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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임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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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3-13 08:42

김의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기묘년 (2023년)을 맞아 새해 인사를 나누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덧 정 2월 다 가고 내일이면 춘 3월이 된다. 지난 이틀간 계속 내리던 눈이 오늘 아침도 내린다.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는 휴교 됐고 폭설 경보가 공표됐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며 옛날 어머니의 결단으로 이북에서 남한으로 탈출하던 때 생각이 났다. 나의 소년기는 6.25전쟁 (1950년 6월 25일)이 일어난 때였기에 그렇게 그립다고 할 만한 기억이 없다. 당시 아버지는 황해도 연안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고, 5남 2녀의 대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1·4 후퇴 (1951년 1월 4일) 때 아버지와 중학교 갓 입학한 형은 곧 돌아올 거라며 이남으로 떠났고, 나머지 가족은 연안에서 하룻길인 청단읍 학남리에 있는 시골 외갓집으로 피난 갔다. 피난길에서 수차 비행기 폭격이 있었으나 무사했다. 외할머니 집은 상당히 컸고 방도 여러 개 있었다. 장성한 두 외삼촌과 이모는 이미 남한으로 피신했고 누나보다 한 살 위인 이모와 나보다 한 살 위인 외삼촌이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굶주려 본 기억은 전혀 없다. 전쟁 중이어서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발이 자랐는데 신발을 못 구해서 1년 넘게 맨발로 지낸 기억이 생생하다. 집안 살림은 두 노친 네와 어린이뿐이어서 어머니 몫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외삼촌이 나를 괴롭힌 일 때문에 우시면서 외할머니께 우리가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목격했다. 농촌이기에 눈앞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나 자주 쌕쌔기 폭격기와 잠자리 비행기를 목격했고, 나 자신도 형의 친구를 따라 나무하러 갔다가 바로 눈앞에서 기관총 폭격에 맞아 형 친구가 다치는 것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해주나 개성 같은 큰 도시가 가까워서 폭격이 자주 있었던 것 같다.

  2년 반 동안 밤에는 야학교에서 공부하고, 낮에는 일손이 워낙 부족했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농사일을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어느 날부터 거의 매일 나타나던 폭격기가 사라지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갯벌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조개잡이가 허용됐다. 전쟁이 곧 끝난다고 소문이 돌았고 어머니는 어떻게 하든 이남으로 탈출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도 조개잡이를 여러 차례 가셨고 갯벌 동네에 친척이 살고 있는데 용매도를 통하여 이남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 당시 용매도는 남한 땅 이였음). 어느 날 어머니는 같이 조개잡이를 가자 시며 바구니 하나와 호미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다음 날 다른 식구들은 일상대로 밭에 일 나가고, 아기 업은 어머니와 나는 하루 종일 걸어서 저녁 무렵에 친척 집에 도착했다. 친척들은 나를 보고 장군 같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동년배보다 키가 컸고, 옆으로 퍼져 떼부짱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비로소 어머니께서 여기 온 이유가 조개잡이가 아니라 이남으로 탈출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빨갱이가 곳곳에 있으니 발각되면 우리는 죽는다고 하셨다. 조개잡이 생각에 신나 있던 나는 바짝 긴장되었다. 첫째 집을 나서 갯벌로 갈 때 우리는 절대로 한 식구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어머니는 먼저 떠나시고 나는 아기를 업고 50m 정도 떨어져서 따라오고, 누가 물으면 조개 잡으러 간다고 하라 하셨다. 둘째는 동네를 벗어나 갯벌 길을 걸을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어머니를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하셨다. 셋째 만일 일이 안 돼서 돌아오게 될 때도 한 식구라는 것이 알려지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이른 아침 앞서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갯벌 길에 이르니 잡초들이 너무 크게 자라 눈 높이에 이르고 여러 사람이 합세하니 더욱 겁이 났다. 갯벌은 물이 나가서 광활한 흑색 평야 같았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조개 사냥하고 있었다. 멀리 한 검은 군함이 보이는데 어머니께서 무리를 이탈해 그곳을 향해 걸어가시므로 곧 뒤따라갔다. 군함은 갯벌 위에 있고 한 군인이 내려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승선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 군인은 지금 썰물이니 수심이 얕아 건너갈 수 있다며 얕은 곳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건너가라고 했다. 가 봤지만 물길이 걸어갈 정도로 얕지 않았다. 다시 군함으로 돌아가 군인에게 우리는 돌아가면 죽으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고 애원하셨다. 그러는 중에 한 장교가 내려다보고 있다가 사모님이 아니시냐고 그간 얼마나 고생하셨나 하며 반갑게 맞아 주어 군함에 승선했다. 용매도에 도착하니 고향 사람도 많았고 친척들도 만났다. 아버지는 인천 송림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긴장했던 탓인지 고열로 병이 났다. 사흘 정도 쉬고 인천으로 향해 2년 6개월 만에 드디어 그립던 아버지와 형을 만났다. 곧 휴전 협정 (1953년 7월 27일)이 성립되었고 남한 땅이던 용매도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많은 고향 사람은 용매도를 통해 탈출한 사건은 우리가 마지막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굳게 믿는다. 어머니께서 조개잡이 날로 택하신 그날에 갯벌에 군함이 와 있었고, 거기서 장교가 된 아버지 제자를 만날 수 있게 한 것은 기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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