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광고문의
연락처: 604-877-1178

수양매화

정목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04-17 09:20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월 중순, 경기도 축령산 자락에 둘러싸인 아침 고요 수목원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단번에 눈이 황홀해져 어쩔 줄 모르고 오랫동안 바라만 본다. 여인은 방문 밖으로 긴 주렴을 늘어뜨리고 그 안에서 홀로 가야금을 뜯고 있는가. 내 가슴에 덩기둥, 덩기둥 가야금 소리가 울리고 있다. 10만 평의 수목원을 가득 메운 꽃들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벚꽃, 매화, 목련 등 하얀 빛깔의 꽃이다. 나무 한 그루 씩이 거대한 꽃 궁궐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한꺼번에 깨달음의 꽃을 활짝 피워낸 것일까. 꽃나무들은 순결과 아름다움의 화신이거나 성자인 듯하다.

  눈부시게 하얀 꽃 궁궐을 이룬 벚꽃, 매화, 목련 꽃을 바라보다가 키가 작고 꽃송이가 듬성듬성 맺힌 수양 매화에 눈이 딱 머문다. 긴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듯하고 몸매가 늘씬한 미인이다. 처음 보는 고전적인 여인이다. 머리카락을 땅에 닿을 듯 풀어 내린 여인을 홀린 듯 바라본다. 하늘로 향해 머리를 곧추 세우며 뻗어간 나무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영락없는 수양버들인데, 가지마다 듬성듬성 매화 송이를 달고 있다.
매화는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로 지조와 결백의 상징으로 알아왔지만, 수양매화를 보긴 처음이다. 매화라면 지조 높은 군자의 꽃인 양 생각해 왔다. 그런 매화가 휘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듬성듬성 맺혀 있는 것인가. 수양매화를 홀린 듯 바라보면서 우아하고 청순한 갓 서른 살 쯤의 여인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땅에 닿을 듯 축축 늘어진 실 가지 위에 피운 수양매화는 맑고 고귀한 기품을 보여준다. 땅을 향해 피는 꽃으로 제 모습을 감추는 아름다움, 겸손이 묻어 나는 꽃이다. 치렁 치렁 늘어진 초록빛 반지르르 윤이 나는 실가지들에 띄엄띄엄 꽃송이를 달아 놓았다. 한꺼번에 화들짝 피어나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다. 단아하면서 여운을 지녔다. 땅으로 주렴을 드리운 채 방안에서 울리는 가야금 음절이 띄엄띄엄 꽃으로 피어난 것일까.

  부드럽게 아래로 쭉쭉 드리운 가지의 알맞은 간격마다 꽃들이 자리 잡아 미소를 띠고 있다. 화창한 봄 날에 꽃 드레스를 입고 나선 부끄러움 머금은 날씬한 봄 처녀의 모습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가지마다 영롱한 순백의 꽃, 수양매화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은은히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수양매화는 네 가지 고귀함이 있다고 한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귀함, 어린 나무가 아니고 늙은 나무의 모습, 살찌지 않고 날씬한 모습, 활짝 핀 꽃이 아니고 오므린 꽃봉오리를 보이고 있다. 달밤이면 수양매화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향과 달빛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들어 주리라.

  수양매화는 달밤이면 주렴을 드리운 방에 앉아 임을 기다리며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뜯는 가야금의 음절이 방울방울 피운 꽃이 아닐까. 가장 여성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동양의 멋과 운치로 피워놓은 꽃일 듯싶다.
매화를 보면서 지조 높은 선비를 떠올리곤 했지만, 수양매화를 보고는 고귀하고 향기로운 여인을 만난 듯하다.
수양매화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를 견뎌내고 초록의 분수가 되어 뿜어 오른 모습이다. 섬세한 초록빛 머리카락에 듬성듬성 흰 매화를 피워 놓은 모습은 고결하고 맑은 여운을 지니고 있다. 수양버들 가지에 어찌 매화가 피어 있는 것일까. 수양버들이 여성미를 드러낸다면, 눈 속에서도 피는 매화는 지조 있는 군자에 비교되곤 하지 않았던가.

  수양버들과 매화가 만나서 한 몸이 된 나무를 눈부신 듯 바라본다. 이 땅에 존재하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은근한 여성미를 지닌 나무를 품어보는 순간이다. 수양매화가 피어서 봄 날이 더 찬란하고 눈부시다. 한 번 만이라도 만났으면 싶은 여인을 여기서 대면한다. 마음이 눈부시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양의 어여쁜 여인이 봄 맞이 산책을 하고 있다.
아침 고요 수목원에 가서 봄철에 피는 수만 가지 꽃을 보았지만, 나무 중에서도 흰 꽃을 피우는 매화, 목련 꽃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보다도 청순하고 맑은 향기로 닿아오는 동양의 고유한 미소를 지닌 수양매화와 오랫동안 눈 맞춤 했다. 고아하고 섬섬한 수양매화는 내 마음속에 피어나 가야금을 울려주고 있다.
은은한 달빛 속에 한 번이라도 수양매화 같은 여인을 만나고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그 거룩한 성 2025.12.05 (금)
청소년 시절인 77년도에 살던 동네 교회 목사님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게 되어 사용하시던 전축을 우리 집에 레코드 판도 같이 갖고 오게 되어 음악을 들었는데 가장 많이 듣던 LP는 테너 고이동범 교수님의 노래 거룩한 성이란 찬송가였다. 이 노래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가 지은 음악에 법률을 공부한 변호사가 작사하여 만든 곡이라고 한다. 노래의 톤이 감미롭기도 하지만 가사가 그 거룩한 성은~ 호산나~ 부분은 매우 감동이 온다....
이형만
황금률 2025.12.05 (금)
겨드랑이에 품은 그 소리는별똥별의 사랑을밤새 들려주던 풀벌레의 협주곡이다청년 시절그를 향한 마음은봄날 아침이었다주어진 환경은젖은 휴지처럼 스며드는 것이라고타이르는 나의 반석푸른 더듬이가방향키를 찾을 때사막에 풍향을 읽게 하고힘없이 부서지는 낙엽을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생애 기쁨이라고황금률을 내주는 사랑의 품이다수많은 별만큼 신비한 그의 소리가삶의 대지에 너울처럼 펼쳐지니창조물의 숨결이 그의 사랑에서...
반현향
  외국에 살면서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순간들은 복잡한 감정을 동반해 찾아온다. 현지 사람들이 특정 TV 프로그램에 대해 말할 때 함께 웃지 못하고,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감정 표현의 방식이 서툴러 무감각할 때, 은행이나 병원, 행정 기관 등의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복잡한 절차나 서류에 압도당할 때, 직장 동료와 철학, 정치 또는 깊은 감정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을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어디서 왔고 왜 이곳에 살고 있는지를...
권은경
길목 2025.12.05 (금)
날렵한 초겨울 바람송두리째 가을을 삼켜 버리고온 몸부림으로 서둘러 왔네 어느새하얗게 채색된 눈부신 이 아침 앙상한 사과나무 위모여 앉은 새들 눈꽃 잔치가바로 천국 이어라 향기 실은 꽃 바람 기다림은풍성한 내일로 불어 오려나 삶의 뒤안길옷깃 속으로 드는 찬바람이바로 봄인 것을 뺨 위로 넘나드는 춤추는찬 물결 꽃봉투는너울 되어 먼 여행길을 나서네
김정임
맨 아래 칸 서랍 2025.12.01 (월)
맨 아래 칸 서랍이즈음 옷장의 맨 아래 칸 서랍을 정리하는 날이 부쩍 늘었다놓지 못해 떠나지 못한 내 어제의 그림자들이 매미 허물같이 모여 사는 곳돌쩌귀도 녹스는 늙은 세월에 대부분은 떠나고몇은 아직 남아서 민속촌처럼 함께 저무는 그곳엔늦가을 저녁의 체온 닮은 바람이 분다내가 거쳐온 삶의 간이역들이 펼쳐진다순진한 젊은 별바라기의 풋꿈도자갈길에 땀 흘리던 이민(移民)의 한여름날도오래전에 잃어버린 시(詩)를...
안봉자
내가 살던 낙동강 상류에는 유달리 풀꽃이 많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그 풀꽃을 따서 강물에 띄워 보내며 들찔레 새순을 꺾어 먹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이웃에 초등학교 선생 한 분이 계셨다. 어린 내 눈엔 그분이 늘 우러러 보였다. 강마을, 농촌에서 태어나 비범한 재주도 없을 것 같아 소년 적 꿈이래야 고향 초등학교 훈장이 되어 풀꽃처럼 사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어려서 나는 책 읽기를 좋아 했다. 그 때는 읽을 책도 많지...
권순욱
시간(時間) 2025.12.01 (월)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고 말한다.마치 인생의 모래시계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기울어져 모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하지만 젊은 시절의 시간은 전혀 다르다.아직 모래시계의 윗부분이 가득 찬 채 천천히, 그리고 지루할 만큼 느릿하게 모래알이 떨어지던 시절 —나에게 그 시절은 바로 10대였다. 국민(초등)학교 시절의 하루는 끝없는 여정이었다.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는 그 작은 꿈조차...
우제용
세월이란 길 위로시간은 물결처럼 흘러가고천천히 스며드는 듯 하다가도돌아보면 한순간의 빛처럼 멀어져 간다 머물 줄 모르는 그 흐름 속에서소중했던 날들조용히 견뎌낸 순간들은가슴 깊은 곳에고운 흔적으로 남아추억이 되어 숨 쉰다 아쉬움이 스치는 기억함께 웃음꽃 피우던 날들의 온기아직도 마음속에서 잔잔히 물결치고참 따스했고 참 고왔던그 멋진 순간들조용한 기쁨이 되어지금도 내 손을 잡아 준다 세월의 길 위에서날 웃게...
나영표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