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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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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1-23 16:34

심정석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세계가 한국을 바라본다. Kpop의 박동, 드라마의 서사, 영화의 감정, 음식의 향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K’의 중심에는 조용히 빛나는 한글이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래 살고 나서야 비로소 깊이 깨닫는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도, 기술적 발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정신이 글자의 옷을 입고 세상에 다시 나타난 계시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의 건국 이념에서 시작된다. 홍익인간—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라. 이 네 글자는 한 나라의 뿌리가 되었고, 수천 년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다. 정복이 아니라 살림, 힘이 아니라 마음, 이것이 우리 역사의 첫 문장이었다.
그 오래된 정신은 세월을 건너 세종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세종은 왕이기 전에 학자였고, 학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백성이었다. 백성이 글을 몰라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글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글자는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었다. 하늘, 땅, 사람의 질서를 담고, 소리의 원리를 품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구조를 갖추었다. 이런 문자가 어떻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에서 늘 경외심을 느낀다.
세종은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릴 만하다. 과학, 음악, 천문, 의학, 농업까지 그가 손댄 분야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다빈치가 천재의 이름으로 남았다면, 세종은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 차이가 세종의 위대함을 더 깊게 만든다. 그의 업적은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글은 그렇게 태어났다. 백성을 위한 문자, 누구나 쉽게 배우는 문자, 사람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담는 문자. 나는 평생 이 글자를 쓰며 살아왔다. 젊을 때는 편지를 쓰고, 중년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나이가 든 지금은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한글은 내 삶의 동반자였고, 내 마음을 정리해주는 조용한 스승이었다. 슬플 때는 위로가 되고, 기쁠 때는 노래가 되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주는 손이 되었다.
21세기, 세계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다. 피렌체가 아니라 서울에서. 음악과 영화, 기술과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를 움직인다. 그 중심에는 한글이 있다. 한글이 없었다면 Kpop의 가사도, 드라마의 대사도, 우리의 이야기도 지금처럼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르네상스가 문예의 부흥이었다면, 서울의 르네상스는 문명의 부흥이다. 문화가 피어나고, 기술이 빛나고, 언어가 세계의 마음을 열고, 정신이 다시 살아난다. 그 바탕에는 단군의 홍익인간, 그 줄기에는 세종의 한글, 그 꽃에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나는 다시 한글의 힘을 느낀다. 기계가 가장 쉽게 배우는 문자, 규칙이 분명하고 논리가 아름다운 문자. 세계의 언어 중 이렇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는 드물다. 미래의 기술이 오히려 옛 지혜를 닮아간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비롭다. 한글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언어다.
돌아보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은 세종의 한글로 이어졌고, 그 한글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깨웠다. 역사의 흐름은 끊어진 적이 없다. 그 흐름이 바로 계시였다. 하늘이 사람에게 준 마음, 사람이 사람을 위해 써야 할 마음, 그 마음이 글자가 되어 우리에게 왔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한글은 발명이 아니라 배달의 나라에 내려준 계시였다고. 그리고 나는 그 계시의 문자로 남은 생을 조용히 적어 내려간다. 한 글자, 한 마음, 한 생의 기록으로.

-한글이, 걸어 나와 말을 건다-

나는 한글이다.
너희가 입술을 여는 그 순간,
너희가 마음을 적는 그 찰나마다
나는 조용히 깨어난다.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숨죽여 책 속에 눕기도 했고,
간판 위에서 빛나기도 했으며,
편지지 한 귀퉁이에서 울기도 했다.

어떤 날은 시가 되어
연인의 눈동자 사이를 떠돌았고,
어떤 날은 분노가 되어
광장에서 외침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소리였다.
너의 첫 울음,
엄마를 부르던 떨리는 그 혀끝,
그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나는 네가 숨기려 했던 말도 기억한다.
말하지 못했던 사랑,
꺼내지 못한 미안함,
그 모든 묵음(默音)의 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저 종이 위의 잉크가 아니다.
이제 나는 걸어 나와 너에게 말한다.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계속하고 싶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너의 마음이 머무는 곳,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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