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물아리에 우렁이 잡으러 가자!" 지금은 안 쓰지만, '물아리'는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있는 단어였다. 빗물에 의지해 벼농사를 짓던 시절, 비가 오면 논두렁 안쪽을 진흙으로 꼼꼼히 발라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었다. 그렇게 갇힌 빗물이 찰랑이는 논을 '물아리'라고 불렀다. '아리'란 순 한국말로 '물' 또는 '그릇'이란 의미가 있었다. '항아리'에서 '아리'가 그릇을 의미하듯, 논이 그릇이 되어 물을 담았으니 '물아리'인 거였다. 그런 물아리 논두렁을 따라 걷다 보면 가장 큰 유혹이 우렁이였다. 그땐 정말 논바닥에 깔린 게 우렁이였다. 특히 추수가 끝난 가을이면 맑은 물 아래로 여름내 살이 오른 큼지막한 우렁이들이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저걸 잡아가면 엄마가 맛있는 우렁이무침을 해주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동생들과 난 바지를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어 던진 후 주저 없이 물아리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뛰어들어 우렁이를 많이 잡아서 맛있게 먹었다면 해피앤딩으로 끝날 거였다. 하지만 현실은 쉽게 해피앤딩을 내주지 않는다. 처음엔 의기투합해 서로 좋아서 뛰어들었지만, 막상 뛰어들고 나면 우렁이는 얼마 잡지도 못한 채 우린 큰 소리로 싸우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한 방을 노리는 큰동생은 큰 것만 잡겠다며 정신없이 논을 헤집고 다녔다. 거기다 겁많은 막내는 다리에 거머리가 붙을까 봐 계속해서 발을 놀리며 첨벙댔다. 물아리의 물은 원래는 맑지만, 사람이 발을 내딛는 순간 논바닥에 가라앉아있던 흙먼지가 일어나며 뿌옇게 흐려졌다. 맑았던 아리물이 동생들의 자발스러운 행동으로 흙탕물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 흙탕물에 가려 우렁이가 보이지 않으니 난 동생들을 탓하며 소릴 질렀고, 동생들 또한 나름의 변명으로 되받아쳤다. 그렇게 우린 흙탕물로 변한 물아리에 두 발을 담그고 서서 서로를 향해 고성을 주고받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 물아리의 상황이 자꾸만 재연되는 듯하다. 좋은 의도로 뭔가를 같이 해보자며 시작했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일이 잘못되면 우린 서로를 탓하며 감정의 골을 키우곤 한다. 그게 가족끼리건, 아니면 가까운 친구끼리건, 여하튼 사람이 뭉쳐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항상 흙탕물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일어난 흙탕물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원했던 성과는 내지도 못한 채 인간관계만 멀어지고 만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가끔 지인들이 찾아와 힘겨움을 토로할 때가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대부분이 그 흙탕물 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중일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이 찾아와 치매인 노모를 잘 모시려고 했던 결정이 결국 나쁜 결과로 이어져 형제들과 절연까지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난 암투병 끝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다. 복수까지 차오르는 암 말기에 이른 아버지를 어디로 모시는 게 최선일지를 두고, 우리 형제들도 서로 의견이 갈렸었다. 간호사인 난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셔야 한다고 우겼고, 동생들은 항암치료를 시도하면서 끝까지 집에서 모시길 원했다. 죽는 사람들만 간다는 마지막 종착지인 호스피스 병동으로 누나는 왜 아버지를 빨리 못 밀어 넣어 안달이냐며 동생은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겪어야 할 모든 증상을 미리 예견했던 난 그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에서 아버지를 편히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기를 붙들고 3시간 동안 동생을 설득했다. 그런데 그 3시간 통화 끝에 동생에게 들은 말은, "누난 우리 가족이 아니라 그냥 간호사네. 그것도 캐나다 간호사!" 비행기표는 끊어놨지만 당장 한국으로 날아갈 수 없는 처지여서 동생의 동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설득했는데, 내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말에 그만 기운이 쏙 빠졌다. 끝내는 격앙된 말을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통화 중에 들렸던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마음에 걸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복수가 폐를 눌러 기침이 잦은 건데 그것도 못 보는 동생들에게 화가 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잠 못 드는 뒤척임으로 새벽녘이 되었을 즈음 불현듯 물아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아리에 뛰어든 건 원래 우렁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흙탕물 때문에 정작 잡으려던 우렁이는 못 잡고 싸움만 벌였었다. 시시비비를 가린답시고 거기서 계속 싸워봤자, 사실 흙탕물만 더 일고 거머리에게 다리만 뜯길 뿐이었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 그건 재빨리 흙탕물을 빠져나와 논두렁으로 가 앉는 거였다. 논두렁에 엉덩이를 걸치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면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아기를 달래듯 물을 달랬다. 그러면 물이 토닥이는 바람의 손길에 좌우로 흔들리면서 서서히 흙먼지를 가라앉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만 주면, 물아리는 다시금 맑아지고 우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논두렁에 나란히 앉아 기다렸던 우리는 우렁이잡이 계획을 다시 세웠다. 그 계획대로 지정된 지점에 발을 내린 후 우린 각자의 길을 따라 흙탕물을 뒤로 하고 걸으며 다시금 우렁이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물아리를 떠올리자, '아! 지금은 동생들과 싸울 때가 아니라, 논두렁으로 가 앉을 때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더는 말로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 난 논두렁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그랬더니 '화'라는 흙탕물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로소 보였다. 아버지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동생들의 마음이 보였고, 죽음을 두려워할 아버지의 마음도 보였다. 그런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신체적 간호에만 집중해 난 가족들을 몰아붙였던 거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견했던 증상이 나타나 응급실로 실려 간 아버지는 닥터의 강력한 권고로 곧바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했다. 하지만 시간을 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혔기에 가족들 모두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로 다투지 않고 끝까지 당신을 돌봤던 자식들을 보고 가셨으니, 아버지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으리라 짐작해 본다.
간호 학생 때 심장, 간, 폐, 위 등을 해부학으로 배웠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에 어디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란 건 우리 속에 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해부학에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고 아파도 그걸 고치기가 참 애매했다. 내겐 마음도 해부학이 필요했다. 그래서 갖게 된 마음의 해부학이 '물아리'였다. 우리가 사람들과 뭔가를 하려고 움직이면 그때마다 감정이라는 흙탕물이 일어난다. 거기서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그건 실체가 아니다. 그로 인해 생긴 내 감정만이 실체일 뿐이었다. 그 부정적 감정의 실체가 날 아프고 괴롭게 한다면 난 논두렁으로 가 조용히 앉는다. 우리가 모든 걸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좋겠지만, 사실 인간의 뇌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있었다. 이성은 감정보다 항상 속도가 느렸다. 발 늦은 이성이 개입할 시간을 잠시도 주지 않은 채 날것의 감정과 감정을 그대로 부딪히게 놔두면 흙탕물만 더 크게 일 뿐이었다. 옛말에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정신과에서 세 번의 심호흡을 강조하는 것도 어쩜 같은 이치일 듯하다. 그런 걸 다 종합해 볼 때 진짜 마음은 '물아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옳고 그름 너머에 들녘이 있다고. 앞으로도 잘 살려면 그 들녘에 있을 논두렁으로 나 자신을 강제로라도 끌고 가 좀 더 자주 앉혀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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