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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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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4-24 11:11

김보배아이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무슨 짓이야?

"엄마, 나는 정리 좀 하려고 한 건데?"

"놔둬! 비어있는 공간을 보는 게 싫어. 난 벽이 휑하니 비어 있으면 싫다구!"

내가 거실 찬장에 물건들을 꺼내 상자 안에 절반쯤 집어 넣고 있을 때, 나를 본 엄마는 언짢은 목소리로 소리치셨다. 그리고 내가 들고있던 머그잔을 낚아채 가셨다. 내 딴에는 간만에 딸 노릇 하겠다는 가상한 노력이었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무심한 타인이 당신 공간을 훼손시킨 것이었다. 한국을 떠나 9년 만에 들어가서 딸년이 고작 한 짓이 엄마의 물건 버리기였다니… 십 년 가까이 엄마와 함께 살지도 못했으면서, 오랜만에 엄마한테 가서 한 일이 나 대신 엄마 곁을 지켰던 고마운 존재들을 정리해고 했다.
 
엄마의 어떤 찻잔은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엄마는 항상 같은 머그잔에 커피를 드시기 때문이다. 예쁜 컵이 있는데도, 엄마가 사용하는 컵은 늘 같은 그 컵이다. 깨지기 전엔 선수교체가 없다. 언젠가는 예쁜 잔들도, 못난 그릇들도 모두 나에게 물려지겠지… 그런데 찬장 속에 고이 모셔 뒀던 어여쁜 잔을 보았을 때 엄마를 떠올릴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커피를 타 잡수셨던 빛바랜 못난이 잔을 보면 엄마를 추억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엄마와 물건 버리기로 말다툼을 벌인 다음, 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들도 그 존재의 가치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하여간 뭐든 잘 못 버린다. 미니멀리즘을 동경하면서도 물건들을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절약하는 습관 때문인데, 이 또한 내가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마음의 발로다. 물건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물건을 사지 않기 위함이다. 물건을 버리면 언젠가는 필요에 의해 물건을 사기 마련이지 않은가. 큰딸이 입던 옷을 네 살 아래인 둘째 딸이 입을 수 있다. 그래서 큰딸 옷을 약 4년간 보관한다. 큰아들 옷을 세 살 아래인 작은아들이 물려 입을 수 있으므로 역시, 약 3년간 보관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새 옷 사기를 최소하고 때에 따라서 꺼내 입힌다. 큰애가 입은 옷을 둘째가 입었을 때는 옛날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엄마, 이 옷 입고 어디어디갔었잖아!" 아이들은 자기가 입은 옷을 언니가 입었다고, 형이 입었다고 사진을 보면서 찾아내었다. 같은 옷인데 이 녀석에서는 어울리고, 저 녀석에게는 안 어울리는 것도 재밌다.
 
캐나다에서 날씨가 맑은 주말이 되면 차고 문을 열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가라지 세일을, 이민 초기에는 호기심으로 구경하곤 하였다. 물건을 얌전히 사용하는 사람들이 신기했고, 포장 상자와 사용 설명서를 고이 간직하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단 몇 푼, 몇 센트라도 받고 되파는 이 사람들이 어찌나 신기했는지. 나는 가라지 세일을 무척 사랑하여 교회 바자회나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야드 세일 날짜를 챙겨 놨다가 찾아갔다. 장롱 속에 수년 동안 처박혀 있다가 햇빛 구경을 하는 물건들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때로는 박물관이나 골동품 가게에서나 만날 것 같은 증조할머니적 물건들도 나온다. 구경도 재미나고, 기념이 될 만한 물건도 건진다. 한번은 내 중학생 때 열렸던 88 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가 박혀 있는 머그잔을 발견하고는 보물처럼 소중히 가져왔다. 먼지 앉지 않게 덮어 놓을 수 있는 뚜껑까지 있어서 커피를 내려 컵에 따르고, 뚜껑을 덮어 남편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남편님을 융숭하게 대접한 것 같은 기분을 아내님에게 선사해주었다.

나의 물건을 아끼는 이유에는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우리 애들이 두 번씩을 열심히 입고 난 옷은 더 이상 누구에게 물려줄 수가 없게 될 만큼 허름해진다. 지지리 궁상맞다고 생각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돈을 아끼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거다. 물건을 사는 행위를 줄이기 위해서다. 요즘 파는 물건은 대부분 품질이 견고하지 못하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흔한 표현을 가져오지 않아도 가격 대비 물건의 가치가 떨어진다. 싸게 만들어서 싸게 팔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몇 번만 사용하고 쉽게 버린다. 나는 그렇게 소비하는 행태에 급진적일 만큼 반대다. 물건들이 내 손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한 번 더 사용하고, 아껴 써서 그 물건이 오롯이 제 수명을 치르게 하고 싶다. 새 물건이 계속 소비되어, 또다시 새 물건이 만들어지는 구조에 한 젓가락만큼도 보태기 싫다. 나는 미약하지만, 지구를 지킨다고 믿는다. 

요즘은 사진 앨범을 사는 사람이 없다지만, 내 취미 생활 중에 사진 앨범 꾸미기가 있다. 스크랩북킹이라고 한다. 앨범을 꾸밀 많은 재료들을 사야겠지만 사지 않는다. 신문에 끼어들어 오는 전단이나 잡지에서 필요한 사진을 오려서 사용한다. 스티커를 사지 않으니 돈 안 써서 좋고, 잡지도 재활용하니 일석이조다. 계란 상자나 일회용 용기에 아이디어를 얹어서 정크아트를 실천할 때 뿌듯하다. 일회용으로 만들어졌을지는 몰라도 단번에 버림받지 않고 한번은 쓸모를 더하는 물건들이 대견스럽다.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다가 이 땅에서 최소한의 쓰레기만을 만들고 싶다.

물건을 아끼는 사람들의 작은 마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다. 비싼 물건만 귀한 물건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물건의 용도로서 대우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잘난 사람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서 귀한 것처럼 말이다. 시집올 때 지인들이 결혼 축하선물로 준 물건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중에 엄마가 주신 ‘키친아트’ 냄비는 내가 즐겨 사용하는 물건 중에 하나다. 튼튼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 날 뚜껑 손잡이가 헐거워지면서 결국엔 손잡이가 나사를 붙들지 못하고 국 속으로 빠뜨렸다. 여러 차례 뚜껑 손잡이를 돌리다가 하루는 화가 솟구쳤다. 급기야 뚜껑 손잡이를 쓰레기통에 냅다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뚜껑 손잡이 없는 ‘키친아트’는 더 이상 내 요리에 명함을 내밀기 힘들어졌고, 싱크대 구석에 쳐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키친아트와 완전히 이별하지 않는 이유는 중고 가게에만 가면 냄비 뚜껑도, 뚜껑 손잡이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 물건의 부품이 거의 다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동네 중고 가게에 없다면, 저 동네 중고 가게에 있을 테니까. 한 번은 전자레인지에 찜질팩을 데우고 아이한테 가져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아이가 찜질팩을 꺼내다 그만 전자레인지 안에 들어있던 회전 유리가 같이 딸려 나와 와장창 깨져버렸다. 회전 유리 없이 쓸모를 잃은 전자레인지를 버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연히 들른 중고가게에서 각종 가전회사의 전자레인지 회전 유리만 모여있는 선반을 발견했다. 쾌재를 불렀다. 우리 집 전자레인지에 맞는 회전 유리를 두 번 만에 찾아내었다. 두 번의 수고는 했지만, 잘 맞는 회전 유리를 장착하고, 문제없이 작동되는 전자레인지를 버리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생명이 들어 있지 않은 물건에 의인화하는 것이 생뚱맞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 그렇게 비친다. 브랜드 이름표를 단 물건들은 부자 부모를 만난 금수저처럼 보인다. 쇼윈도에 진열된 채 수개월이 지나도 팔리지 않는 물건들은 백수처럼 보이고, 가끔 길을 지나다가 공터에 버려진 가구와 살림살이를 발견하면 그 옛날 고려장으로 버려진 노인들처럼 보여 처량하다. 하다못해 자동차도 표정을 짓고 있다. 운전 연수를 하고 있는 자동차 뒤태를 보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게 느껴지고, "우리 집 아이는 학교에서 우등생입니다" 라는 스티커를 붙인 차 뒷모습은 어쩐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일부러 엔진 소리를 한껏 부풀린 스포츠카 옆에 서 있노라면 어김없이 까칠한 반말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가까이 오지 마, 다쳐!”라고.
 
물건들은 물건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물건은 단지 생활 속에 소비재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내 인생의 추억 저장고로도 존재한다. 할 수만 있다면 기계로 찍어낸 물건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들을 사용하고 싶다. 내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쓰고 싶다. 고장 나면 고쳐서 쓰고 싶다. 손때가 묻은 물건,  엄마의 공간에서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물건, 일상에서 나를 도와 열 일했던 물건을, 정들어 버린 존재들을 나는 함부로 내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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