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25-10-10 15:43

박정은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물아리에 우렁이 잡으러 가자!" 지금은 안 쓰지만, '물아리'는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있는 단어였다. 빗물에 의지해 벼농사를 짓던 시절, 비가 오면 논두렁 안쪽을 진흙으로 꼼꼼히 발라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었다. 그렇게 갇힌 빗물이 찰랑이는 논을 '물아리'라고 불렀다. '아리'란 순 한국말로 '물' 또는 '그릇'이란 의미가 있었다. '항아리'에서 '아리'가 그릇을 의미하듯, 논이 그릇이 되어 물을 담았으니 '물아리'인 거였다. 그런 물아리 논두렁을 따라 걷다 보면 가장 큰 유혹이 우렁이였다. 그땐 정말 논바닥에 깔린 게 우렁이였다. 특히 추수가 끝난 가을이면 맑은 물 아래로 여름내 살이 오른 큼지막한 우렁이들이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저걸 잡아가면 엄마가 맛있는 우렁이무침을 해주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동생들과 난 바지를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어 던진 후 주저 없이 물아리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뛰어들어 우렁이를 많이 잡아서 맛있게 먹었다면 해피앤딩으로 끝날 거였다. 하지만 현실은 쉽게 해피앤딩을 내주지 않는다. 처음엔 의기투합해 서로 좋아서 뛰어들었지만, 막상 뛰어들고 나면 우렁이는 얼마 잡지도 못한 채 우린 큰 소리로 싸우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한 방을 노리는 큰동생은 큰 것만 잡겠다며 정신없이 논을 헤집고 다녔다. 거기다 겁많은 막내는 다리에 거머리가 붙을까 봐 계속해서 발을 놀리며 첨벙댔다. 물아리의 물은 원래는 맑지만, 사람이 발을 내딛는 순간 논바닥에 가라앉아있던 흙먼지가 일어나며 뿌옇게 흐려졌다. 맑았던 아리물이 동생들의 자발스러운 행동으로 흙탕물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 흙탕물에 가려 우렁이가 보이지 않으니 난 동생들을 탓하며 소릴 질렀고, 동생들 또한 나름의 변명으로 되받아쳤다. 그렇게 우린 흙탕물로 변한 물아리에 두 발을 담그고 서서 서로를 향해 고성을 주고받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 물아리의 상황이 자꾸만 재연되는 듯하다. 좋은 의도로 뭔가를 같이 해보자며 시작했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일이 잘못되면 우린 서로를 탓하며 감정의 골을 키우곤 한다. 그게 가족끼리건, 아니면 가까운 친구끼리건, 여하튼 사람이 뭉쳐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항상 흙탕물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일어난 흙탕물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원했던 성과는 내지도 못한 채 인간관계만 멀어지고 만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가끔 지인들이 찾아와 힘겨움을 토로할 때가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대부분이 그 흙탕물 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중일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이 찾아와 치매인 노모를 잘 모시려고 했던 결정이 결국 나쁜 결과로 이어져 형제들과 절연까지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난 암투병 끝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다. 복수까지 차오르는 암 말기에 이른 아버지를 어디로 모시는 게 최선일지를 두고, 우리 형제들도 서로 의견이 갈렸었다. 간호사인 난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셔야 한다고 우겼고, 동생들은 항암치료를 시도하면서 끝까지 집에서 모시길 원했다. 죽는 사람들만 간다는 마지막 종착지인 호스피스 병동으로 누나는 왜 아버지를 빨리 못 밀어 넣어 안달이냐며 동생은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겪어야 할 모든 증상을 미리 예견했던 난 그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에서 아버지를 편히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기를 붙들고 3시간 동안 동생을 설득했다. 그런데 그 3시간 통화 끝에 동생에게 들은 말은, "누난 우리 가족이 아니라 그냥 간호사네. 그것도 캐나다 간호사!" 비행기표는 끊어놨지만 당장 한국으로 날아갈 수 없는 처지여서 동생의 동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설득했는데, 내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말에 그만 기운이 쏙 빠졌다. 끝내는 격앙된 말을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통화 중에 들렸던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마음에 걸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복수가 폐를 눌러 기침이 잦은 건데 그것도 못 보는 동생들에게 화가 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잠 못 드는 뒤척임으로 새벽녘이 되었을 즈음 불현듯 물아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아리에 뛰어든 건 원래 우렁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흙탕물 때문에 정작 잡으려던 우렁이는 못 잡고 싸움만 벌였었다. 시시비비를 가린답시고 거기서 계속 싸워봤자, 사실 흙탕물만 더 일고 거머리에게 다리만 뜯길 뿐이었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 그건 재빨리 흙탕물을 빠져나와 논두렁으로 가 앉는 거였다. 논두렁에 엉덩이를 걸치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면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아기를 달래듯 물을 달랬다. 그러면 물이 토닥이는 바람의 손길에 좌우로 흔들리면서 서서히 흙먼지를 가라앉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만 주면, 물아리는 다시금 맑아지고 우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논두렁에 나란히 앉아 기다렸던 우리는 우렁이잡이 계획을 다시 세웠다. 그 계획대로 지정된 지점에 발을 내린 후 우린 각자의 길을 따라 흙탕물을 뒤로 하고 걸으며 다시금 우렁이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물아리를 떠올리자, '아! 지금은 동생들과 싸울 때가 아니라, 논두렁으로 가 앉을 때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더는 말로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 난 논두렁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그랬더니 '화'라는 흙탕물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로소 보였다. 아버지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동생들의 마음이 보였고, 죽음을 두려워할 아버지의 마음도 보였다. 그런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신체적 간호에만 집중해 난 가족들을 몰아붙였던 거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견했던 증상이 나타나 응급실로 실려 간 아버지는 닥터의 강력한 권고로 곧바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했다. 하지만 시간을 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혔기에 가족들 모두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로 다투지 않고 끝까지 당신을 돌봤던 자식들을 보고 가셨으니, 아버지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으리라 짐작해 본다.

간호 학생 때 심장, 간, 폐, 위 등을 해부학으로 배웠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에 어디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란 건 우리 속에 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해부학에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고 아파도 그걸 고치기가 참 애매했다. 내겐 마음도 해부학이 필요했다. 그래서 갖게 된 마음의 해부학이 '물아리'였다. 우리가 사람들과 뭔가를 하려고 움직이면 그때마다 감정이라는 흙탕물이 일어난다. 거기서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그건 실체가 아니다. 그로 인해 생긴 내 감정만이 실체일 뿐이었다. 그 부정적 감정의 실체가 날 아프고 괴롭게 한다면 난 논두렁으로 가 조용히 앉는다. 우리가 모든 걸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좋겠지만, 사실 인간의 뇌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있었다. 이성은 감정보다 항상 속도가 느렸다. 발 늦은 이성이 개입할 시간을 잠시도 주지 않은 채 날것의 감정과 감정을 그대로 부딪히게 놔두면 흙탕물만 더 크게 일 뿐이었다. 옛말에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정신과에서 세 번의 심호흡을 강조하는 것도 어쩜 같은 이치일 듯하다. 그런 걸 다 종합해 볼 때 진짜 마음은 '물아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옳고 그름 너머에 들녘이 있다고. 앞으로도 잘 살려면 그 들녘에 있을 논두렁으로 나 자신을 강제로라도 끌고 가 좀 더 자주 앉혀야겠다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집으로 데려다줘> 윤경란                                                                                “방게야! 빨리 나와! 멋진 웅덩이를 찾았어. 같이 가자!”모래 굴 속에서 자고 있던 방게는 농게의 들뜬 목소리에 깨어났다.‘또야?’방게는 몸에 붙은 모래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며칠 전에도 농게는...
윤경란·황정현
 <베링기아의 밤>  김미선 곧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보고 있던 잡지를 덮고 창문 덮개를 올렸다. 구름 아래로 만년설 덮인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고도가 낮아지자 뭉뚱그려져 보이던 실체가 하나둘 드러났다. 언뜻언뜻 보이는 에메랄드색은 호수 아니면 바다일 것이다. 비행기는 위로 자라지 못한 침엽수 군락에 둘러싸인 물 위를 선회한 뒤 착륙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공항 건물 두어 채가 고작이었다....
김민선·이재헌
안타까움 2026.03.05 (목)
  사진집이든 화집이든 무심히 넘겨보는 버릇이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고 편하게 보는 내 감상법은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는 일도 있겠지만 우선 마음의 공간이 넉넉해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번 사진집도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사진 동호인들이 모여 찍은 사진을 전시하느라 만든 사진집이다. 기성작가보다 아마추어가 많은데 새벽의 대청호반의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반숙자
젊은 날 폭주하는 열차처럼 내달리며 살아오다 모두 떠나고 나만 혼자 남아 생활 박물관의 축음기처럼 세상이란 정원의 외톨이가 되어 고독을 수양인 듯 감춘 외로움은 웃음기 없는 무뚝뚝한 굵은 주름만 깊어 갑니다 외로움과 과거의 추억이 끓어 넘 칠 듯할 때  고독한 수양을 끝내고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움켜쥐고 군중이 붐비는 길거리로 나아갑니다 모두가 밝게 세상을 호령하는...
김철훈
차상: 그리움의 온도 – 이주령그리움은 서늘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가슴에 얼음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처럼 서늘하다. 세월의 흐름에도 그리움은 겨울의 온도에 머물렀다.   아버지의 마지막 겨울이었다. 겨우내 입고 다니던 겉옷이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하는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패혈증 쇼크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이주령 외 3명
  지난 20여 년간 이곳 밴쿠버에 살면서 겨울에 스노우 타이어로 갈아 본 적이 없이 살았다. 사계절용 래디얼 타이어가 있으면 눈, 비와 관계없이 4계절 사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면 산비탈에 있는 우리 집은 카포트 (Carport)까지 오르고 내리는데 여러 번 고생하곤 했다. 손주들이 태어난 후 아들의 강력한 권고로, 해마다 11월 말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스노우 타이어를 갈아 끼운다. 노년에 무거운 타이어를 차에 싣는...
김의원
나와 나의 대립 2026.02.27 (금)
몸뚱이는 그만 자라 하는데점 하나에서 파생된 상념들시간에 비례하여 거리도 그리하여일그러진 선                마디마디 바람만 웅성거리고늪 속으로 빠져든 몸부림이풀썩풀썩 방망이질하고천 갈래 바닥으로 나동그라진사색의 파편들인제 그만 고즈넉이 여유를 타서뭉뚱그려 간단한 주먹밥으로 빚으라고몸뚱어리 나긋나긋 달래는데일그러진 선 고집스레온 밤을 누비며 펼 줄을 모르네하얗게 질린 새벽달이 하품...
한부연
1센치 2026.02.20 (금)
흔들리는 촛불 아래허물어진 꽃잎 달빛이 비수처럼 파고들던 밤먹먹함이 숨통을 짓눌렀다 오래 가두었던 피를 흘려보냈다잘 익은 노을 냄새를 맡았다 마른 침을 삼켰고오한이 엄습해 왔다 푸르스름한 시골 응급실네온 빛 멀리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1센치라고 했다1센치만 빗나갔으면.... 다 끝내고 돌아오는 길성근 빗방울에명치가 촉촉해졌다 다 끝내고 돌아가는 길그래도 헝클어진 발자국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스무...
백철현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