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지난 20여 년간 이곳 밴쿠버에 살면서 겨울에 스노우 타이어로 갈아 본 적이 없이 살았다. 사계절용 래디얼 타이어가 있으면 눈, 비와 관계없이 4계절 사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면 산비탈에 있는 우리 집은 카포트 (Carport)까지 오르고 내리는데 여러 번 고생하곤 했다. 손주들이 태어난 후 아들의 강력한 권고로, 해마다 11월 말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스노우 타이어를 갈아 끼운다. 노년에 무거운 타이어를 차에 싣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갈아 끼우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올해 그 타이어는 겨우 내내 길 위에서 헛된 마찰음만 냈을 뿐, 한 번도 눈 밑을 움켜 줘서 자기의 역할을 발휘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밴쿠버의 겨울이라니 소위 ‘찐빵에 앙꼬가 빠진’ 듯 뭔가 잃어버린 것 같다.
밴쿠버 국제공항 기상 관측소의 발표에 의하면 2026년 2월 12일 현재 측정 가능한 적설량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43년 전 (1982-83년 겨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2026년 1월 20일 자 기상청 보도로는 벌써 빅토리아나 밴쿠버 벚꽃의 꽃망울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 집 앞과 뒷마당에는 해마다 2월 초가 되면 계절의 전령사로 눈 속에서도 고개를 내미는 스노우드롭 (Snowdrop) - 우리 가족은 꽃이 눈과 같이 희고 입쌀 알과 같이 생겨서 ‘스노우 밥’이라고 부른다 - 이 차가운 흙을 뚫고 나온다. 가련한 잎과 꽃봉오리는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약속이다. 그런데 올해는 뜻밖에도 이 약속이 한 달이나 앞당겨졌다. 1월 초순, 아직 겨울의 한복판이어야 할 시기에 하얀 입쌀 알 같은 꽃망울을 살짝 내민 것이다. 이 일은 봄소식이 반갑기보다 우려를 앞세운다. 날씨가 좋은 것은 좋으나, 국제적으로 큰 과제로 떠오르는 ‘지구온난화’의 명백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지난 10여 년간 봄에 첫 꽃이 피는 시기를 조사한 결과, 올해 꽃이 피는 시기가 지난 10년 동안 거의 한 달이 앞당겨졌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는데, 한 달이라는 기간이 우리 집 경우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온난한 겨울은 식물의 생체 시기를 교란하고, 생태계 전체의 박자를 어긋나게 할 것이다. 캐나다의 다른 도시들은 영하 20~30도의 혹한과 엄청난 적설량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밴쿠버 지역이 이처럼 온난한 이유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온난하고 많은 습기를 머금은 해양성 공기가 로키산맥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막혀 대륙의 찬 공기와 섞이지 않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우리는 추위를 피했지만, 주위 높은 산 정상에 스키장들은 눈 대신 비가 내리는 낯선 풍경을 봐야 했다. 따뜻하면 당장 난방비가 줄고, 운전이 편해지는 ‘생활의 편의’는 있지만 그 대가는 절대 가볍지 않다.
밴쿠버는 특히 겨울철 산에 쌓이는 눈은 여름철 밴쿠버의 소중한 식수원이 된다. 지난 수년간 감소한 적설량으로 인한 가뭄으로 잔디에 물 주는 것이 제한되고, 산불의 피해가 막대했다. 눈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다가올 여름의 극심한 가뭄과 산불 위험을 예고하고 있다. 이처럼 계절에 맞지 않는 현상은 우리의 삶을 뒤 흔들고 있다. 눈 없는 겨울은 편안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북극의 찬바람이 스며드는 것같이 서늘하다.
제시간에 피지 못한 꽃과 제 성능을 나타내지 못한 타이어는 우리에게 큰 경고를하고 있다. 자연의 시계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다음 겨울에는 부디 묵직한 스노우타이어가 제 몫을 다하고, 스노우 드롭이 차가운 눈 속에서 제시간에 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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