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수양매화

정목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04-17 09:20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월 중순, 경기도 축령산 자락에 둘러싸인 아침 고요 수목원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단번에 눈이 황홀해져 어쩔 줄 모르고 오랫동안 바라만 본다. 여인은 방문 밖으로 긴 주렴을 늘어뜨리고 그 안에서 홀로 가야금을 뜯고 있는가. 내 가슴에 덩기둥, 덩기둥 가야금 소리가 울리고 있다. 10만 평의 수목원을 가득 메운 꽃들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벚꽃, 매화, 목련 등 하얀 빛깔의 꽃이다. 나무 한 그루 씩이 거대한 꽃 궁궐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한꺼번에 깨달음의 꽃을 활짝 피워낸 것일까. 꽃나무들은 순결과 아름다움의 화신이거나 성자인 듯하다.

  눈부시게 하얀 꽃 궁궐을 이룬 벚꽃, 매화, 목련 꽃을 바라보다가 키가 작고 꽃송이가 듬성듬성 맺힌 수양 매화에 눈이 딱 머문다. 긴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듯하고 몸매가 늘씬한 미인이다. 처음 보는 고전적인 여인이다. 머리카락을 땅에 닿을 듯 풀어 내린 여인을 홀린 듯 바라본다. 하늘로 향해 머리를 곧추 세우며 뻗어간 나무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영락없는 수양버들인데, 가지마다 듬성듬성 매화 송이를 달고 있다.
매화는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로 지조와 결백의 상징으로 알아왔지만, 수양매화를 보긴 처음이다. 매화라면 지조 높은 군자의 꽃인 양 생각해 왔다. 그런 매화가 휘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듬성듬성 맺혀 있는 것인가. 수양매화를 홀린 듯 바라보면서 우아하고 청순한 갓 서른 살 쯤의 여인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땅에 닿을 듯 축축 늘어진 실 가지 위에 피운 수양매화는 맑고 고귀한 기품을 보여준다. 땅을 향해 피는 꽃으로 제 모습을 감추는 아름다움, 겸손이 묻어 나는 꽃이다. 치렁 치렁 늘어진 초록빛 반지르르 윤이 나는 실가지들에 띄엄띄엄 꽃송이를 달아 놓았다. 한꺼번에 화들짝 피어나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다. 단아하면서 여운을 지녔다. 땅으로 주렴을 드리운 채 방안에서 울리는 가야금 음절이 띄엄띄엄 꽃으로 피어난 것일까.

  부드럽게 아래로 쭉쭉 드리운 가지의 알맞은 간격마다 꽃들이 자리 잡아 미소를 띠고 있다. 화창한 봄 날에 꽃 드레스를 입고 나선 부끄러움 머금은 날씬한 봄 처녀의 모습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가지마다 영롱한 순백의 꽃, 수양매화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은은히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수양매화는 네 가지 고귀함이 있다고 한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귀함, 어린 나무가 아니고 늙은 나무의 모습, 살찌지 않고 날씬한 모습, 활짝 핀 꽃이 아니고 오므린 꽃봉오리를 보이고 있다. 달밤이면 수양매화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향과 달빛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들어 주리라.

  수양매화는 달밤이면 주렴을 드리운 방에 앉아 임을 기다리며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뜯는 가야금의 음절이 방울방울 피운 꽃이 아닐까. 가장 여성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동양의 멋과 운치로 피워놓은 꽃일 듯싶다.
매화를 보면서 지조 높은 선비를 떠올리곤 했지만, 수양매화를 보고는 고귀하고 향기로운 여인을 만난 듯하다.
수양매화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를 견뎌내고 초록의 분수가 되어 뿜어 오른 모습이다. 섬세한 초록빛 머리카락에 듬성듬성 흰 매화를 피워 놓은 모습은 고결하고 맑은 여운을 지니고 있다. 수양버들 가지에 어찌 매화가 피어 있는 것일까. 수양버들이 여성미를 드러낸다면, 눈 속에서도 피는 매화는 지조 있는 군자에 비교되곤 하지 않았던가.

  수양버들과 매화가 만나서 한 몸이 된 나무를 눈부신 듯 바라본다. 이 땅에 존재하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은근한 여성미를 지닌 나무를 품어보는 순간이다. 수양매화가 피어서 봄 날이 더 찬란하고 눈부시다. 한 번 만이라도 만났으면 싶은 여인을 여기서 대면한다. 마음이 눈부시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양의 어여쁜 여인이 봄 맞이 산책을 하고 있다.
아침 고요 수목원에 가서 봄철에 피는 수만 가지 꽃을 보았지만, 나무 중에서도 흰 꽃을 피우는 매화, 목련 꽃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보다도 청순하고 맑은 향기로 닿아오는 동양의 고유한 미소를 지닌 수양매화와 오랫동안 눈 맞춤 했다. 고아하고 섬섬한 수양매화는 내 마음속에 피어나 가야금을 울려주고 있다.
은은한 달빛 속에 한 번이라도 수양매화 같은 여인을 만나고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절망 찾기 2025.10.10 (금)
깊숙한 절망을 가벼운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몸속 어딘가에 있을 절망을 한번 찾아보자 울컥하며 자주 발생하는 것이 기관지에 숨었을 거 같기도 하고 오래됀 위장병 모양 음흉하니 소장에 자리 잡은 거 같기도 하고 미열처럼 뜨뜻미지근 하면서 오래가는 것이 이마빡에 박혀 있는듯하고 혹시 그렇다면 수술을 해 봐야지 누가 아나 우뇌와 좌뇌 사이에 엿같이 철썩 붙어있는 그놈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오래 살아서 큰...
박락준
물아리 2025.10.10 (금)
"물아리에 우렁이 잡으러 가자!" 지금은 안 쓰지만, '물아리'는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있는 단어였다. 빗물에 의지해 벼농사를 짓던 시절, 비가 오면 논두렁 안쪽을 진흙으로 꼼꼼히 발라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었다. 그렇게 갇힌 빗물이 찰랑이는 논을 '물아리'라고 불렀다. '아리'란 순 한국말로 '물' 또는 '그릇'이란 의미가 있었다. '항아리'에서 '아리'가 그릇을 의미하듯, 논이 그릇이 되어 물을 담았으니 '물아리'인 거였다. 그런 물아리...
박정은
가을 금관 2025.10.10 (금)
1.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라 금관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나는 한 그루 황금빛 나무를 연상했었다.박물관 유리 진열대 안에 들어 있는 천년 신라 유물들은 대개 시간의 침식에 못 이겨 퀴퀴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망각 속에 덩그렇게 놓여 있었지만 금관만은 어둠 속에서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빛깔로 너무나 선연한 모습으로 살아 있어 천년 신라를 말해 주는 촛불처럼 느껴지기만 했다.나는 우두커니 이 천 년 신라의 황금빛...
정목일
불갑사의 상사화 2025.10.10 (금)
영광 불갑사에 꽃무릇이 핀다산문을 들어서자 고요한 숲길마다 붉은 물결이 밀려와 발끝에 불빛을 흩뿌린다마치 하늘까지 닿은 불길처럼온 산이 사랑의 기도로 타오른다 비 내리는 오후 법당의 기와집은 촉촉히 젖어 묵언의 수행처럼 무거운 고요를 품고 그 앞마당에선 꽃무릇이 빗방울 이마에 이고 서 있다방울방울 떨어지는 빛은 천년을 참아온 눈물 같아 오직 한 사람을 향한 기다림을 적신다 만날 수 없는 그...
조순배
코스모스에게 2025.10.03 (금)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가녀린 몸을 바람에 하늘거리며 손짓하며저편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내게 보내면서 그 바람에 몸을 싣고모든 짐을 내려놓고 나를 오라 부르고 있습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질긴 인연은 나를 꼭 붙들고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기억 뒤편을 돌아보라 하고 있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마음은 나를 놓아주었다 붙들었다 하면서 바람을 이기고서 견디며 조금만 참으라 하고...
송요상
돈의 단상 2025.10.03 (금)
세계의 돈 60%이상을 움직이는 뉴욕의 중심 맨해튼의 월스트리트는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이 곳의 큰 펀드 하나가 대한민국 모든 상장사 전체를 7번씩 사고도 남는 대규모의 자금을 굴리는가 하면 전 세계 주식시장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금융의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가장 무섭고 강력한 권력은 전쟁무기가 아닌 돈의 힘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1626년까지 이곳의 주인은 인디언들이었다. 당시 세계 무역의...
자명
   머리가 허연 사내 하나가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와 동네 골목을 산책 중이다.산책하고 싶어 한 게 개였는지 사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아지가 앞장서고 사내가 뒤를 따른다. 강아지가 길모퉁이에 멈춰 서 있다. 아랫도리를 낮추고 볼일을 보는 개를 사내가 조용히 기다려준다. 꽁초 한 개비 마음 놓고 못 버리는 인간의 거리에 천연덕스럽게 응가를? 무슨 상관이냐고, 갈 길이나 가시라고, 녀석이 흘끔 위 아래로 훑는다. 녀석이 일어선다....
최민자
외딴 섬의 꿈 2025.10.03 (금)
     여기     근심이 녹아 내리는 곳에 누어     푸른 하늘 속     물든 마음 건져내면     숲 속 나무 내음     물 가 물 비린내     만수우환 꼭 짜서     바위 위에 널어 말리면     쨍쨍한 햇살 내음      그러나     마음은      썰물에 밀려나간     갯가에 묶여 있고     모래바람 날리는...
조규남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