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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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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2-09 09:25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느 환자를 두고,
"암입니다. 6개월 생존율이 5%이고 현재로선 치료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 A와,
"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현대 의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치료 약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저와 함께 버텨봅시다."라고 말하는 의사 B가 있을 때, 환자는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을까.
남편 중에도 A타입과 B타입이 있다. 아내가 저녁밥을 먹은 뒤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할 때,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많이 먹을 때 알아봤다."라며 이죽거리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다가와서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라고 물어보고는 우선 약이라도 먹어보자며 약병 뚜껑을 열어 들이미는 남편이 있다. 인간관계는 대개 이런 말에서 시작되고 말에 의해 그 향방이 정해지는 것 같다.
 말이란 소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입체가 아닐까. 누군가 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은 날 그 말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내 마음 바닥을 긁어대는 걸 보면 말이다. 입체가 가지는 부피감, 무게감, 그림자 같은 것이 말에도 분명 있을 것 같다.
말의 부피는 듣는 이가 정한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얘기나 도움이 되는 얘기는 큰 부피로, 자신과 별 상관이 없거나 득이 되지 않는 얘기는 작은 부피로 받아들인다. 딸의 결혼식 때 일이다.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면서 신부 아버지의 소회를 듣는 순서를 넣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길어도 5분 정도만 해야 할 상황인데 남편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딸애가 잘라 때까지 도움을 준 분들에 대한 "합동 감사제"가 이어졌다. 그날 남편의 얘기 속에 언급되었던 이들은 재밌게 들었다고 했고 다른 이들은 신부 아버지의 얘기가 너무 길었다고 했다.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말은 그 무게로 인해 마음속에 가라앉는다. 우리가 어떤 말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가라앉아 있는 말을 들어 올려 '생각'이란 빛을 비추는 것이다. 사물에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듯, 이때 말에도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 말을 한 사람의 표정과 어조, 그곳의 분위기, 그 말을 들은 나의 기분이나 상황들이 한데 어우러져 말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어느 언어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말이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며, 단어가 7%, 목소리가 38%, 태도가 그 나머지 55%를 차지한다고 한다. 말이란 귀로만 들을 게 아니라 눈으로 상대방을 보고 마음을 느껴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말의 그림자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입사시험에 다시 낙방한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머니가 "지금 네 속이 오죽하겠냐."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아들의 아픔을 달래 주고 말의 그림자는 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동료의 입상 소식에 "축하한다."라고 말은 하지만 입 꼬리 한쪽이 삐죽 올라갔다면 말의 그림자에는 시기심에 가득 찬 표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삶의 후반기가 행복 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연골', '할 일'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 그중 인간관계가 가장 신경 쓰인다.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말을 돌 이후로 육십 년쯤 수련 중이건만 여전히 나는 말실수가 잦다. 지난 일을 떠올리다가 '그때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하며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한 일이 생각나면 나도 모르게 발을 구른다.
 심리학에서는 상대에게 열 번 잘 해주려고 애쓰기보다 상대의 기분을 망치는 말을 삼가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상대방이 화를 내면, "내가 욱해서 한 말 갖고 뭘 그러냐?"라며 오히려 그를 소심하고 속 좁은 사람으로 몰아간다. 사람마다 심장의 두께가 다 같은 건 아니지 않는가. 이전에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싫다'로 가르곤 했다. 그게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근래에 깨달았다. 사람은 그저 '나와 소통이 잘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질 뿐이다.
 입체란 여러 개의 평면이나 곡면으로 둘러싸여 있어 부피를 가지는 물체다. 그렇다면 말이라는 입체 속에도 여러 가지를 채워 넣을 수 있겠다. 둥글고 각 지지 않은 것들로 채워 넣을 때 말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까. 따뜻한 정, 이지적인 배려심, 부드러운 연민, 사심 없는 조언,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 내가 하는 말속에는 무엇을 더 넣고 무엇을 빼야 할까.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더 어렵게 생각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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