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딸이 플라스틱 튜스 픽을 사야 한다고 해서 내가 그거 안 쓰면 안 돼 그랬더니 그래서 아빠 같은
사람은 치과에서 싫어하는 거야 그러길래 가만히 집에 와서 세면대 옆에 있는 것들을 보니 칫솔도
많고 치약도 쓰다가 끝에 잘 짜지지 않는 부분이 그냥 돌아다니고 스프레이 면도기 등 다양한
물품들이 있다. 샤워실엔 샴푸와 비누 등이 다양한 브랜드로 있다. 나는 식구들이 같은 브랜드
제품을 같이 쓰기를 원하지만 알레르기 뭐 어쩌고 하면서 자꾸만 다른 브랜드가 쌓이다 보니
많아졌다. 치약도 아들이나 딸은 아주 꾹 짜서 칫솔 위에 광고처럼 올라간 모습이다.
내가 어릴 땐 물을 물동이로 두레박으로 우물에서 길어다 누나가 이고 집에 채웠다. 그러니 집에서
세수하기보다는 개울에 수건 하나만 들고 가서 세수를 하고 집으로 오고는 했는데 세수하고
얼굴이 좀 땅기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상쾌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물론 빨래도 개울에서 엄마가
했다. 겨울엔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플라스틱 통에 물을 받아 씻기도 했지만 물을 길어 오는 누나
모습에 씻을 생각을 못하면 엄마가 강제로 씻겨 주는 경우가 많았다. 잘 씻지 않으니 온몸이
가려울 때도 있고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짚을 태워서 발가 벗겨서 아궁이
앞에 세워놓고 그 짚을 태운 것으로 온몸을 쓸고는 했다. 당연히 칫솔이나 치약은 없었고 세수
비누도 없었고 빨래 비누도 시꺼먼 양잿물 비누를 쓰다가 나중에 하얀 빨래 비누가 나왔다. 그러니
가루비누나 세탁기에 한 개씩 넣는 세제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부엌은 늘 시커멓게
그을음으로 그을었고 부뚜막도 마찬가지다. 밥이야 가마솥에 하지만 찌개는 늘 화롯불에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였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메뉴가 있는 줄은 아주 나중에 서야 알게 되었다.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어머니가 조금 싸 오거나 큰 일 집 앞에 기웃거리면 엄마가 부침개라도 하나 얻어 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 생활은 정말 미개한 생활 그 자체다. 단독 주택이니 층간 소음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없었지만 밤마다 천정에서 쥐들이 달리기 대회를 하다가 방바닥으로 내려와
방 한구석에 있는 쌀가마나 콩 가마를 쓸고 먹어 제키는 통에 서생원과 함께 살아가는 날이
많았다. 추운 겨울 밖에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이면 아침 일찍 아버지가 군불을 피어 아랫목에서
추운 줄 모르고 잠을 자고 비료 포대에 보릿짚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썰매를 타고 홑바지에 눈이
고드름처럼 달려도 마냥 즐거웠다.
우리 집에 책이라 고는 교과서와 참고서 수련장 밖에 없었다. 내가 학교 들어 가기 전엔 그런
것조차 없었다. 누나는 일찌감치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끝내고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지금은 새로 건축을 해서 없어졌지만 나는 평생 그 기억으로 살아간다.
지금도 삐그덕 거리는 부엌문을 열면 컴컴한 부엌에 어머니가 해온 땔감과 뒷문을 나가면
도라지와 부추, 고추, 깻잎 등을 심은 뒷밭과 담 밖에 채마 밭에 심은 당근은 내가 학교 갔다 오다
하나씩 뽑아 먹던 나의 간식이었다.
나는 아궁이를 청소하는 삼태기에 나무 막대기를 괴고 줄을 길게 늘어 뜨려 새들이 그 속에 들어
가면 잡을 거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낚시하듯 보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광에
콩깍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닭이 나오면 따뜻한 달걀을 톡톡 깨서 쪽 빨아먹던 생각도 난다.
쓰나미처럼 집에 불행이 닥쳐 사랑방에 기르던 토끼를 동네 청년들이 훔쳐 다가 해먹고 농약 먹은
검둥이를 언덕에 묻어 주었는데 파내어 해 먹고 그것을 그 부모들에게 말했더니 증거를 대라며
나를 압박하던 모습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폭행한 옆집 아저씨 일로 우리는 그 집에서 이사
나와야 했던 일들.
그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나는 순명처럼 평생을 기억하며 산다. 재숙이네 할아버지가 나에게
소리치면서 밭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던 일과 아버지가 나를 낳기 전에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행랑에 살기도 했다는 것도 안다. 고향에서 형들이 자꾸만 죽어서 옷가지 몇 개만 들고 남의
트럭을 타고 와서 정착한 곳이 그곳이란 말을 듣고 하도 힘들어 엄마가 기르던 소라도 끌고 온다고
시댁에 갔다가 구정물 세례만 받고 왔다는 것도 엄마한테 수도 없이 들었다.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 방에는 신문지를 바르고 꽃무늬 벽지가 무늬도 맞지 않게 붙여지고
가끔은 배가 불룩 나온 벽도 있었다. 초가지붕은 해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이영을 해서 얹어야
했다. 그러니 추운 겨울엔 당연히 춥고 난방은 땔감을 때는 것뿐. 장난감이 없어서 빨래 방망이로
가지를 치며 야구 흉내를 내다가 형 신기해하고 바로 뒤에 서있던 동생의 눈썹 부위를 정확히
맞춰서 병원에 간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이고 있는데 붕대를 붙이고 나타난 동생이
웃어서 내 마음도 환했던 일들과 각종 서리와 대보름에 망우리 돌리며 다른 동네와 패 싸움하던
일들이 우리의 놀이였다면 놀이였다. 물론 엿장수에게 고무신 주고 엿 바꿔 먹고 채 바퀴
가져다주고 엿 먹었다가 엄마한테 아주 많이 혼난 일. 지금은 줘도 안 먹을 목화 송이를 따먹다
주인에게 들켜 도망가다 미끄러진 고무신 때문에 엄마가 사과해야 했던 일과 물가에 가지
말라는데 홍골 저수지에 가서 물놀이하다 물에 빠져 죽을뻔한 일.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고개 너머 예배당에 가서 구유 예수 연극을 보고 찬송가를 부르고 연필을
타던 일들. 그때 집에 TV이니 라디오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추억이 빛나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으리라.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고 게임 하느라 세상과 담을 쌓는 어린이들이 많은 시절이 아니고
다리에 다리를 끼고 고모네 집에 갔더니를 외치며 놀고 옛날 이야기해 달라고 조르고 밤길에
귀신이 나올까 봐 호랑이가 나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참외, 수박은 물론 과수원 사과 서리에 콩
서리 땅 벌집 파헤치기까지 하던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서 동네 형들이
말아 주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세상이 핑핑 돌았었다. 그땐 하늘에 정말 별도 많았다. 창호지에도
성애가 얼음으로 얼고 호롱 불과 남포 불이 아까워 변소 갈 때 어두운 그믐밤엔 빠지기도 했다.
나는 내 위로 7명의 형과 누나가 있었다. 아니 8명인데 한 명은 살아 남아 결국 내가 장남이
되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고향을 등지고 남의 트럭을 타고 나올 만도 했다. 그래서 낳자마자
광주리에 담아 놓고 오래 살라고 빌고 이름을 광주리라고 부르면 오래 산다고 해서 내 어릴 적
이름이 광주리의 발음이 광주리였다. 난 정말 내 이름이 광주리인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름자는 쓰고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이름을 가르쳐 주는데 그 이름이 재민
어쩐지 도회지 물을 먹은 아이 이름 같았다. 그래서 그 후 광주리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나를 광주리라고 했다.
산과 들에 놀이가 지천이고 모래와 검정 고무신만 가지고도 잘 놀던 아이들은 옥수수 대를 끌고
다니며 놀기도 했는데 옥수수 대를 어슷하게 밴 그곳을 잡고 끌다가 돌에 걸려 밀리면서 그 옥수수
대가 칼이 되어 내 손바닥을 3분의 1정도 쭉 상처를 냈다. 물론 지금도 그 상처는 손금처럼 남아
있다. 돼지 콩알 거시기라는 땅뺏기 놀이를 하다가 뾰족한 한 돌에 머리가 구멍이 나서 지금도
이마에 자리가 있다. 누나가 울면서 내 이마를 잡고 집으로 가는 길에 피 냄새를 맡고 새까맣게
몰려든 까마귀와 엉엉 우는 누나. 집에 도착해서 소청으로 이마를 싸매고 누웠는데 엄마가
장독에서 된장을 퍼다가 상처에 발랐다. 그리고 다음날 이웃집에서 오징어 뼈 말린 것을 갈아서
바르라고 가져와서 발랐다. 지금은 아프면 병원을 찾아가면 되고 아파도 약을 타 먹으면 되는 데다
약국도 도보 거리에 있으니 그때와 비교해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한다. 물론 아들은 나의 시간을
살지 않았으니 절대 동의 안 하겠지만 말이다.
그 시절에 비하면 옷도 많고 책상도 있고 침대도 있고 책도 있고 선풍기도 있고 냉장고, 스토브
컴퓨터 등등 당시 부자들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누리고 산다. 하지만 지금도 다른 사람과
물질적으로 비교를 하면 뭔가 부족하고 가난하고 극빈자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부자로 살고 싶은데 아들과 딸이 자꾸만 현실의 세계로 불러 나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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