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기억의 갈림길에서

김춘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09-11 12:33

김춘희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용인 가는 고속도로에서 수원가는 표지판이 눈에 띄고서야 문득 수원 양로원에 있는 요안나가 생각났다. 아! 수원이구나! 요안나가 있는 수원이구나!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우리 일행은 용인에서 다른 가족팀과 합세하여 다음 날 전주로 떠나기로 하고 용인 라마다호텔에 묵었다. 한국을 떠나 반세기를 캐나다에서 살아온 세월 때문에 용인과 수원이 인접해 있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나는 한국어를 하는 이방인이다. 요안나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과 여행하면서 노인네답게 하루건너 호텔에서 푹 몸을 쉬어 주어야만 한다. 용인에서 아이들은 에버랜드를 방문하는 일정이고 나는 호텔에서 쉬는 날이었다. 다음 날은 아침 10시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전주 쪽으로 내려간다. 저녁에 아이들이 호텔로 들어왔을 때 나의 계획을 알려 주었다. 다음 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수원 양로원에 있는 요안나를 만나고 9시 전에는 호텔로 돌아와 합세할 것이라고. 그날 저녁 몬트리올에 사는 요안나를 잘 알고 있는 분에게 물어 양로원 주소와 최근의 근황을 알아 두었다.   
 
  다음 날 새벽,  조용히 호텔 방을 나와 로비에서 주선해 준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 전인 새벽 차도는 한가했다. 마누라 잔소리가 싫어서 아직도 택시업을 한다는 나이 지긋한 택시 운전사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으며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택시는 드디어 벽돌로 쌓아 지은 아름다운 양로원 빌딩 앞에 섰다. 천주교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양로원 ‘평화의 모후원’에 도착한 것은 7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택시 기사에게 적어도 30분 내외로 나올 것이니 기다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고 뛰다시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짧은 시간 안에 요안나를 만나는 소임을 마쳐야 한다. 건물안으로 들어섰는데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침 미사 소리만 울려 퍼졌다. 커다란 성당 문을 밀고 들어 갔다. 미사 중이었다.  백발의 노인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미사보를 쓴 꼬부랑 할머니 여럿이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970년대 내가 한국을 떠나올 무렵 유행했던 한복 스타일이었다. 추억이 묻어나는 한복을 입은, 50년 전 시간을 살고 있는 할머니들! 마치 하느님 앞에 나가듯 그렇게 미사에 임했으리라. 낯선 사람이 새벽 미사에 나타난 것을 알아본 나이 지긋한 수녀님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귓속말을 걸어왔다. 나는 캐나다에서 온 방문객인데 우연히 요안나가 살고 있는 양로원을 지나가게 되어 이 새벽에 급히 택시를 타고 달려 왔으며, 시간이 별로 없으니 벗의 얼굴을 잠시만이라도 보고 가게 해달라고 사정 말씀을 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노 수녀님의 배려로 드디어 젊은 수녀 한 분과 보조자의 도움으로 요안나가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옛날의 팔팔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누구의 도움을 받고 휠체어에 실려 나오는 그 모습에 가슴이 찡해 왔다.   
   
  몬트리올 살던 1999년쯤이었다. 어느 날 시내로 가는 버스에서 요안나 씨를 만났다. 아부다비에서 살다가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는, 그녀의 얼굴은 가냘프고, 대신 수심이 가득했다.  그후 나는 그의 이민 문제와  생계를 위한 일자리 알선 등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독신녀였다. 요안나는 점차 몬트리올에서 자리를 잡고 잘 살았다. 비록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살았지만, 번듯한 정부 노인 아파트도 얻어서 겉으로 보기엔 부족함이 없는 노후 생활이었다.  
   
  요안나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 즈음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밴쿠버로 이사 와서 사는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왔다. 저녁노을이 지면 외로워서 못 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외롭다는 그녀의 하소연이 성가시게 들렸다. 사람은 다 외롭게 태어났다고, 그리고 홀로 살거나 공동으로 살거나 외로움은 인간의 조건이라는 등, 철학적인 말로 위로를 하기보다는 핀잔을 주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캐나다 정부의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국해서 수원에 있는 ‘평화의 모후원’ 양로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요안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로움은 병이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있는 여러 지인에게 자주 전화했다. 양로원 급식이 형편없다, 수녀들이 자기를 학대한다 등.. 급기야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니 자기를 잠시 받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에게도 전화가 왔으나 나는 마음을 다스리고 지긋이 한국에서 살라는 차가운 조언을  해 주었다.  
   
  팬데믹이 한참이던 때, 한 지인으로부터 요안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요안나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따금 요안나를 아는 캐나다 지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요양원에 있는 요안나를 찾아갔는데, 더러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요안나의 치매는 깊어져 갔다. 시간이 흘렀다. 요안나는 우리들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지난봄 우리 가족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만나는 일정은 내 여정에 없었다. 친구들의 기억에서 그녀는 점점 사라져갔다. 눈앞에 없는 사람, 치매에 걸린 사람을 그 누가 알뜰히 기억할 것인가!   
 
  수원 양로원에서 내가 잠시 요안나를 만났을 때 요행히도 그녀는 나를 알아보았다. 모두 그의 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나는 뚜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가다씨!” 하며 내 손을 잡았다. 지구 반 바퀴와 고독한 세월을 돌고 돌아 두 사람이 주름진 서로의 두 손을 맞잡았다. 아주 잠시나마 우리는 옛정을 나누었다. 나는 그녀가 건강했을 때처럼 우리 집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요안나는 눈빛은 흐렸어도 우리 집 아이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발음하면서 기도하마 약속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는 택시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드디어 작별 인사를 하고 일어났지만, 요안나는 내 손을 쉬이 놓지 않았다. 요안나는 캐나다로 다시 갈 것이라는 말을 거듭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나는 황급히 택시로 향했다. 어설픈 몸짓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하고 돌아선 나의 발걸음이 왜 그리 무거웠던지... 택시 기사분이 나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한국 정부가 노인 복지를 잘해서 한국의 노인들은 편안한 노후를 맞고 있다고. 잘 정돈된 시설과 더욱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마지막을 보내는 노인들에게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요안나의 마음은 수원 양로원과 몬트리올에서 살았던 노인 아파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서 그녀의 기억은 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도 저기도 그녀가 머물러야 할 진정한 거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기억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듯 요안나도 자기 기억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사라져 가고 있을 것이다. 지상에는 영원한 거처가 없기 때문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프랙탈 2024.06.07 (금)
“오늘의 헤드라인 뉴스입니다. 어제 오후, 속칭 <버뮤다 연쇄살인>의 여섯 번째 희생자가, 다섯 번째 희생자 이후 불과 7주만에 발견되면서 사회를 다시 충격에 빠뜨린 가운데, 오늘 경찰은…” 고준호 씨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양손으로 뼈채 들고서 발라 먹던 고기를 잠시 내려놓고,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TV 리모컨을 집어올려 홈쇼핑으로 채널을 돌려 버렸다. 고기를 먹으면서 연쇄살인 어쩌구 하는 얘기를 듣기에 고준호 씨의...
곽선영
이민자의 특징 2024.06.07 (금)
  ‘동양의 도학은 약육강식을 부도덕이라고 하지만 서양의 철학은 이기는 자만이 생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을 인용한 것은 과거엔 이민을 운명, 팔자, 역마라 치부했다면 현재는 용기 있고 강한 자의 결단과 도전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민의 방법은 초기엔 간호사나 재봉사 등의 기술이민이 주였다면 지금은 독립이민, 기술이민. 투자이민, 초대 이민 등 다양한 통로가 있다. 초기엔 전문직이 일반적이지 않았는데 이민의...
이명희
나물 캐는 아낙의 시선 피하여길섶 풀숲 속숨어 핀 샛노란 민들레해를 사랑하여환한 꽃 피우고임 온기 느끼며 길가에 서 있다가흰 나비 애무하고 떠나간 뒤날개 단 홀씨 한 다발 들고초원 지나갈 바람 기다린다오! 바람이여저 멀리 하늘 끝에 계신 내 임에게로Please! send seeds beyond the cloudsto the end of the sky
김철훈
강물을 보네깊어지며 흐르는 거역 없는 몸짓을 보네하루를 다 날아온 고단한 태양을 눕히고어느 산기슭 떠나온 나뭇등걸도 함께 눕히고강물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나를 보네팔랑이는 잔물결들 사이로 얼핏 설핏 보네정(精) 때 묻은 부모 형제 다 두고태평양 큰물 건너오던 반세기 전 그날비단결 검은 머리 스물여섯 살 새아씨여!세월을 보네꿈, 좌절, 인내들이 들락거린 한 세월을 보네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째 일어서면서고향 떠나 멀리 또...
안봉자
세 번의 외과수술 2024.06.03 (월)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여 새롭게 나날이 달라지는 세상을 산다고 했더니 어느 날 주위를 살펴보니 100세 이상 사시는 노인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60세 환갑잔치를 요란하게 치르던 때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환갑잔치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100세 잔치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아니다. 수명이 늘어난 것은 의료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덕분이다. 이런저런 수술로 죽을 사람이 죽지 않고...
심현섭
감자 꽃 향기 2024.06.03 (월)
“할무니, 왜 이쁜 감자 꽃을 다 따분당께라우?” “꽃을 따내 줘야 밑이 쑥쑥 든다고 안 그러냐?”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까. 할머니를 따라 밭에 나갔다. 할머니는 밭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더니 감자 밭으로 가 감자 꽃을 따기 시작했다. 꽃은 꽃이고 밑은 밑일 텐데 어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니 어미가 감자 꽃을 참 이뻐했느니라.” 하시더니 눈물을 훔치셨다. 엄마가? 순간 흐린 기억으로 어머니가 감자 꽃을 바라보고...
최원현
오 월 찬가 2024.06.03 (월)
상큼한 산들바람 손등 스치고 지나가면나무를 건너뛰던 다람쥐 나도 보아 달라하고 작은 무도회를 연캐나다 구스 공연 햇살도 왜 나는 안 봐주냐며무릎에 앉았다 눈으로 보아도 들리는 님의 소리처럼
전재민
엄마의 빨랫줄 2024.05.27 (월)
그 시절 엄마는아침 설거지 마치고이불 홑청 빨래를 하곤 했다커다란 솥단지에 폭폭 삶아돌판 위에 얹어 놓고탕탕 방망이질을 해댔다고된 시집살이에마음의 얼룩 지워지라고부아난 심정 풀어보려고눈물 대신 그렇게 두드렸을까구정물 맑아진 빨래를마당 이편에서 저편으로말뚝 박은 빨랫줄에 널어놓으면철부지는 그 사이로 신나서 나풀댔다부끄러운 옷까지 대롱대롱 매달린울 엄마 늘어진 빨랫줄은 마음의 쉼터옹이 지고 구겨진 마음이훈풍에...
임현숙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