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높던 수정 빛 하늘이 물에 젖어 있다.
추억처럼 물안개 내리는 속세도 잊고 싶은 계절이다. 바람이 찾아와 책장을 넘기고 아침햇살이 글을 읽는 환상적인 여름이 운연雲煙처럼 사라진 지도 한참 되었다. 살아 숨 쉬는 계절은 남은 삶을 가없이 위로해 주고 인생도 욕심내지 말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넘칠수록 좋다. 우리는 꿈과 이상을 갖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산다. 이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한편으론 날 선 직관과 빛나는 성찰도 있지만 자상함과 배려가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한다. 나이가 이쯤 되면 가르침도 배움도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참 아름다운 일이다. 무료하게 산다면 노화가 빨리 오고 살아가는데 흥미를 잃을지 모른다. 삶의 주름과 무늬도 아름다우니 노후에 대한 불안도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시간을 소모하며 주눅 들 필요도 없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라는 말이 있다. 갈대도 홀로 피어 있는 모습은 쓸쓸하지만 무리 지어 피어 바람에 흔들릴 때 아름다운 군무가 된다. 떠오르는 태양을 반기며 오늘을 맞고 함께 어울려 느긋하게 갈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욕을 부려 알게 모르게 주변을 오염시키고 있다. 무조건 소유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쌓이는 물건에 짓눌려도 버리지 못한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지만 실천이 어렵다. 방대한 서책을 힘겹게 이고 있는 서가도 한 번 더 가볍게 하고 싶은데, 솎아 낼 때마다 연민의 정이 드는 걸 왜일까. 사람들은 책뿐만 아니라 입지 않는 옷이나 사용하지 않는 가구도 버리지 못한다. 본래 내 것이 아닌데 움켜쥐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10년 넘게 발룬티어로 데생 강의를 하고 있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인연이 참으로 많다. 가깝게는 집 근처 메트로 타운에서, 멀리는 밴쿠버섬에서, 거기서도 30분간 또 배를 또 타야 하는 작은 섬에 사는 분이, 매주 데생 강의에 참여했다. 새벽 5시에 출발하면 10시 강의에 맞춰 도착한다. 끝나면 근처에서 점심을 하고, 밴 섬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5시가 된다고 한다. 태풍으로 인해 배가 결항하여, 단 한 번 결석했을 뿐이다. 그 수강생이 도착하면 일제히 박수로 환영했다. 그 열의에 함께 수강하던 분들이 지각도 결석도 못 하겠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때 나는 발을 다쳐 휠체어에 앉아 힘겹게 강의했지만 한 번도 빠질 수 없었다.
그동안 준비한 강의 자료 파일이 여러 개 있다. 새로운 자료를 계속 보충하니 필요치 않은 것도 있다. 정리하면서, 옷이나 그릇 등 부피 나가는 것만 버릴 게 아니라 스크랩, 사진, 메모 노트 등도 가볍게 할 일이다. 영혼의 지문처럼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일지라도 기억에서 내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로 인해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서슴없이 흘려보낼 일이다.
머지않아 잎새가 흩어지고 서리가 내릴 것이다. 겨울은 무자비하고 냉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나목裸木엔 눈이 덮이고, 이내 빈 가지엔 새순이 돋아나 새 생명을 잉태할 것이다. 이렇듯 비워야 채워지고 채우면 언젠가 작별을 고해야 한다. 누가 그랬나, 채우기보다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삶에 저항하지 말고 아름다운 삶을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 삶은 소중하지만 유한하고 부서지기도 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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