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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문학 신춘문예 당선작(소설 부문)

김민선·이재헌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6-03-06 12:43

차상 | 베랑기아의 밤 김미선
장려 | 깨진 거울 이재헌
 <베링기아의 밤>  김미선

 곧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보고 있던 잡지를 덮고 창문 덮개를 올렸다. 구름 아래로 만년설 덮인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고도가 낮아지자 뭉뚱그려져 보이던 실체가 하나둘 드러났다. 언뜻언뜻 보이는 에메랄드색은 호수 아니면 바다일 것이다. 비행기는 위로 자라지 못한 침엽수 군락에 둘러싸인 물 위를 선회한 뒤 착륙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공항 건물 두어 채가 고작이었다. 북극해에서 불어온 바람이 계단을 내려오는 내 등을 힘껏 떠밀었다. 긴 여정 탓에 녹초가 되었지만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 듯한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나 말대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출장을 떠난 지 일주일 만에 해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른 새벽,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힘없는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다. 몸살 기운이 역력한 해나는 간헐적인 기침 끝에 나지막이 내뱉었다.
 “I need you, Mom.”
 평소에는 선을 긋다가도 아쉬울 때면 가차 없이 그 선을 넘어오는 딸은 내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결혼 후 줄곧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숙명처럼 여겨온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이다웠다. ‘사랑해’가 아닌 ‘당신이 필요해’라던 남편의 청혼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내게는 ‘필요’가 ‘사랑’의 가장 절실한 동의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타인의 필요를 먼저 살핀 뒤에야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곤 했다.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출국 날짜를 미룬다는 문자를 보내자 바로 전화가 왔다.
 “다 큰 애가 겨우 몸살 난 것 갖고 그리 호들갑 떨 건 없잖아. 성수기라 변경 수수료도 비쌀 거 아냐.”
 매사를 돈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딸의 조기유학을 허락해 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남편의 말이 길어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테이블에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해나가 출장 가 있는 M시는 상우가 사는 울루카크톡까지 가는 길에 있는 중간 기착지였다. 베란다로 나가 폐부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신 후 들어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남편은 내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 할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해나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득 채운 캐리어를 현관에 내놓고 잠시 머뭇거리다 스토리지로 들어갔다. 백팩 하나를 더 꺼내고 선반 구석에서 먼지 쌓인 카메라 가방을 찾아냈다. 안에 들어있던 카메라와 장비들을 꺼내 그의 기사가 실린 잡지와 함께 백팩에 챙겨 넣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해나가 묵고 있다는 숙소에 도착한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모텔 간판이 달린 회색 컨테이너가 지지대 위에 일렬로 올라앉아 있었다. 자동차 여행객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라지만 너무 열악해 보였다. 객실 문을 두드리자 해나가 걸어 나와 문을 열었다.
 “벌써 온 거야? 감동이다, 엄마.”
 전자레인지에 데운 음식을 남김없이 비운 해나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하자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며 나도 이내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타닥거리는 자판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기운을 차렸는지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던 해나가 돌아보며 속삭였다.
 “아직 밤이야, 엄마. 더 자.”
 의아한 마음에 암막 커튼을 살짝 젖히자 창문에 들러붙어 있던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득한 지평선 끝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둥근 물체는 달이 아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챙겨 나왔다. 백야 아래 펼쳐진 풍경도 손에 닿는 카메라의 묵직한 무게도 생경했다. 태양의 위치는 낮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채도가 낮아진 공간 속 사물들은 한결 차분했다. 일몰 후 그림자가 사라지며 부드럽고 따뜻한 빛이 온 세상을 채우는 시간, ‘매직 아워(Magic Hour)’. 문득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찰나의 빛을 놓치지 않으려 신중하게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해나 또래의 내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한 달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호에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접했다. 페이지를 넘기다 마음을 붙드는 사진 한 장에 멈춰 작가 이름을 확인했다. 영어 이름 뒤에 붙은 이니셜과 성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야. 무얼 그릴지는 오직 찍는 사람에게 달렸지.”
 그의 목소리가 불러일으킨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그의 사진전이 열리는 아트 갤러리로 달려갔다. ‘베링기아의 밤’. 전시실 한가운데 걸린 대형 작품 앞에 서자 백만 볼트 전류에 감전된 듯 온몸이 전율했다. 화면 중앙에서 솟구친 아쿠아마린색 빛기둥이 바깥으로 갈수록 옅은 너울을 그리며 번졌다. 눈 덮인 대지, 본연의 색을 잃은 밤. 빛의 산란으로 푸르스름하게 젖어 든 사위. 어둠이 지워진 자리에 쏟아져 내린 빛의 장막, 오로라였다. 관람객들은 고혹적인 프레임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가장 깊은 어둠을 찍는 사진가’라고 적힌 패널 속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은발과 짧은 수염, 날렵한 턱선. 그리고 목에 걸린 펜탁스 스포매틱. ‘타닥’ 하고 울리는 셔터음이 좋아 일부러 공 셔터를 날리곤 했던 그의 옛날 카메라. 이제는 누구도 쓰지 않을 예순 살의 구식 카메라를 상우는 여전히 품고 있었다. 낡은 카메라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전시회장을 다녀온 날, 한국의 K 선배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영민하게 넘나들며 성공한 그는 상우의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 일처럼 환호했다.
 “그놈, 기어이 물건을 만들어냈구나. 재능도 재능이지만 독종이었지.”
 선배는 내게 자신의 연락처를 상우에게 꼭 전해달라 당부하며 덧붙였다.
 “너도 한국 오면 내 작업실에 꼭 들러라. 네 실력 썩히기 아까워. 나 좀 도와주면서 다시 시작해 봐.”
 “선배, 난 손 놓은 지 너무 오래됐어. 감각도, 열정도 다 마른 지 오래야.”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엔 네가 상우보다 월등했어. 그 날카로운 시선, 어디 안 간다. 기다릴게.”
 그날 이후, 선배의 음성과 상우의 사진 속 아쿠아마린색 빛기둥이 머릿속에서 충돌할 때마다 왼쪽 가슴께가 울렁였다.
 “사진 찍어 밥이 나와 쌀이 나와? 돈도 안 되는 거 붙들고 있지 말고 애나 잘 키워.”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남편이 던진 말을 떠올리며 나는 미련 없이 카메라를 스토리지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프런트 데스크가 있는 컨테이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촌부의 얼굴을 한 남자가 돌아보았다. 나는 조식 테이블에서 커피를 한 잔 따라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거치대에서 팸플릿 몇 장을 뽑아 들고 느릿느릿 다가왔다.
 “해나 씨 어머니 맞으시죠? 어디서 오셨다고 했더라?”
 “한국에서요. 물론 남쪽이죠. 하지만 밴쿠버에서 산 지 오래됐어요. 해나가 나을 때까지 며칠 함께 머물 생각입니다.”
 “해나에게 들었어요. 여긴 처음이죠?”
 “그런데 전혀 낯설지가 않네요.”
 내 말에 남자가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나도 해나를 처음 봤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아주 옛날에는 이 땅이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게 분명해요. 이곳을 ‘베링기아 평원’이라고 부르는데, 고릿적에 두 대륙이 붙어 있을 때 우리 조상들이 거길 건너왔다더라고요.”
 남자는 오래전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듯 친근감을 드러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챙겨온 잡지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가고 싶은데요……”
 울루카크톡(Ulukaktok). 여전히 입안에서 겉도는 외계어 같은 이름. 그가 살고 있다는 마을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덧붙였다.
 “여기서 그 섬까지 가려면 꼬박 하루는 잡아야 해요. 가까워 보여도 막상 가려면 절대 쉽지 않지. 북극 근처라 여기보다 훨씬 춥고 손바닥만 한 동네거든요.”
 남자의 도움으로 경비행기 예약을 마친 후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가 다 지나도록 해나에게선 문자 한 통 없었다. 컨디션은 좀 어떤지 물어보려다 이내 관두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해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며, 알아서 할 테니 상관 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나는 해나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남편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갔었다.
 사진을 찍으며 걷는 동안 찝찔한 바다 냄새가 따라다녔다. 셔터를 한 번씩 누를 때마다 박제되었던 옛 기억들이 하나둘 소환되었다. 틈만 나면 누비던 서울의 뒷골목, 목적지 없이 몸을 실었던 버스 창밖의 변두리 풍경들. 피사체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숨 죽여 기다리던 시간과 마침내 인화지 위로 형체가 맺힐 때 느꼈던 찰나의 환희.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토록 절절했던 열정은 흔적도 없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모텔 입구의 이정표였던 키 큰 토템폴이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들판엔 키 작은 들꽃들만 속절없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멀리 온 것일까. 한참을 걸었는데도 가려던 언덕은 오히려 더 멀어진 듯했다.
 “착시를 조심해야 해요. 가까워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무턱대고 쫓아가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죠.”
 북극권 특유의 착시현상을 경고하던 남자의 말이 그제야 생각났다. 머리 위에서 아침과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태양만으로는 방향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지표로 삼았던 것들이 사라지자 막막함이 밀려왔다. 본능적 감각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엔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지만 내가 지탱해 온 삶 자체가 거대한 착각이었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마. 중요한 건 그 너머에 있으니까.”
 지워진 줄 알았던 상우의 목소리가 흐릿한 빛을 뚫고 들려왔다. 남해의 작은 섬으로 출사를 갔던 그해 여름,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에 나는 밤낮없이 홀로 섬을 헤매고 다녔다. 친구들이 민박집 평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마지막 밤에도 나는 카메라를 들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먼저 어둠을 마주하고 있던 상우가 있었다.
 “어둠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야.”
 별이 아니라 어둠을 찍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에는 별보다 어둠이 더 많다는 말, 어둠이 깊어야 별이 빛난다는 그의 철학은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쏟아질 듯 명멸하는 별빛 아래서 우리는 침묵을 공유했다. 밀려온 파도가 발을 적실 때마다 세상에 단둘뿐인 공모자가 된 것 같은 묘한 일체감을 느꼈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해나와 챙겨온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아픈 바람에 일이 밀려버렸다며 밤늦도록 작업을 하다 겨우 잠든 해나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왔다. M시에서 세 시간을 날아 P시에 내린 뒤, 한 시간의 대기 끝에 다시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두 시간을 더 날아왔다. 떠나온 곳을 단념하기에 좋은 거리. 내가 상우에게 닿기 위해 흘려보낸 세월만큼이나 먼 길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평평한 언덕으로만 둘러싸인 울루카크톡의 첫인상은 프로타(Protar) 렌즈로 찍은 한 장의 흑백사진이었다. 북극해의 가장자리에는 빙산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들이 조각구름처럼 떠다녔다. 비행기에서 내려 활주로를 걷는 동안에도 엔진의 잔향이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익숙한 편두통의 전조였다. 시골 간이역 같은 공항을 빠져나와 낡은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마을 회관을 겸한 관광 정보 센터를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침에 마주친 이를 점심에도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 하나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오직 하나씩만 존재하는 곳. 학교도, 보건 진료소도, 그리고 그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작은 식료품점도. 주인이 친절을 베풀며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자 지근거리던 두통이 조금 잦아들었다.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향기에 팽팽했던 긴장이 다소 느슨해졌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편안한 이완이 아니라 날 선 각성일지도 몰랐다.
 잔이 거의 비어갈 즈음 창밖으로 멀리 점 하나가 커지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착시는 아니겠지. 머리카락이 쭈뼛 서더니 소름이 돋았다. 시간의 강물을 건너 마침내 그가 눈 앞에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상우의 얼굴에서 세월 속에 묻힌 옛 흔적을 찾아냈다.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 나는 일부러 씩씩하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그러나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이곳에서 표정을 숨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우는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에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왜 이 오지까지 흘러 들어왔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흰색의 힘’을 말했다. 지우고 싶은 것을 덮어버리는 눈과 얼음의 색. 오래전 완벽한 어둠을 찾겠다던 상우가 발견한 건 결국 어둠을 능가하는 밝은 빛이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날 찾아낸 거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네 기사를 봤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하마터면 도서관에 앉아 있다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니까. 그길로 나와서 잡지도 사고 네 사진이 걸린 갤러리도 찾아갔었어.”
 내 목소리에 그때의 흥분이 묻어 나왔다.
 “사진 계속하길 잘했네. 생계도 책임져주고 이렇게 옛 친구도 다시 만나게 해주고. 게다가 사진은.”
 상우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낮게 읊조렸다.
 “정직하지.”
 그 말 뒤엔 마치 ‘배신하지 않아, 너처럼.’이란 말이 생략된 것처럼 들렸다. 짧은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정직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꾸짖는 환청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늘어뜨린 채 빈 머그컵만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상점을 나와 모난 돌멩이가 깔린 들판을 걸었다. 마을에 정해진 길은 없었다. 누군가의 발길이 머물렀던 흔적을 묵묵히 따라가는 것, 그것이 이곳에서는 길이 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띄엄띄엄 늘어선 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우의 집은 바다와 맞닿은 땅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출한 집은 가느다란 지지대 위에 위태롭게 떠 있었다. 회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외벽에는 간신히 숨통만 틔워놓은 듯한 창문 두어 개가 전부였다.
 먼저 들어간 상우가 집 안을 정리하더니, 내가 나타나자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 젖혔다. 그곳에는 분리된 또 하나의 공간, 사진으로 도배된 거대한 벽이 드러났다. 벽 자체가 하나의 웅장한 액자였다. 수백 장의 밤하늘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벽 앞에 서자, 순식간에 은하계 한복판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인간의 상상력이 미처 닿지 못하는 우주의 밤. 살아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별들의 향연이었다. 초록과 보랏빛이 뒤엉킨 오로라 소용돌이는 당장이라도 사진을 뚫고 튀어나와 내 몸을 휘감으며 일렁일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 보면 검게만 보이던 밤하늘의 비밀이 그곳에 걸려 있었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때로 사진은 작가가 통과해 온 삶의 단면을 입증한다. 벽에 붙은 수많은 사진의 프레임 안에서 상우가 견뎌온 세월이 읽혔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의 광채가 선명해진다는 진리를 몸소 증명해 낸 기록들이었다.
 “내가 지금 우주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아!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거야?”
 디테일 하나라도 놓칠세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사진을 바라봤다.
 “견뎌야 했으니까. 잠자는 시간만 빼고 오로지 사진에만 매달렸어.”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들은 여태껏 본 적이 없어.”
 “빛을 제대로 이해하면 돼. 빛이 사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익히는 작업이 곧 사진이니까.”
 경탄하며 벽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간 나는 책상 앞에 붙은 작은 사진 한 장 앞에서 숨을 멈췄다.
 “어? 이 사진!”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상우를 돌아보았다. 그해 여름, 출사 때 찍은 동아리 단체 사진이었다.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다른 한 손은 상우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얹고 있었다. 귀퉁이가 닳아버린 색 바랜 사진 속에서 우리는 여름 바다의 윤슬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난 진작 잃어버렸는데, 넌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구나. 이제야 생각난다, 저 사진 찍던 날. 한 번만이라도 그때로 돌아가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때였다. 상우가 다가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멀쩡하던 삶이 하루아침에 망가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던 시절이었잖아.”
 상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돌아갈 수는 없어도, 돌아볼 수는 있겠지.”
이어진 상우의 말이 마음 한 귀퉁이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그는 사진을 거칠게 떼어내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등을 돌렸다.
 “미안해, 상우야.”
 그를 찾아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말을 나는 가까스로 뱉어냈다.
 치열했던 전대협 집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서 상우의 이름을 발견했다. 순간 나를 둘러싼 세상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학보사 친구들과 어울리며 내가 찍은 사진들을 건넸던 사소한 행위들이 올가미가 되어 돌아올까 두려웠다. 상우가 끌려간 심연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고, 나는 그 거리를 확인하자마자 비겁하게 뒷걸음질 쳤다. 상우가 고문을 당해 망가졌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누구도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풀려나온 상우는 도망치듯 형이 있는 캐나다로 떠났고 나는 일상의 안온함 속으로 숨어들었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 도착한 그의 편지를 외면하며 남은 인연마저 끊어내기에 급급했다.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을 곁에 둘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어둠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 걸 견뎌야 했어.”
 상우는 이누이트의 영혼, ‘이누아(Inua)’를 이야기했다.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그들의 믿음은 상우를 죽음보다 깊은 상실감에서 건져 올린 구명줄이었다. 나는 그가 낡은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 모든 존재의 영혼과 교신하며 무너져가는 자신을 간신히 지탱해 왔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상우를 이제는 내가 도와줄 차례라는 생각은 비겁한 보상 심리였을까.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달라는 내 말에 상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도움? 지금? 나한테 네가 필요했던 건 30년 전이야!”
 그는 사진 벽을 커튼으로 가려버린 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의 의중과 상관없이 베푸는 호의가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순간, 의식 저편에 꽁꽁 숨겨두었던 진실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타인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나의 오랜 강박은 정작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외면했던 한 사람에 대한 지독한 부채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
 집을 나간 상우를 기다리다 백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평온했던 상우의 일상에 혼란만 던져준 꼴이었다. 왔던 길을 터덜터덜 되짚어 가는데 모퉁이 바위에 걸터앉은 상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흰색 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상우야, 나 그냥 갈게.”
 내 말에 상우가 일어서더니 내 백팩을 낚아채듯 제 어깨에 짊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가면 어떡해.”
 언덕에 올라가면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며 앞장서는 상우를 한 걸음 뒤에서 마지못해 따라 걸었다. 한때 울분으로 들썩였을 그의 어깨 위로 북극의 설원을 닮은 성근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은숙아, 이누이트들은 화가 나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
 걸음을 멈춘 상우가 막대기로 아득한 지평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화난 마음 그대로 하염없이 얼음 평원을 걸어. 한참을 걷다 화가 풀리면 그 자리에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돌아오는 거야.”
 돌아오는 길에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이유를 되짚고 마침내 그 이유를 깨닫게 되면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는 설명을 하며, 상우는 들고 있던 막대기를 멀리 던졌다.
  “내 막대기들이 저 평원 어딘가에 수없이 꽂혀 있어. 사진에 미친 후로는 막대기 따위 잊은 지 오래지만.”
 나도 무작정 걸을 때가 있었다. 빛을 향해 서 있는 내 등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자각했을 때, 다가올 시간보다 지나온 시간 쪽으로 고개가 자꾸 기울어질 때. 걸음을 멈추고 보면 그것은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지 못한 몸은 회전문 안에 갇힌 채 언제나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언덕에 올라서자 평평한 지대가 나타났다. 절벽 끝에는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린 사람 형상의 석탑이 서 있었다.
 “저 탑,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더라.”
 “이누이트를 상징하는 ‘이눅숙(Inuksuk)’이야. 우정과 신의의 상징이지.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네 생각이 났어. ‘이은숙’과 발음이 비슷해서 신기했거든. 네가 여기까지 따라와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으니까.”
 상우의 무심한 말에 명치끝이 저려왔다.
 “상우야, 미안해……”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제 그만해. 다 지난 일이잖아.”
 상우가 석탑이 서 있는 절벽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바다 아래 베링기아 육교가 잠겨 있어. 만 년 넘게 잠겨 있지만 언젠가 다시 떠오른대. 그러면 반대편 땅으로 걸어서 건너갈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오래 잠겨 있으면 물살에 쓸려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땅이 단단하다면 남아 있을 거야, 분명히.”
 우리는 절벽 끝으로 걸어가 망망한 북극해를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불어온 찬 바람이 상우와 나를 스치고 툰드라 평원 너머로 표표히 흩어졌다.
 눈을 떴을 때, 어두워지지 않는 밤을 지나 아침이 온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늦도록 상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 깼으면 이리 나와 봐.”
 밖에서 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데크로 나갔다. 파삭거리는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정신이 날아갈 듯 개운해졌다. 바람 끝에는 벌써 겨울 냄새가 묻어 있었다. 데크 중앙에는 거대한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가 세워져 있었다. 삼각대에 거치된 렌즈의 각도를 조정하던 상우가 돌아보았다.
 “이리 와서 한번 들여다봐.”
 목소리는 어제보다 한결 경쾌했다. 나는 몸을 숙여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야. 우리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들을 사진은 담아내기도 하거든. 바람의 얼굴이나 빛의 냄새 같은 것들 말이야.”
 상우는 여전히 내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보이는 실체만을 붙잡으며 살아온 나는 평생 알 수 없을 그만의 우주였다.
 “백야가 끝나고 극야가 찾아오면 여기서도 오로라가 선명하게 보여. 더 깊고 춥고 긴 밤일수록 최고의 명장면이 연출되지. 만약 오로라가 춤추듯 일렁이는 서브스톰(Substorm)을 만난다면, 네 인생은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릴지도 몰라. 예전의 나처럼.”
 부유하는 상우의 눈동자 위로 아침노을이 붉게 번져갔다. 오로지 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힌 눈. 얼어붙은 땅에서 길고 시린 밤들을 견디게 했을 예술적 욕망이 서린 눈. 상우가 홀로 통과해 왔을 수많은 밤을 상상하자 오한이 든 나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상우의 픽업트럭에 올라탔다. 차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 같은 붉은 녹이 군데군데 슬어 있었다. 지나온 삶의 궤적을 닮은 거친 길 위를 상우는 거침없이 달렸다. 울퉁불퉁한 노면의 질감이 바퀴를 타고 몸속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멀미가 날 지경이어서 차창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풀풀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함께 바라보았던 바다가 뒤로 휙휙 물러났다.
 “은숙아,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다.”
 공항에 도착하자 상우가 주머니에서 청록색 펜던트를 꺼내 내밀었다. 우정과 신의의 증표, 상우에게 한때 '이은숙'이었다던 '이눅숙'. 나는 펜던트를 건네받아 손안에 꼭 쥐었다. 차가운 돌덩이에는 상우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다시 올 거야. 너 말고 오로라 보러. 온 김에 내키면 네 얼굴도 아주 잠깐 보고 갈까?”
 내 말에 상우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K 선배가 서울에서 네 사진전을 열면 어떨까 하더라. 이건 선배 연락처야.”
 나는 선배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상우에게 건넸다.
 “생각해 볼게.”
 우리는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섰다. 탑승구 끝에 도달해 뒤를 돌아봤을 때 상우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기체는 활주로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다 날아올랐다. 나란히 북극해를 바라보던 언덕과 툰드라 평원 그리고 상우의 집이 외롭게 서 있던 해안선이 소실점으로 멀어졌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물과 뭍의 경계는 휘어진 막대기처럼 보였다. 그것은 상우가 꽂아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나는 의자 아래 두었던 백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삶에 존재하는 모든 장면을 기억할 수 없기에 어느 찰나만을 따로 떼어내 남겨두어야 한다면 그 자리에 사진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수면 위로 떠오를 베링기아 육교를 상상하며 나는 카메라 렌즈를 창에 바짝 가져다 붙였다. 뷰파인더 안으로 백야의 잔광이 쏟아져 들어왔다. 셔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깨진 거울> 이재헌

* 여기에 등장인물과 내용들은 모두 지어낸 허구입니다.

1. 재회 점심에 곁들인 반주 탓인지 의자에 앉자마자 나른함에 졸음이 살짝 밀려들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버려 두려 했는데 귀찮게 계속 울어댔다.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최영훈처장! 나 김동철이요.”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연락처를 알았어요.”

“반가워요. 조만간 만나서 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몇 십 년 만에 전화한 사람이 갑자기 무턱대고 만나 잔다.

결국 날을 잡아 연안부두 횟집에서 만나 활어회를 시켜놓고 소주잔을 함께 기울였다. 소주병이 늘어갈수 록 그의 말은 쉴 틈이 없었고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점점 더 높아졌다. 술주정인지 신세한탄인지 모를 울분을 계속 토해 냈다.

“나 내년이면 정년이요!”

“교장도 못해보고 평교사로 썩다 나온단 말이요.”

“그 놈의 새끼 아니었으면 장학사도 하고 교장도 벌써 했을 텐데 생각할수록 분해서 원.”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고 만났는데 내 얘기는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푸념만 듣다 보니 짜증도 나고 빨 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그를 두고 혼자 가긴 어렵게 되었다. 가까 스로 자리를 정리하고 택시나 잡아 줄 요량이었는데 자기집에 같이 가자고 내 팔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 았다. 잠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못이기는 척하고 집까지 동행했다.

벨을 누르자 현관문이 열리고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기색의 환갑나이 안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삼십 몇 년 전 면사포를 쓴 채 마주쳤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사실 반갑지 않은 김동철을 만난 것도 술 취한 그를 뿌리치지 못하고 집까지 따라 온 것도 내심으로는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친김에 그녀가 깔아 준 이불 속에서 자고 차려준 아침까지 얻어 먹고 나왔다.

2. 초연

2 혜연이 누나가 저녁을 사준다기에 나갔더니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너 은정이 알지? 지금 나하고 같이 일해.”

“그럼요.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랐는데요.”

『모를 리가 있겠나. 중학교 때부터 꿈속에서도 그리던 나의 짝사랑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강은정이다.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은 국민학교 중학교 4년 선배다. 그녀는 시장 가장자 리 천변에서 작은 국밥 집을 운영하는 엄마와 단 둘이 살았다. 나는 개천 건너 동네에 살았지만 아버지가 시장 안에서 작은 잡화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앞을 자주 지나 다녔고 가끔 아버지를 따라 그 집 에서 국밥을 먹기도 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개천가 벚꽃이 한창 만개하였을 때 그 아래를 지나던 그녀의 모습이 왜 그런지 처음 으로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는 이미 고등학교 이학년 생이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나의 짝사랑 의 대상이 되었다. 오가며 만나도 말도 못 부치고 작은 가슴만 벌렁거리며 그냥 스쳐 지나칠 수 밖에 없었 다. 그런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고 누나 덕분에 밥까지 같이 먹다니 꿈만 같았다.

“누나!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그래. 은정이 에게도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 누나 친구니까 그게 편하고 좋지.”

얼결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칭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은정이 누나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나는 공고 졸업 후 가전공장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다 크고 작은 사고를 몇 번 목격한 후 일년간의 짧았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돕고 있었다. 이종사촌인 혜연이 누나는 인근 A군에서 나고 자랐는데 농협에 취직을 하면서 내가 사는 읍내에 작은 방을 얻어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때 혜연이 누나가 가게로 찾아 왔다. 마침 장날이 아니어서 혼자 있었다. “날씨도 후덥지근한데 어디 시원한 바람이라도 쏘이고 멱감을 데가 없나 모르겠네.”

“아! 있지요. 좋은 데가 있어요! 내가 안내 할게요!”

그렇게 해서 그날 밤 나는 누나들의 안내자 겸 호위병이 되어 밤 나들이에 동행하게 됐다. 천변 길을 따 라 읍내를 벗어나 한참 올라가면 합수머리 위에 작은 개천 보 아래에 개구쟁이 시절 물장구치며 놀던 그 리 얕지도 작지도 않은 아주 맑고 깨끗한 천연 목욕탕이 있다. 누나들의 수다를 들으며 걷는 밤길이 마치 무릉도원을 걷는 꿈길만 같았다.

3 “이렇게 좋은 데가 있는 줄 정말 몰랐네.”

누나들이 감탄조의 탄성을 함께 내 뱉었다.

“당연하지요. 여긴 내가 꼬맹이 시절에 벌거벗고 뛰어 놀던 놀이턴데요.”

누나들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나는 조금 떨어진 아래에서 멱을 감았다. 어스름한 밤 은근슬쩍 엿보 인 나신의 실루엣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나서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양 옆에 사열하듯 늘어선 밤 길을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을 등불 삼아 함께 걸으며 묘한 체취에 취해 보기도 했다. 짝사랑이 마치 연인 이 된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은정 누나는 혼잣말처럼 자기는 어린 남자와 결혼해야 행복할 것 같다는 말을 몇 번 한적이 있었는데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3. 복병 가을이 지나고 찬바람이 어깨를 움 추리게 할 때 저녁장사를 마무리한 국밥 집 아주머니는 작심한 듯 딸을 불러 세웠다.

“야! 너! 나이 어린 놈과 밤마다 붙어 다닌다며?” “야 이년아! 정신차려! 나이도 한참 어리고 가진 것도 없는 놈한테 뭐 볼게 있다고!”

“내가 애 비 없이 자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유. 속 터져! 정말!”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는지 은정이 엄마는 화가 잔뜩 나서 딸을 닦달하듯 몰아 세웠다.

『은정은 짚이는 데가 있었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은정은 얼굴도 예쁘고 키도 늘씬해 주변 총각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중에서 읍내 고등학교 화학선 생인 김동철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은정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아주 싫어했다. 어쩌다 마주칠 때면 왠지 징그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 김동철이 요즈음 부쩍 엄마네 국밥 집을 자주 들락거리 는 낌새도 괜히 신경이 더 쓰였다.

김동철은 강은정을 직접 상대해서 결혼하기는 애당초 글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잔머리를 굴렸다. 은정 이 엄마의 처지를 잘 이용하면 어여쁜 은정이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은정의 엄마는 은정이가 세 살 때 남편이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이후 국밥 집을 하면서 은정이를 혼자 키웠다. 은정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고 재혼을 했으나 삼 년도 안되 병으로 새 남편이 죽자 지금까 지 홀로 살고 있다.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살아 온 불쌍한 여인이었다.

김동철은 우선 은정이 엄마의 환심을 사는 게 중요했다. 객지생활을 하면서 외식도 자주하는데 이왕이

4 면 국밥 집에 자주 들러 은정이 엄마와 가까워지려 했다. 호칭도 어머니로 바꾸며 손님이 없을 때를 틈타 말도 계속 걸었다. 은정이 엄마의 경계하던 눈초리가 차츰 풀리며 신세한탄을 풀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니! 요즈음 따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어요.”

“아니. 뭔 소리를 들었는데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밤마다 나이 어린 놈과 붙어 다닌 다나요.”

“그게 누군데요?” “아 그게 그… 시장 안 대영상회 큰 아들이라나 봐요.”

“뭐라고요!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정말이에요!”

4. 월경 새해가 된 정월 중순에 매서운 한파가 급습했다. 토요일 오후 세시에 S역 앞 다방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강은정으로부터 왔다.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환송회 겸 식사라도 한 번 해야 될 것 같아서….”

“바다가 보이는 곳이 좋을 것 같은 데…

우린 다방을 나와 협궤열차를 타고 가다 어느 포구에서 내렸다. 주말 오후인데도 추운 날씨 탓인지 사람 들이 별로 눈에 안보였다. 구름은 잔뜩 끼었지만 석양을 바라 볼 수 있는 허름한 횟집에 들어가 회 한 접 시와 소주 한 병을 먼저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생선회가 초고추장 덕분에 입에 착 달라붙고 소주병이 늘 어가면서 서로의 말도 점점 많아졌다.

“요즈음 엄마의 잔소리가 아주 심해지고 말 다툼도 잦아져 심란한데 훈이가 입대한다는 소식까지 들으 니 마음이 더 쓸쓸해지네.”

“나도 솔직히 누나를 무척 좋아했는데 군대를 가게 되니 영영 이별하는 것 같아 괴로워요.”

“나 … 어쩌면 엄마에 등쌀에 떠밀려 싫어하는 남자에게 시집갈수 밖에 없을 것 같아….”

“평생을 아빠 없이 자란 나를 위해 희생하며 고생한 엄마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엄마에게 앞으로 아들처럼 잘 모실 테니 딸을 달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나 봐.” “그 동안 국밥 집 하면서 힘들게 살아 온 엄마는 그 말에 혹해서 나를 계속 닦달하고.....”

“나도 이제 지쳤어!”

밖으로 나오니 겨울이라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바람도 세차게 불며 날씨는 더 추워졌다. 협궤열차의 막

5 차를 타러 간이역으로 가는 길에 여관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 끌고 여관 안으로 들어 갔다. 나도 싫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날 밤 나는 강은정에게 동정을 바쳤고 은정은 나에게 순결을 내주었다.』

은정의 가슴은 엄마의 가슴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이 일었다. 오늘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잠도 제대로 안 왔다.

“어쩔 수 없이 엄마의 뜻에 따르더라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순결을 주기는 정말 싫었어.”

읍내에서도 김동철에 대한 평판과 소문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들었었기에 은정의 심경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 같았다.

김동철은 고등학교 선생인데도 동네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문도 나돌았었다. 지난 연말에는 강 은정과 둘이서 S시 중앙극장에서 당시 인기 있던 홍콩영화 ‘스잔나’를 보고 나왔는데 문 앞에 지키고 서 있던 김동철이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간 적이 있었다. 식사가 끝났는데도 밥값 계산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기자랑만 계속 늘어 놓고 있어 보다 못한 내가 결국 돈을 내고 말았다. 읍내에서부 터 강은정을 미행하며 뒤따라 왔던 것 같았다.

『상대가 그 김동철이라니 강은정의 앞날이 걱정되며 무언가 어두운 예감이 들었다.』

짧고도 긴 밤이 아쉽게 지나고 아침에 여관을 나서니 밤새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 하얀 눈 위에 한 떨기 새빨간 장미꽃이 핀 것을 지난 밤 나는 보았다.

눈밭이 아침 햇살에 보석을 여기저기 박아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누나와의 추억 오랫동안 잊지 않을게요.”

“군대생활도 잘 할게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일곱 달 만에 아쉽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S역에서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갔다.』

5. 소식 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의 어느 날 전방에서 혜연이 누나의 편지를 받았다. 위문편지였지만 그 안에는 강은정이 김동철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아주 착잡했다. 그 리고 강은정이 결혼 전에 나를 한번 만나고 싶어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당시 졸병인 나에게는 그 뜻을 이

6 루어줄 수 있는 능력이 전무했다. 하지만 가고 싶었다.

“내 군대생활 삼십 년에 너 같은 놈 처음 봤어!”

“아니 졸병 놈이 여자친구 결혼식에 간다고 휴가증을 끊어 달라고?” 속된 말로 말단 졸병의 겁 대가리 없는 요청에 어이없어하던 나의 직속 과장 박인수 중령은 갑종간부 후 배인 본부대장 임영규 소령한테 전화를 걸어 3박4일 휴가증을 끊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부대로 돌아와 서 본부대장에게 건방진 놈 소리를 들으며 직사게 얻어 터졌다.

토요일 저녁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날에 도착하니 일곱 시가 되었다. 근처의 싸구려 여인숙을 찾아 하룻 밤을 묵어야 했다. 강은정과는 연락을 못하더라도 혜연이 누나와는 미리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는데 방법 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여관을 나와 인근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탕 안에 앉아 별생각을 다했다. 군대에서 탈영하는 놈들의 대다수가 여자문제 때문이라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미 그런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 하며 스스로 안도했다. 이번 결혼식 참석은 나에게는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첫사랑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인사라도 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객기를 부려 보았다.

6. 시선 예식 40분전쯤 식장에 도착했다. 식장 앞에서 나를 미리 기다린듯한 혜연이 누나를 만났다.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신부 화장실로 서둘러 데리고 갔다. 문을 여는 순간 하얀 면사포를 쓴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깜작 놀란 기색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그 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마치 짧은 시선을 통해 풀어내려는 것 같았다. 긴말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렬하게 부 딪친 시선 속에서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진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왔어!”

“미안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 애써 한 신부화장이 망가질까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서둘러 예식장을 빠져 나와 정신 없이 걷다 보니 식당 간판이 보였다. 아침에 목욕탕을 나와 삼립단팥빵 한 개와 서울우유 하나로 요기를 했던 터라 설렁탕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알코올이 온몸에 퍼지면서 왠지 감정 이 복 받치고 눈물이 핑 돌았다. 마주칠 때 본 그녀의 시선이 잊혀지지 않고 평생 뇌리에서 떠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다시는 못 볼 사람을 잠깐이나마 극적으로 만나고 헤어지니 아쉬운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 지는 것 같았다.

7 7. 소문 삼 년 가까운 군대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그 사이 혜연이 누나는 농협을 그만 두고 시집을 가 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고 은정이 엄마가 하던 오래된 국밥 집은 없어졌다. 그 사이 동네 모습도 많이 달라져 다소 생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거기다 그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소문도 귀에 들렸다. 그 중에 는 그녀에 대한 얘기도 섞여 있었다.

.

나는 우선 아버지의 가게 운영이 시원치 않아 따로 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 다 P시의 미군부대 전기수리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녀의 소문에 대해 진위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마당에 다 부질없는 생각인데 완전히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지나 혜연이 누나를 만났다.

“누나! 은정이 누나 소식 좀 알아?” “지금은 나도 연락이 끊어졌어.”

“사는 게 많이 힘이 드나 봐.”

그러면서 연락이 끊어지기 전까지의 사연을 아는 대로 들려 주었다.

김동철의 은정이 엄마와의 사전 약속은 결혼 후 거의 지켜지지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한달 후 김동 철은 I시로 전근을 갔고 그리고 넉 달도 안되어 아들이 태어났다. 또 다음 해 봄 은정이 엄마는 암 진단을 받았다. 국밥 집은 바로 접을 수 밖에 없었고 당장 은정이 엄마의 거취문제가 논란이 됐다. 아들이 되어 모시며 함께 살겠다던 약속은 말 뿐이 되어 증거도 없이 사라졌고 언제나 어려운 백 년 손님만 남았다.

그 후에도 강은정의 편지가 혜연이 누나에게 몇 번 왔었단다.

‘결혼을 후회한다.’

그 때 왜 내가 엄마의 닦달을 뿌리치지 못하고 싫어하던 남자와 성급하게 결혼까지 했는지….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도 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서 힘들게 사는 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은 안쓰러운 소식이었다. 그러고는 얼마 안가 그런 소식마저 뚝 끊어졌단다. 그렇다고 김동철의 학교를 찾아 연락을 해 볼 수도 없

8 어 그 후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8. 도피 나는 미군부대를 다니며 또 다른 세상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주제와 형편상 별 뾰족한 수가 없 을 것 같았다. 어차피 고생하면서 살 바에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가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도 같아 보였 다. 첫사랑의 실패도 한국을 떠나는 데 크게 한 몫 했다.

완강하게 반대하는 아버지를 가까스로 설득하고 제대하고 이년도 안되 맨몸으로 무작정 미국 땅을 밟았 다. LA에 도착해 우선 식당 접시 닦기부터 시작해 운전을 배워 배달 일도 하는 등 돈이 조금이라도 더 되 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 주위를 둘러 보니 대개 비슷한 유형으로 사는 사람들 이 많았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장 언어와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공고 밖에 못 나왔다는 한이 있어 죽기살기로 도전해 가며 어려움들을 이겨 냈다. 생활터전을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곳으로 옮기 고 갖은 고생 끝에 늦은 나이에 W주립대에서 환경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에서 연구원을 거쳐 힘들 게 조교수의 직함을 얻었다. 그야말로 지난 고생을 말로 풀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악착같이 덤벼든 결과였 다.

『그 어려운 과정에서 결혼은 아예 엄두도 못 냈었다. 그러다 사십 대 중반 나이에 백인 이혼녀와 동거를 하게 되었고 그것도 사 년도 안되어 끝이 났다. 맨 손으로 미국에 와서 대학교수까지 되는 인생반전이 이 루어진 것 같은데 성취감 뒤에 쓸쓸함과 허탈감이 밀려 왔다.』

9. 귀환 나이가 오십대로 접어드니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외로움은 더 해 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생 각하니 이번에는 거꾸로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한국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처 자식도 없는데다 주변에 왕래하면서 지낼 친척도 없어 만약 아프더라도 어디 의지할 데 조차 없다는 불안감에 더 늦기 전에 한국 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리저리 알아 보던 중 한국에서 유학 왔다 만났던 조명현과 연락이 닿 았다.

“총장이 되었는데 이것 저것 할 일도 많고 혁신도 해야 하는데 손발 맞추기가 힘드네요.”

“대학도 예전 같지 않아요.”

“학령인구 감소로 입학자원은 계속 줄어드는데 등록금은 묶여 있고 정부의 재정지원도 시원찮아 대학

9 재정형편이 아주 어려워요.”

“거기다 구태에 젖은 교수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학과 이기주의가 지나쳐 발전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어 려워졌어요.”

“이러다간 얼마 못 가 문을 닫는 대학이 태반은 넘을 것 같아요..”

“최교수 같은 새로운 외부 인재 수혈이 필요한 데 와서 함께 고생해 볼 생각은 없나요.”

아무리 어렵다 해도 내가 미국에서 그 동안 고생한 것만큼 어려우랴 싶어 선뜻 승낙하고 귀국길에 올라 오십 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I시에 있는 D대학에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주요보직까지 수행하게 됐다. 이미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들도 다른 곳에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어 작은 아파트를 얻어 혼자 지내 고 있다.

10. 탐문 새로운 대학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가면서 같은 I시에 살고 있다는 그녀의 소식이 또 궁금해졌다. 예전에 읍내에서 김동철을 만났을 때 자기는 국립 C사범대학 출신이라고 자랑하고 뻐기던 모습이 생각 났다. 당연히 지금은 교장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교육청에서 해마다 만드는 교육수첩을 구해 교 육청과 교육구청, 사업소의 간부명단과 관내 중 고등학교 교장 명단을 아무리 훑어 보아도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주도면밀하고 집요한 성격을 생각하면 교장 명단에 이름이 당연히 있어야 했는데 없 다는 게 의아했다. 그렇다고 교육청에 찾아가 평교사 명부까지 확인할 마음은 없었다.

가까이 사는 것 같아도 그녀의 소식을 듣기는 쉽지 않다고 결국 체념해 버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지역신문에 ‘환경오염과 생태계 변화’라는 나의 글이 실린 게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첫사랑의 그녀와 뜻밖에 재회를 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본 그녀의 얼굴. 낮 설은 듯 낮 익은 듯 어색했지만 반가웠다. 보는 순간 신산 했던 궤적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내색도 할 수 없었다.』

11. 의문 나는 그 다음 날 생각도 못했던 아침 밥상까지 받았다. 갑작스런 방문으로 크게 당황했을 텐데 있는 것을 다 커 내 정성을 다한 것이 엿보였다. 넷이 식탁에 둘러 앉았다. 내 맞은 편에 김동철이, 그 옆에는 강은정 이 그리고 내 옆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덥수룩한 수염에 추리닝 차림의 아들이 앉았다.

“야! 오랜만이네.”

10 그의 아들은 외면하듯 묵묵부답이다.

“아빠가 뭐라고 하면 대꾸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손님도 있는데 아침부터 큰소리 내지 말아요!”

그녀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냉 냉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이상하고 아주 불편한 아침을 먹게 됐다.

식사를 하면서 김동철은 자꾸 내 얼굴과 자기 아들의 얼굴을 흘끔흘끔 번갈아 쳐다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무엇을 비교하며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런 느낌에 나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그의 아들을 보 니 보면 볼수록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왠지 강은정의 모습과는 또 다른 낯설지 않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집을 나와 바로 학교로 출근하는 차 속에서 내내 이상한 생각과 의문이 들었다. 뜻밖의 김동철과의 만 남과 강은정과의 재회가 우연이 아닌 미리 의도된 연출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식사의 자리배치마 저도 이상한 것 같았다.

『김동철이 자기집으로 왜 나를 끌어들였을까?』

12. 뒷맛 오랜만에 본 강은정은 젊었을 때 예쁘고 발랄했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췌했다. 염 색도 안 한 흰머리에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가득 차 보였다. 자기 하나를 위해 인생을 걸었던 불쌍한 엄 마에게 보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진 결과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라면서 오랜 시간 엄마 가 고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봤기 때문에 엄마의 등쌀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쉽게 무너졌다. 자포자 기의 심정에 틈이 보이는 강은정을 집요한 김동철은 잽싸게 파고들어 전광석화처럼 동거 직전의 상황으 로 만들어 버렸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끼어들어 강은정과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고 나는 성을 넘어 멀리 달아났다.

기구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오던 은정이의 엄마에게는 김동철의 의도된 접근과 달콤한 말들이 마치 구세 주의 말처럼 들렸다. 이제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여생이 편안할 것 같았다. 자식의 혼사는 부모가 정 해주는 것이라는 구태의 고정관념과 딸 하나를 위해 자신이 희생되었다는 생각이 딸의 미래에 대한 걱정 을 아예 지워버렸다. 가난한 집 나이 어린 놈에게 딸을 뺏길까 봐 서둘러 김동철을 끌어 들였다. 결과는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고 아들 노릇 하겠다던 사위하고는 한 집에 살아보지도 못하고 병상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11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던 김동철은 보상심리에서인지 학교 내에서 국립 사범대학 출신임을 뻐기다 곱지 않은 눈초리 속에 외톨이가 되었고 탈출구를 찾아 동네 또래의 청년들과 어울리다 진상이 되어 얻어 터지 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런 그에게 강은정은 눈에 번쩍 뜨는 보석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쁘고 늘씬한 강은 정에 비해 작고 왜소한 몸에 뱁새 눈을 한 김동철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욕심 많고 집요한 김동철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당사자와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고 잔꾀로 억지 출발 한 결혼생활은 양쪽 바퀴의 크기가 크게 달라 애초부터 삐걱거릴 수 밖에 없었다. 교장이 못된 것을 남 탓 으로만 돌리는 그의 성품이 그의 인생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잠깐 본 강은정의 아들의 어두운 얼굴 표정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나이 사십이 가까워 오는데 도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무엇을 하는지 허구한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던 녀석이 왠지 그날은 엄마가 부르니 오랜만에 순순히 나와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했던 아빠 앞에 앉았단다. 불편한 아침식사를 함께 하 면서 그녀 아들의 성장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는듯했다. 김동철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 나도 없고 동생도 없는 외동아들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입영 며칠 전 포구에서 그녀와 지냈던 하룻 밤의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은 더 혼란스러워 졌다.

나 역시 한국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혼자이고 앞으로도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겉으로는 미국 박사에 종합 대학 초빙교수가 되어 보직까지 맡았으니 그럴듯해 보이나 속은 고단한 삶의 끝자락에서 외롭고 쓸쓸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여유는 생겼으나 인생의 재미는 못 느끼고 있는 가운데 신부대기실 에서 마주친 묘한 시선의 눈빛으로 쏜 그녀의 화살이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어 그녀의 그림자가 자꾸 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만나기 전에는 소식도 궁금했고 한번 만나 보고도 싶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결국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재회가 되어버렸다.

만약에 그녀가 나하고 결혼했더라면 더 행복 했을까? 여러 가지 나의 여건으로 볼 때 꼭 그렇지도 않았 을 것 같다. 또 그녀의 나이로 보아 내가 제대하기 전에 김동철이 아니더라도 이미 다른 남자하고 결혼 했 을 것이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미 오래 전에 깨진 거울이었다. 깨져버린 거울은 다시 붙여 쓸 수도 없다. 들여다 봐야 요상하게 찢어진 파편 속에는 서글픈 군상들의 외면하고픈 모습만 보일 수 밖에 없다. 모두 각자의 운명 이려니 생각하고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화살을 뽑아 내고 이제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할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녀의 화살을 뽑아 내는데 너무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래도 어쨌거나 모두의 삶이 좀 더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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