함을 덜어낼 때 비로소 시작된다. 상대의 가치관과 습관을 받아들이기 위해 오랜 고집과 이기심의 원색을 하나씩 비워내는 과정. 앙상해진 가지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투명하게 통과할 때, 둘 사이에는 비로소 서로의 영혼이 온전히 머물 수 있는 깊고 아늑한 여백이 생긴다. 나를 비워 스스로 어둠이 되어줄 때 비로소 상대라는 빛이 그 여백 속에서 울림으로 피어나는
법이다. 이 절기에서 배우는 단순한 철학이자
애정의 원초적 언어다. 스산한 계절일수록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길은 외롭지 않다. 이름 없는
들꽃 앞에 나란히 걸음을 멈추는 일, 노을 끝자락에서
아득히 길어진 서로의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하는 일. 이 사소한 여백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마침내 두 사람만의 온전한 이정표가 세워진다. 하여 동행이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아닌 서로가 자유로이 거닐 수 있도록 스스로 넓은
들판이 되어주는 배려다.
우리가 함께 쓰는 서사는 결말이 정해진 책이 아니다. 오늘이라는 여백 위에 나란히 발자국을 새겨나가는 길이며 손을 쥔 채 내면의 온기를 나누는 일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시작될 삶의 첫 페이지를 향해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일이다.
시월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서늘해지고 서로의 중력이 되어준 이들의 등 뒤에는 언제나 식지 않는
잔광이 머문다. 소멸하는 시간의 무늬를 밟으며 내딛는
그 한 걸음 속에 이미 우리가 갈구하던 본질의 완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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