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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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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5-06-13 17:15

김유훈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어느덧 캐나다에 정착한 지 33년.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어느새 젊은 목사의 꿈을 품고 시작했던 유학 생활과 목회, 사업, 그리고 지금의 트럭커로 이어진 삶 속에서, 검은 머리는 75세의 백발로 변해 있었다. 마치 푸르른 나뭇잎을 지닌 채, 캐나다로 이식한 나무가 지금은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잎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지난 날을 돌아보니 내 인생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온 여정이었다. 마치 훈련소에서 철조망을 기어 통과하며 화생방 훈련에 눈물을 흘리던 그 시절처럼, 이민자의 길은 험난하고도 눈물겨운 시간이었음을 실감한다.
  이민은 새로운 땅에서 나와 가족이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두 어린 자녀를 데리고 왔는데, 이는 마치 열매가 맺힌 채로 나무를 옮기는 것과 같았다. 나는 유학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뿌리를 내리는 길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내 생각과 거리가 있었다. 장신과 아세아 연합 그리고 Regent College의 신학과 한국·캐나다에서의 목회 경험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이후 나는 Regent 에서 배운 실천신학 영향으로 목회를 조기에 은퇴하고 우리 가족 나무를 살리기 위해 시작한 사업은 지인의 배신으로 고된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다음으로 시작한 일은 소형 밴을 이용한 택배였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도계 트럭커들에게서 트럭 운송에 대한 정보를 얻고, 1종 면허에 도전해 본격적인 트럭 운전의 길에 들어섰다. 놀랍게도, 젊은 시절 대한민국 육군 공병대 수송부에서의 경험이 이국의 땅에서 다시 쓰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추억 속에 묻힌 줄 알았던 군대 경험은 내 삶에 물을 끌어 올리는 뿌리가 되어 주었다. 군 복무 당시 수없이 맞고 고생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은 외국에서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는 늘 대한민국 군대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지난 20여 년간 나는 캐나다 전역은 물론 미국의 48개 주를 누비며 수없이 많은 길을 달렸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미국을 오가는 일을 멈추게 되었다. 왜냐하면 회사 사장이 "당신도 늙었고 트럭도 낡았으니 이제는 시내 일만 하라"고 말할 때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동안 나는 홀로 운전 중에 많은 외로움을 겪었지만 아내 역시 두 애들을 독립시키고 빈 둥지를 지키며 홀로 지내야했다.
  나는 한 마리의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산과 들을 누비며 일했다. 낮에는 풍경을 즐기고, 밤에는 별과 달을 벗 삼아 외로움에 눈물짓기도 했다. 그런 고독 속에서 오래전 문학 소년의 꿈이 깨어났고, 운전 중 떠오른 생각과 기억을 마음속에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절했던 시간들이었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 세월을 버텨내게 했다.
무엇보다 트럭커라는 직업은, 오랜 세월 품어왔던 아메리칸 드림의 본질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광활한 대지의 속살을 곳곳에서 보고, 느끼며 20년 넘게 내 활동의 무대로 삼을 수 있었던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결국 나를 수필가로 등단하게 해주었다.
  이른 새벽, 안개 낀 고속도로 옆에서는 토끼와 사슴이 풀잎 위의 이슬을 아침으로 삼고 있었고, 새들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누비며 짝을 찾아 다녔다. 그런 광경 속에서 나는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감정을 느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과 목장, 옥수수와 대두콩 밭을 지나며 미국의 광대함에 감탄했고, 알라바마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목화밭은 하얀 꽃송이로 장관을 이루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북부 산의 가을 단풍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문학 소년이 되어 마음속 글을 써내려갔다.
  자연뿐 아니라, 운전 중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이야기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졸음운전 중 트럭을 세워 나에게 운동을 시키며 "이제는 깨어났느냐?"고 웃어주던 경찰관, 주택가로 잘못 들어가 전선줄을 끊고 당황한 나에게 “시의 관리 소홀”이라며 안심시켜준 경찰, 눈 내리는 덴버 인근의 밤중에 시청 광장에 트럭을 세우게 하고 하룻밤을 지나게 해준 경찰까지, 그들의 배려는 잊을 수 없다.
  마이애미에서는 억만장자들이 사는 섬을 보며 감탄했으며, 관광객들 사이에서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텍사스 어스틴에서는 백석대 교수와 만나기도 했다. 찰스턴에서는 옛 노예의 경매 시장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으며, 그곳 한인식당에서 교민들과 함께 월드컵 “한일전” 야구를 보며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수 없이 응원했던 일은 잊을 수 없다. 스테이츠빌 한인교회 권사님이 싸주신 고구마 한 보따리에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옐로스톤 산 정상에 있는 엄청난 호수에 놀랐으며 그 호숫가의 평화로운 풍경, LA에서 만난 옛 친구와의 회포, 그리고 곧 들려온 그의 부고는 가슴 깊이 남았다. 네바다 주 산위에서 본 붉은 석양, 올리피아 서쪽에 있는 에버딘에서 태평양 너머로 사라지던 해넘이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처럼 나의 지난 세월은 미국 전역을 돌며 4계절의 아름다움과 마주했으며,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많은 한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민 사회를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모든 만남과 추억, 그리고 글로 승화된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미국에게 고마움과 아쉬움을 담아 조용히 "미국이여 안녕"이라 작별을 고한다. 오늘도 나는 트럭을 몰고, 오레곤주의 콜럼비아 강변 길에 비할 수는 없지만, 후레이저 강변을 따라 달리며 미국에서의 그 많은 추억들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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