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하루 분량의 스킨쉽

박정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1-20 13:34

박정은 /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케이팝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한 유명인이 성경 강의를 한다고 해서, 유튜브를 통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에 앞서 그 유명인은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얼마 전 생일날 친구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너에게.”로 시작되는 생일 카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카드를 준 친구와는 무명 시절을 같이 보냈었는데, 현재 자기는 크게 성공했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무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친구 눈에는 그가 얼마나 부러운 존재로 보였겠는가! 하지만 쉬운 삶은 없다고, 그 친구가 보는 것과는 달리 그도 힘든 속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털어놓는 얘기가 치매에 걸린 아버지였다. 성공하기까지 자기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이자 친구였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처참히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그는 토로했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가 면회를 가도 이젠 아들인 자기마저 못 알아보는 현실, 그 현실 앞에서 그는 큰 절망과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코비드가 터진 이후로는 보호자 면회 제한이 생겨 요즘은  아버지를 자주 볼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면회 제한이 싫기보다는 되레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산산이 무너져 가는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후 그가 성경 강의를 시작했는데, 난 그가 하는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치매 환자를 15년 가까이 돌본 경험으로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치매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을 때 간호사인 필자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뭘 해줘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 삶의 질로만 따진다면 치매 환자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것만 같았다. 그 유명인처럼 치매 환자를 둔 많은 보호자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하는 환자를 보면서 큰 좌절감을 느꼈고, 그러다가 점점 발길을 끊어버리는 걸 수없이 봐왔었다. 물론 처음엔 그런 보호자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런데 병동 벽에 쓰인 이 문구를 이해하게 되면서, 치매 환자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I don’t remember days, but we remember moments.’  처음엔 병동 벽에 쓰인 이 말이 뭔 말인가 싶어, 그 앞에 서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었다. 그런데도 그 의미가 크게 와닿질 않았다. 하지만 치매 환자를 돌보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그 의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루를 기억할 순 없지만, 순간은 기억한다.’ 이 말은, ‘치매로 기억을 잃어 하루를 기억할 순 없지만, 그래도 느낄 순 있기에 순간은 기억한다.’라는 말이었다.  치매 환자에 대해 사람들이 쉽게 하는 오해가 기억을 못하니, 느끼지도 못할 거라는 거였다. 하지만 치매 환자도 울고, 웃고, 외롭고, 우리처럼 모든 감정을 느낀다. 기억에 의존하는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지 않고 그저 느낌으로 순간을 사는 삶, 이게 바로 치매 환자가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순간인데, 그 순간을 충실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치매 환자 스스로 그 순간을 충실히 채울 수 없다는 거였다. 그분들이 살아가는 그 순간을 충실히 채워주는 건, 바로 우리의 몫이었다.
치매 환자를 돌보다 보면, ‘Sundowning Syndrom’이라는 말을 꼭 배우게 된다. ‘황혼 증후군’이란 해 질 녘에 치매 환자들이 보이는 이상행동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늦은 오후만 되면 치매 병동엔 불안감에 서성대고, 탈출하기 위해 비상문을 흔들어 대고, 이미 사망한 배우자에게 전화해달라고 떼를 쓰며 소리 지르고, 폭력적으로 변해 울부짖는 그런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한다. 왜 특정 시간만 되면 이런 이상행동을 하는지, 아직도 그 원인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치매 환자를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게, 가족이나 친구, 하물며 자원봉사자라도 찾아온 날이면 상당히 평온한 저녁을 맞는 듯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날이면 저런 이상행동을 훨씬 더 보인다는 거였다. 그걸 보면서 깨달은 게, “아~! 저분들이 정서적으로 배고파서 저러는 거구나!”였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선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선 누군가와 함께하고 손을 잡고 허그하는, 그런 정서적인 양식도 필요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밥처럼 하루 분량의 스킨쉽이 필요한 건데, 그 누구도 그걸 채워주지 않으니 저런 이상행동이 나오는 거구나! 치매에 안 걸린 사람도 정서적으로 허기가 지면 미운 짓을 하고, 더 심통을 부리게 돼 있었다. 비록 기억은 잃었지만 치매 환자도 느낄 수는 있기에 마찬가지였다.
치매 환자에게 병원이 약과 음식은 제공할 수 있지만, 정서적 양식까지는 아니었다. 그걸 제공하는 건 바로 밖에 있는 우리의 몫이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끝까지 치매 환자를 찾아봐야 하는 이유였다. 꼭 쓰다듬고 허그하지 않아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냥 옆에만 있어 줘도, 이 모든 게 정서적인 스킨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날 강의를 한 유명인에게 필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 제발 발길을 끊지 마시고, 방문해서 아버지에게 필요한 하루 분량의 스킨쉽을 드리세요. 그러면 당신 아버지가 살아가는 순간이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아침 이슬이여, 너는 어둠의 울타리에 걸어 놓은  내밀(內密)의 창(窓) 지순한 그리움의 초상이구나    춥고 습한 긴밤들을 눈물로 견디며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결국 숭고한 환희로 통하는 길이라는 지혜를 터득한 너의 맑은 이마여!                                           ...
안봉자
작은 아씨 2025.06.27 (금)
  어머니는 젖이 풍부하신 분이셨다. 우리 형제들을 키우면서도 일부러 젖을 떼려고 애쓰지 않고 아이가 먹겠다면 언제까지고 먹이려고 하셨다. 나도 거의 세 네 살까지 젖을 먹었다고 들었다. 내 밑에 막내 동생은 여섯 살이 넘도록 젖을 먹었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도 들어와서는 어머니 품을 파고들어 젖을 먹었다. 주위 사람들이 젖을 떼지 다 큰 애를 무슨 젖을 먹이냐고 하면 어머니는 이제 더 먹일 아이도 없는데 나오는 젖을, 먹겠다는...
심현섭
그리움 2025.06.27 (금)
사그라져 가는 물안개 아침 햇살에 부서지고   파도가 뿜어낸 당신 닮은 은빛 숨결 물 비늘이 허공 위로 흩어지네   그대 향한 서성임이 아픔의 태산 되어 울고   요란한 살여울 지쳐 밀려온 그 자리 차디찬 빙산 이어라   볕 뉘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당신 목소리에 오늘도 목이 메이네
김정임
바람이 전해준 말 2025.06.27 (금)
  캐나다 웨이에서 오클랜드 스트리트로 우회전 핸들을 틀자마자, 눈부신 초록의 나라가 시야에 확 펼쳐졌다.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시원해진다.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되는 설국(雪國)의 첫 페이지가 떠올랐다. 하얀 눈의 나라로 들어가는 대신, 나는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든 별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은 조금 지나면, 디어 레이크 파크 숲을 우측으로 끼고 돌면서 계속...
지연옥
The Rose of Sharon Blooms in Vancouver                                                   Poem by Lotus Chung Mother, brother, we’ve crossed the seaUnder Vancouver’s sky, the Rose of Sharon blooms in fullOn sunny days, let bursts of laughter bloomLet’s dress in hanbok and dance with grace In the immigrant’s suitcase, dreams and hopesAnd tucked inside, a single word in our mother tongueChildren, friends, be proud Embracing two cultures in our...
로터스 정병연
양상군자 시리즈 2025.06.20 (금)
30년 전 빅토리아에서 편의점을 운영할 때였다. 한 번은 내 가게에서 일하는 모하메드 (아프가니스탄인)가 어떤 아이가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고 혼내 주었다고 한다. 그 아이 인상착의를 들으니 가끔 엄마 심부름으로 담배나 우유를 사러 오는 테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잔돈 남은 것으로 사탕을 사 먹는 순해 보이는 4-5학년쯤 되는 남자아이였다. 며칠 뒤 저녁때쯤 그 아이와 친구가 사탕을 사러 들어왔다. 검은 큰 잠바를 입고 사탕과 초콜릿이 진열된...
이종구
   거센 물살을 이기며 본향으로 역류하는 연어의 몸짓을 본 적이 있는가? 영어의 바다에서 한글로 문학작품을 쓰는 이들이 연어의 몸짓을 닮고 있다. 금년 한카문학상 응모작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캐나다에서 오래 살다 보면 언젠가부터 영어도 잘 늘지 않고, 한글은 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을 살리고, 우리 글을 익히려는 한국문학 지망생들의 도전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이제 수상자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원배(심사위원장)
은사시나무 2025.06.13 (금)
유월의 숲나풀거리던 녹두 빛은  어느새 농록한 푸름으로 가득하다해질녘 노을 꽃피면붉은 비로도 옷 두른 나무들 사이늙은 은사시나무흰 버짐 가득 핀 맨살 드러낸 체 고단한 시간의 허물을 벗겨내고 있다영겁의 세월 지나는 동안이웃한 바람, 꽃, 새들에게힘껏 다정하였다고 정성다해 사랑하였다고구름으로 하늘편지를 띄운다고요한 유월의 숲겹겹이 까만 커튼이 드리우면슴벅거리는 황혼의 노을 데리고은사시나무 레테의 강가*에...
김계옥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   
광고문의
ad@vanchosun.com
Tel. 604-877-1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