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노랗게 무리 지어 핀 들국화의 은은한 향내가 완숙(完熟)의 가을을 알린다.
고혹적인 모습으로 유혹하지도 않고 소소하게 무리 지어 피어 있다. 자세히 보면 고 작은 꽃에 꽃술도 있고 꽃받침도 있고 겹겹으로 포개진 꽃잎이 앙증맞다. 들녘에 나분히 피어 있는 모습이 아련하다.
서울에서 초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친구가 있다. 그는 몸이 약해 요양 차 시골에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았다. 대학에 입학할 때야 서울로 올라왔다. 시골에 살면서 그는 서울 토박이인 내게 고향 같은 포근함을 안겨주었다. 들국화 꽃잎을 말려서 베갯속에 넣고 자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보내 주었고, 만개 직전의 꽃을 깨끗이 다듬어서 정갈하게 말린 후 차로 마실 수 있게 들국화 차를 보내 주기도 했다. 차를 우려내면 친구의 모습이 꽃처럼 피어난다.
한여름이 초록을 거두면 주황의 계절이 다가오고 낙엽 소리가 멀어질 즈음 가을은 떠난다. 시골의 낭만을 선물하며 나의 허약한 영혼에 살을 찌게 하던 친구, 그는 나에게 늘 동화 같은 그리움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 )같은 마을에서 풍요로움에 젖어 지내는 친구에게 삭막한 도시의 풍경은 별로 전할 것이 없었다.
문학을 하는 외국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모처럼 기행 문집을 냈다. 꽃을 선물하려고 꽃집에 들렀다. 그 친구는 유난히 들국화를 좋아한다. 계절이 가을이니만큼 샛노란 들국화를 한 아름을 살까. 다홍의 장미를 살까. 아니면 난을 … 향기로 치면 은은한 국화 향도 장미 못지않지만 단번에 사람을 유혹하는 장미만 할까. 들국화는 어쩐지 축하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장미도 들국화도 밀어내고 난을 선택하며 포장을 부탁했다. 난 화분을 차에 싣고 오는데 슬슬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도도한 향기의 붉은 장미를 살 걸, 서양란이라 향기도 없고 순백이 왠지 초라해 보이고 꽃송이도 맥이 없어 보였다. 내가 저지르고 내가 후회한다. 선택하고 선택받는 게 어디 꽃뿐이랴.
꽃집에서 포장한 난을 다시 포장했다. 포장지를 바꾸고 실크 리본을 길게 늘어뜨리니 해맑은 꽃잎이 한결 고결해 보였다. 장미의 농염한 매력과 도발적인 향기는 기대할 수 없지만, 백설같이 희고 수려한 몸매로 한 달이상은 내 친구 곁에 머물 것이다. 나는 후회한 걸 후회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친구를 축하해 주었다.
놓친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인생도 마찬가지, 놓친 걸 아쉬워해야 마음만 아프다. 미련이 남더라도 털어 버리자. 삶의 유한함을 느끼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때로는 놓치고 사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 하루 하루가 새로운 날이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면 무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만난다.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할 수 있는 일을 놓치고 마음 아파해 하지 말자. 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가슴 졸이다가 할 수 있는 일조차 놓쳐 버리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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