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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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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5-09-19 17:02

김아녜스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언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 잊지 마세요"
   한 달 넘게 호텔 조식을 함께 먹은 Y가 고운 손수건 한 장을 내밀며 하는 인사. 하늘빛 바탕에 잔잔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받아 든 순간,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함께 그녀가 내민 손수건 한 장에 엄청난 무게의 감동이 실려왔다.
   한국 정부에 신청한 문건의 진행 절차를 기다리며 투숙한 한 비즈니스 호텔의 싱글룸, 꼭 필요한 설비와 물품만 있는 3.75평 방에서 4개월 넘게 지냈다. 손바닥만 한 방, 폐쇄공포증 환자라면 답답하게 느끼려나... ...지내다 보니 작은 면적 덕분에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 나머지 숙면을 하게 되었다.. 불면으로 약을 갖고 다녔는데 7시간을 잤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부추기는 과소비에 등 떠밀려 가는 무절제와 거리가 먼 단순, 경제적인 동물인 내게 딱 알맞은 숙소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단조로움의 벽을 마주한다. 그 옆은 외로움, 또 그 옆은 고독. 여기 와도 나 혼자, 혼자 있는 모습에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까. 외로움이라는 것은 홀로 있음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는 한 철학자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도 그 작은 공간에서 상실의 아픈 시간이 조금씩 깎여 나갔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갖는 시간이 준 큰 특혜였다.
    아침 7시면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는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 특히나 시니어들과는 "오늘도 뵙네요"로 시작해서 "어디서 오셨어요" 하다 보면 통성명 없이도 아침밥 친구가 되어 알맹이 없는 대화를 주고받게 된다. 격식을 갖춘 대화보다 더 친밀감이 느껴지고, 나아가 몇 년생이냐고 물어 생물학적 서열을 만들기도 한다.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내가 만났던 재외동포들. 그중에서 같은 이유로 장기 숙박하는 사람끼리는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살펴주는 우린 한 민족! 하다못해 점심은 어디가 맛있고 산책은 어디가 좋더라는 이야기도 나눈다. 더분더분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섞는 편이 아닌데, 지독한 외로움 탓일까, 인사도 잘하고 대답도 잘하는 내가 신기했다. 돌아서면 다시 고독의 방으로 깊이 잠수할 망정.
   언제부터인가 곱상한 노인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여윈 체형에 꼿꼿하고 흩어짐 없는 자세, 서리 내렸어도 숱이 풍성하고 단정한 헤어컬, 말씀도 조곤조곤 하신다.한눈에도 자기 관리가 잘 된 지식층의 한 분 같았다. 인사를 나누며 함께 아침을 먹는데 살포시 웃으시며 본인이 93세라고 하시니 믿기지 않는 나이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딸이 와서 함께 호텔에서 한 달 살이를 하신다고.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 직접 모시지 않는 자녀로서의 미안함을 상쇄할 수 있겠구나. 그동안 모시고 살았던 형제에게는 포상 휴가가 주어지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일을 봤다. 따님도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지혜로운 분 같았다. 부모 공양의 책임을 누구 한 명에게 지우는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함께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느꼈다. 딸인 Y가 엄마의 식판에 음식을 담아주는 모습을 보며, 아주 오래전에는 어머니가 딸을 저렇게 하셨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젠 역할을 바꾸어서 하고 있는 모습, 그 모습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냄새가 났다.진 자리 마른 자리를 갈아 눕혔던 어머니,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어르고 달랬을 어머니, 앓을 사 그릇 될 사 안고 업으셨던 그 어머니, 이제는 역할이 바뀐 모녀. 자신을 씻기셨던 어머니를 씻겨드리며 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손 위에 손을 포개어 글을 가르쳤던 어머니는 이제 그 딸이 숙제로 내준 일일 색칠 공부를 하신다고 했다. 줄도 없는 노트와 한 묶음의 볼펜을 두고 가며 줄을 긋고 불경을 필사하라는 숙제를 내준다니 강훈련이다. 식사 후에 산책해야 한다고 모시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참으로 못된 딸이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에게 용돈 몇 푼 주는 것이 효도였다고 생각했던 속이 미어졌다.
   한 달 또는 넉 달 넘게 한솥밥을 먹었으니 식구(食口), 가족도 밥을 같이 먹어야 식구가 된다고 하거늘!. 그들을 뒤에 두고 내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서로의 길에 축복을 빌어주며 돌아가며 안아줬다. Y도 그 어머니도 또 다른 아침밥 식구들도 우연을 잠시나마의 인연으로 엮은 사람들. 우리들의 연고는 태어난 이 땅, 같은 언어 그리고 익숙한 음식이다.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다 돌아와 잠시 머물며 쌓은 정이 아쉬워 어찌할 수 없이 미련한 미련을 남긴다. 하늘빛 손수건을 목에 두른다. 덥고 습한 한국 여름에 꼭 필요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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