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의 낯빛이 붉게 물들고 바람도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북쪽에 살던 캐나다 구스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이사 갈 채비를 차렸다. 창공에 승리의 상징 같은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구스들은 추운 북쪽 호숫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곳에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날갯죽지 깃털 속에 꿈을 숨겨 온 엄마 구스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라날 때부터 연한 풀과 질긴 풀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 체력이 유난히 좋았다. 게다가 더 높이, 더 멀리 내다보며 날 수 있는 방향감각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매해 가을이 되면, 남쪽 나라로 이동을 앞둔 구스들은 경험 많고, 체력도 좋으며, 방향감각까지 뛰어난 구스를 지정하여 선두에서 날게 했다. 리더로서 무리를 이끄는 일은 거센 바람을 견뎌내야 하는 힘겨운 자리였다. 하지만 더 멀리, 더 높이 창공을 내다보며 모두의 길을 활짝 여는 자리였다. 선두에 뽑히면 남쪽 나라의 푸르른 초원에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자신의 날개를 펼칠 생각에 엄마 구스는 가슴이 한껏 설렜다. 언젠가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선두 구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꿈이 엄마 구스의 마음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가슴 한편에 빼꼼히 솟은 은빛 깃털도 그날을 기다리느라 목이 길게 늘어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V자 대형의 선두를 뽑는 구스 콘테스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엄마 구스는 남쪽 나라의 부드러운 새싹 풀과 초원의 집을 떠올리며 기대에 들떴다. 매번 대회 공고가 붙을 때면 대회에 참석하는 꿈을 꾸느라 잠까지 설쳤다. 창공을 향해 더 높이, 더 오래, 더 멀리 내다보며 장시간의 마라톤 비행을 하는 건 엄마 구스의 심장을 늘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푸른 꿈을 꾸던 엄마 구스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변화가 닥쳐왔다. 바로 자신의 몸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무거워진 배를 느끼며, 그녀는 몸 안에서 자그마한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마 구스의 몸 안에서는 신비로운 생명이 봄눈처럼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뜻밖의 생명이 갑작스럽게 찾아왔기에. 차곡차곡 쌓아왔던 일정이 한순간에 어긋났기에. 하지만 엄마 구스는 밤하늘에 맑게 떠오른 달 같은 알들을 낳으며 곧 마음을 달리 먹었다. 소중한 생명이 자신의 삶에 선물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엄마 구스의 심장을 더 세차게 뛰게 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가슴 깃털을 뽑아 마른 갈대와 섞고, 작은 보름달 같은 알들을 소중히 품을 둥지를 만들었다. 한 달 동안 밤낮으로 품으며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알들을 굴려 자리를 바꾸고, 비나 바람을 온몸으로 막았다. 밤 호숫가에서는 졸음과 싸워가며 둥지를 지켰다. 따뜻한 상앗빛 알들은 둥근 보름달의 고요한 기운을 제 안으로 모조리 흡수했다. 엄마 구스의 풍성한 가슴 깃털이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알들을 덮었다. 태어날 준비를 하던 새끼들은 깃털 이불 속에서 달콤한 꿈나라에 빠져들어 갔다. 아빠 구스도 둥지 주변을 부지런히 맴돌며 경계 태세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지극정성의 한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알들 속에서 소프라노 톤의 삐악삐악 우는 작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해 발버둥 치는 그 외침이 알껍데기를 깨뜨리고 있었다. 둥근달의 껍질을 부리 끝으로 톡톡 쪼는 새끼 구스들은 서서히 꿈틀거렸다. 둥근달에 한 줄, 두 줄씩 여러 개의 금이 갔다. 알들을 깨느라 힘든 새끼들은 한참 동안 천천히 껍질을 벗어났다. 낯선 세상에 처음으로 고개를 내밀은 새끼들은 힘에 부쳤다. 그래서 중간중간 쉬면서 알껍데기를 깨뜨렸다. 고군분투의 시간이 흐르고, 온몸의 솜털이 젖은 아기 구스들이 엄마의 날개 아래서 고개를 내밀었다. 낯선 호수의 풍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면서. 엄마는 보송보송한 깃털 날개로 아기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그들의 털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곁을 지켰다.
알들에서 깨어난 뒤, 몇 시간이 흘러갔다. 생명력이 강한 새끼들은 첫걸음을 떼고어느새 풀밭을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엄마 구스가 새끼들을 향하여 사랑스럽게 울었다.
“아가들아, 엄마 따라 해봐. 자! 꽉꽉.”
엄마 구스가 부리로 연한 풀을 골라 먹으며 이곳저곳에서 풀을 뜯었다. 그리하자 새끼들은 머뭇거리다가 서툰 부리 질로 엄마를 따라 해 보았다.
“음!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엄마!”
새끼 구스들이 처음 먹어보는 싱그러운 풀 맛에 감탄하며 꽉꽉 따라 합창했다. 처음에는 부리 근처에 온통 풀을 묻히기 바빴지만, 점점 더 능숙하고 빠르게 풀을 뜯어 먹었다. 풋풋하고 쌉싸름한 풀 맛에 취한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식사에 열중했다.
“자! 이제 여기로 와. 나처럼 헤엄쳐 봐! 내 뒤를 잘 따라 다녀야 해. 멀리 가지 말고.”
엄마 구스가 다시 한번 외치자 새끼들이 일제히 풍덩 호숫가로 빠져들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탁월한 수영 실력을 뽐내던 엄마는 새끼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계속 곁눈질로 확인했다. 아기들은 온종일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호숫가를 산책했다.
어느 날은 짓궂은 사내아이가 새끼들을 보고 새끼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빨리 걷지 못하는 아기들의 날개를 휙 낚아채려 했다. 엄마 구스는 깃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사내아이 앞으로 용감하게 돌진했다.
“하악. 하악. 쉭. 쉭.”
하악 소리를 크게 내며 부리를 넓게 벌려 사내아이에게 곧바로 경고했다.
‘어디서 우리 아기들을 넘봐.’
사내아이를 간신히 쫓아내자 엄마의 크나큰 날개 뒤로 숨었던 아기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풀 뜯기 시간과 수영하기, 햇볕에서 일광욕하기, 낮잠 자기 시간이 한가롭게 흘러갔다. 평화로워 보이는 호숫가 풍경과는 달리, 엄마 구스에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늦게 알들을 낳는 바람에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번 가을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무리를 지은 구스 떼들이 일제히 호숫가에 나타났다. 그들은 왕성한 식욕으로 호숫가의 풀을 뜯어 먹으며 체력을 비축했다. 커다랗고 날렵한 날개를 휙휙 저으며 날갯짓도 했다. 마침내 엄마 구스가 눈 빠지게 기다리던 영광의 그 날도 성큼 찾아왔다.
“어이. 엄마 구스. 이번 가을 비행에서 선두 자리에 서 볼 생각 없는가? 상이 두둑하던데.”
“아! 대장 구스님. 이번엔 사정이 있어서요. 아기들 때문에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아직 날지 못하거든요.”
“그거 참! 안타깝네. 내가 특별히 자네를 선두에 추천하려고 했었는데. 자네 방향감각 하나 끝내주잖아. 체력도 특별히 좋고.”
대장 구스는 아쉽다는 듯 여러 번 입맛을 다시며 끼룩끼룩 울었다. 엄마 구스도 선두에 서고 싶은 야망이 아직 가슴 속에 깊숙이 남아 있어서 못내 아쉬웠다. 그녀는 끼룩, 하고 나지막이 울었다. 목소리에도 서글픔이 깊게 배어 있었다.
냉랭한 가을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가장 연약한 아기 구스가 날개를 퍼덕이다가 호숫가로 떨어져 버렸다. 그곳에는 뾰족한 나뭇가지가 창처럼 위험하게 서 있어서 엄마 구스는 아기를 급히 몸으로 감싸안았다. 밤마다 아기 구스들은 나는 연습보다 엄마의 날개 아래로 자꾸만 파고드는 일에 더 열중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기들은 나는 법을 더디게 익혀갔다. 초조한 마음에 많은 생각이 교차하던 그날밤, 엄마는 긴 날개를 둥글게 펼쳐 아직 날지 못하는 아기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포근히 덮어 주었다. 그녀의 날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이불이 되어 아기들을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낮에 보았던 구스 떼들이 하나둘 하늘로 멋지게 떠오르던 광경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고 끼룩끼룩 남쪽 나라로 모험을 떠나는 그들 무리 속에서 자기 가족만 빠져 있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러자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그녀를 추천하고 싶다던 대장 구스의 굵직한 목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 엄마 구스는 날개를 더욱 안쪽으로 둥글게 움츠렸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엄마 구스에게 밤새 둥지 주변을 살피던 아빠 구스가 넌지시 찾아와 말을 건넸다.
“당신. 이번 가을 구스 선두에 서지 못해서 좀 아쉽지?”
“에이. 그게 뭐라고요. 이번에 못 하면 다음에 또 하면 되지요.”
서운했던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엄마 구스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한 해라도 일찍 뽑혀야 체력이 받쳐주지. 더 늦으면 선발되기 힘들지 않겠어?”
“선발 못 되면 어때요. 괜찮아요. 우리 아기들이 대신 있잖아요.”
“그나저나 아기들이 나는 연습은 많이 했어? 우리도 더 추워지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엄마 구스는 대답 대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기 구스들을 기다려 주던 평온한 시간이 떠올랐다. 차분한 햇살이 내려앉던 그 시간. 엄마는 일부러 낮게 날아서 아기들과 속도를 맞췄다. 새끼들이 비행에서 떨어져서 호숫가로 퐁당 떨어져도 잠자코 다시 헤엄쳐 나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아기 구스들이 짧게나마 두둥실 허공에 떠올라 희열에 잠겼던 순간들도 엄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눈을 뜨곤, 아빠 구스에게 대답했다.
“아기 구스들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저를 바꿔 놓았는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처음에는 높이, 멀리 나는 선두 구스가 되고만 싶었어요. 그런데 내 품에서 작은 생명들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면서 알게 됐어요. 이 아기들도 나만큼이나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길 원했을 거라는 걸.”
아빠 구스가 그녀의 어깻죽지를 툭툭 두드리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자기도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을 포기하는 게 안타깝지 않아?”
엄마 구스는 광활한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한 번 휙 날아오르고 나서 호숫가에 고즈넉이 앉았다.
“잠시 선두에서 밀려나 후발대가 된다고 해도 뭐, 괜찮아요. 아기들이 날아오를 때까지는 내 꿈의 자리를 잠시 기다림의 길목에 놔두고 싶어졌어요. 작은 생명도 언젠가는 자기 날개로 날아가고 싶을 테니까요. 새로운 꿈이 날갯짓하네요.”
그녀는 눈가가 촉촉해져서 잠들어 있는 새끼들을 훑어보았다. 저녁 바람이 꽤 서늘했다. 엄마는 자세를 바꿔서 바람을 등졌다. 세찬 바람을 막고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몽실몽실한 솜털 이불을 만들어 아기들을 덮어 주었다. 잠자는 아기 구스들의 들숨과 날숨을 가만히 헤아려도 보았다. 아기 구스들의 몸집이 더는 품 안에 다 안길 수 없을 만큼 자랄 때까지 그녀는 기꺼이 날개를 펼쳐 바람막이가 되어 줄 것이다. 엄마의 날개 아래서 아기들의 작은 날개가 곱게 숨을 골랐다. 언젠가 그들도 선두 대열에 섞여 은빛 날개를 힘차게 펼칠 터였다. 동틀 무렵의 햇살이 엄마 구스의 날개 끝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 햇살은 차츰 아기 구스들의 날개 끝으로 옮겨갔다. 이내 그 날개도 금빛 옷을 입은 듯 반짝거렸다. 장엄하게 날아오를 아기 구스들의 내일을 꿈꾸며 엄마는 자신의 날개를 승리의 V자로 꼿꼿이 세워 보았다. 아직은 서툴지만 있는 힘껏 날갯짓하는 아기 구스들 틈에서 그녀는 자신의 꿈도 날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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