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24-09-09 09:02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심부름 꾼이다.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심복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손의 사명이 달라지듯이 병고를 치유하는 인술(仁術)의 손이 있는가 하면 파괴와 살생을 일삼는 저주 받은 손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손을 갖고 싶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겸손한 그런 손을.
어느 가정이거나, 주부는 그 집의 손이어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한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고 이불에서 커튼까지 있는 대로 빨아 널고, 화초 분 갈이 하고, 김장을 담그고 나면 내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조심성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일이 서투른 탓인지 손이 성할 날이 없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손등은 생채기 투성이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칼 자국이 스쳐 가관이다. 낮에는 바빠서 별로 모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 그제야 얼얼하고 화끈거린다. 한때는 길쭉하니 메마르고 거기다가 머큐로크롬을 훈장처럼 바르고 지내는 내 손이 남 부끄러웠다. 어쩌다가 동창 모임에 간다든가 외출했을 때 손 마디가 굵어져서 반지 조차 들어가지 않는 손이 초라해 보여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생각이 달라져 갔다. 아마 가끔씩 받는 누시아의 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시아, 그 이름은 빛이라 했는데, 그녀는 그 반대편에서 살고 있다. 중학교 다닐 때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여 사십 고개를 넘어선 여태까지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이십 년 넘게 누워만 살고 있어 무릎 아래쪽부터 발가락까지 성장이 멈춘 아이 같고, 양팔은 어깨 밑에서 굽어져 내려 가느랗게 야위어 다섯 손가락이 거의 다 오므러 붙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파리가 얼굴에 새까맣게 앉아도 그것들을 쫓아버릴 아무 방도가 없다. 얼굴과 머리에 비듬이 덕지덕지 앉은 그녀를 씻기고 오는 날에는 목숨이 꼭 축제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열 일곱 소녀의 얼굴로 살고 있는 그녀는 오히려 평화롭다. 배설물이 두려워 몇 수저의 곡기로 연명만 하고 사는 터에 천진 무구한 동안의 평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로 누워서 막대기 같은 손가락 사이에 수저를 꼽고 엎지르며 한 두 술 밥을 넣던 손에 어느 날 볼펜을 쥐어 주었다. 무엇이라도 써보면 큰 위안이 될거라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글씨를 쓰게 되었다. 글 몇 자 쓰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고행을 거쳐서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은 이웃을 위하여 그 손으로 사랑의 체온을 나누고 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인에게, 마음을 앓고 사는 어느 주부에게 , 양로원에 있는 불구노인에게 오그라든 손의 봉헌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누시아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의 고통은 하찮은 것이라는 내송(內訟)의 아픔을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부 자유한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귀한 선물을 받았다. 가나 화랑으로부터 발송된 화 집이 그것이다. 조심스레 봉함을 열어보니, 거기 낯익은 조각가 C교수님의 친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C교수님의 작품을 좋아 한다. 까막눈인 내 눈에 무슨 안목이 있을까마는, 반듯하게 참으로 인간 답게 살아온 그분 삶의 열정을 익히 알고 존경한 까닭에 그분의 작품에 더 크게 공감하는 모양이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에, 나는 예술가라면 우선 그 사람 됨을 꼽고 작품을 뒤에 두는 편견이 있다. 가장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므로 완성을 향한 이상의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작품과 작가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도 있지만L.
그런데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예술가가 그리 흔치는 않은 모양이다. 유독 C교수님의 작품이 그렇게 형형한 빛으로 영혼의 문맹을 비추는 것은 삶 자체가 작품이라는 그분만의 진실한 철학이 있어서다.
  화집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소녀상의 눈길에서 안개 같은 슬픔이 배어 나오고 도끼 같은 얼굴에서 범종 소리가 울릴 것 같다. 서 있는 사람, 소녀상, 어디서나 불쑥불쑥 살아있는 손의 질감을 느낀다. 결코 크달 수 없는 두 손 안에 광대 무변한 우주가 담겨 있고 끝이 없다는 영원까지 수용돼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다소곳이 모아 쥔 자그마한 손인데 시공을 뛰어 넘어 생동하고 있다. 그 손은 어느 사이 현대의 성녀 테레사 수녀의 깡 마르고 큰 손이 되어 썩어가는 나병환자의 환부를 어루만지고 고통 속에서도 아픔을 나누는 누시아의 목각 같은 손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작가가 된 C교수님은 육체를 넘어서는 그곳에 비로소 열리는 창조의 영안을 얻음일까.
  이제야 조금씩 누시아의 평화를 알 것 같다. 두 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얹어본다. 이제야말로 좋은 손을 가져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사랑과 정성으로 저녁 식탁 차려 놓고 거기 둘러앉아 즐겁게 식사하는 식구들 틈에서 행복을 느끼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다.
정말로 아름다운 손은 누군가를 위하여 끝없이 봉사하는 그런 손이다. 비밀한 기쁨을 간직하고 고뇌의 정으로 창조의 촛불을 켜는 그런 손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돌담 2025.11.07 (금)
시멘트로 틈도 없이 매끈한건물을 짓는 현대의 우리에겐모양도 크기도 저마다 다른 돌들을하나씩 날라 와서얼기설기 쌓은 돌담이엉성해 보이지만 모두가 다른 우리 사이는그렇게 어설픈 듯 맞춰가면서천천히 시간을 내어 쌓아야지찬란한 현대 건축의 기술로는쌓아 올릴 수 없어
송무석
쉬었다 가세 2025.11.07 (금)
눈 내린 도시는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내리는 눈은 계절의 흐름을 잊지 않게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눈에 덮여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고, 햇살은 구름에 가려 흐릿한 시간 속으로 스며든다.      평일인데도 주말처럼 느슨한 오전이었다. 커피를 내리고 시아버님 방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적막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단하고 낯선 기운이 가슴을 눌렀다. 조심스레 스위치를 켰지만, 희미한...
허정희
[독자기고] 흙 2025.11.07 (금)
큰아버지 식구들이캐나다로 이민을 간다큰어머닌 눈이 빨갛다한수, 현수는얼굴이 빨갛다한수, 한수, 한수현수, 현수, 현수이름부터자꾸자꾸 멀어진다그런데  큰아버진 어딜 가셨지?고개 돌려보니공항 밖 화단에 앉아 계신다가만가만  흙을 만지고 계신다
김종순
 *사물주의 시에 대한 근원과 정의  ‘물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반응했다. 밥에게 미움을 주니 까맣게 썩고, 사랑을 주니 흰밥 그대로였다.’ 이런 파장 연구는 옛날 같으면 귀신 씻나락 까먹을 일인데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신이 창조한 생물 외에 물질도 기운과 정체성이 있다는 걸 중세 시인들의 시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인류에 기여한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려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에 근거해야 한다....
이명희
연어 2025.11.07 (금)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그 얼마 만인가거친 폭포를 뛰어 넘어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누구나 먼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누구나 가난한 사랑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그 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강 깊었다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울지 마라인생을...
정호승
마지막 정류장 2025.10.31 (금)
해 저문 골목 어귀어느 사람의 하루가 천천히 닫힌다 생(生)을 실은 버스 한 대낯선 정류장에 멈추고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를 따라앞좌석의 누군가가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여직흘러내리는 시간을 바라보며가라앉은 시간의 틈을 더듬어 본다 오래된 햇살 같은 이름 하나젖은 이불 깃에 스며든바람의 온도 창밖의 어둠 속으로사람들은 하나둘 그림자를 거두고나는 묵묵히 남은 모래알을 세고 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은빛...
임현숙
기억의 집 2025.10.31 (금)
  가을빛 향연에 이끌려 길을 나선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단풍나무 숲을 지나 산책길 끝의 공원묘지로 향한다. 캐나다의 공원묘지는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에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햇살과 잘 가꿔진 잔디와 꽃들 사이를 거닐며,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툭’ 하고 단풍잎 하나가 어깨 위로 떨어진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민정희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윤의정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