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

박병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2-02-22 09:20

박병호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열대우림 속 창문을 열자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순간 교실 미닫이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사슴 돼지 한 마리를 끌고 들어섰다. 그 녀석은 주름이 많은 회색빛 몸통에 축 처진 갈색 꼬리를 달고 있었다. 사슴을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고, 다리가 긴 멧돼지와 비슷했다.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입학 후 첫 대면 수업, 몇몇은 올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안 올지 몰라. 첫 수업 일을 내일로 아는 친구가 많을 테니까.”
이상한 돼지에 꽂혀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안 된 내가 선생님께 물었다.
“저 녀석의 이름은 뭐지요?”
"바비루사"하고 선생님이 대답했다.
“이름 없는 들꽃도 그냥 피는 꽃이 없듯이, 이 녀석도 우리 학교에 그냥 온 것이 아니란다.”
그는 꼬물꼬물한 짧은 꼬리를 살살 흔들며 교실 마루 이곳저곳을 활보했다. 가끔 멈춰 서서, 새끼를 찾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어미 멧돼지처럼 뀔 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앞발로 바닥을 툭툭 치기도 했다.
신기한 세상으로 가득 찬 책방에 빠진 아이처럼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밖으로 나가더니, 이번에는 캥거루 한 마리를 안고 들어섰다. 이 녀석은 자기 다리보다 굵고 긴 꼬리를 달고있었다.
“이 녀석 이름은~~”
묻지 않았는데도 선생님은 말하려다 말고 미소로 얼버무렸다. 선생님이 그를 바비루사 옆으로 데리고 갔다. 가자마자 그가 앞발을 바닥에 짚더니, 꼬리로 몸체를 지탱한 후 뛰어올라 두 뒷발로 바비루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프로 레슬러의 드롭킥처럼 순간적인 사건이었다. 자신이 바비루사보다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 같았다.
얼떨결에 얻어맞은 바비루사는 캥거루를 힐끗 보더니 이내 자기 갈 길을 갔다. 아파하는 기색도 없었다. 캥거루가뒷다리를 곳 세우고 우람한 근육질의 상체를 펼쳐 들고 앞발로 자기 가슴을 치면서 으르렁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바비루사의 얼굴에 상하 연타 펀치를 날렸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싶게 바비루사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했다.
두 번이나 얻어터지고도 성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 할 뿐이었다. 궁금해진 내가 선생님께 물었다.
“캥거루를 야생에서 잡아 왔어요? 바비루사는 동물원에서 데려오고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호랑이가 없는 들판에서는 멧돼지가 왕이라는데 캥거루 따위 초식동물에게 왜 가만히 맞고 있냐 이거지?”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캥거루가 뒷발을 바닥에 대고 바비루사의 등 뒤에서 올라탔다. 그러더니 앞발로는 바비루사를 껴안으며 교미 장면을 연출했다. 선생님이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저 행위는 캥거루의 성행위 자세 이긴 하지만 실제 생식기를 삽입해 성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세상을 정복했음을 알리는 행동이란다.”
선생님께 물었다.
“바비루사는 왜 싸워보지도 않고 정복당하나요?” 선생님이 답했다. “대꾸도 못 하고 납작 엎드린 것처럼 보이지? 그러나 실제 정복당했는지, 정복했는지, 아니면 둘 다 승리자인지는 더 두고 봐야 안다.”
바비루사는 여전히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에 유유히 다가가 코를 들이대고 있었고, 캥거루는 점점 야성을 잃어가며 바비루사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꽤 복잡하고 신경 쓰이는 두 녀석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우리의 동창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이 저 녀석들을 왜 데려왔고, 대체 어쩌려고 하는 건지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묻지는 않았다. 녀석들이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가 나에게 중얼거리듯 자문했다.
“한 명도 안 오는 거야?”
교실은 태풍 뒤의 평화로움으로 가득 찼고 나는 고요의 바다에 빠지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그만!”하고 소리쳤다.
정신이 바짝 든 나와 캥거루는 선생님을 바라보았고, 바비루사는 여전히 그의 호기심이 이끄는 길을 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내가 답했다. “친구들 대신에 새로운 두 녀석이 와서 예상치 못한 큰 길이 하나 놓이나 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 내일부터는 저 녀석들이 친구야. 이제 여기 학교 친구들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갑자기, 나도 몰래 소리 지를 뻔했다.
“저 혼자만요?”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술라웨시섬에서 도와줄 노인 한 분을 만나 그분과 함께 최종 목적지로 떠날 거야. 아버지께는 지난주 알려드렸는데 어제 답장이 왔고. 많은 생각 후, 아들이 인생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처럼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셨어.”
존재감이 커진 내가 선생님께 대들었다.
“성년의 문턱에 있다 해도 저에게 먼저 동의를 구했어야 옳지 않나요?”
교실을 철없이 노니는 두 녀석을 바라보며 선생님이 말했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가능성이 있다면 그 길이 어디든 꼭 가고야 말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물었다. “언제요?”
선생님이 가슴속에서 반듯이 접힌 A4 용지를 꺼냈다. 입학 지원동기였다. 선생님이 물었다.
“입학 통과 수단만은 아니겠지?”
두 녀석만 바라보며 대답이 없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 밤까지 주겠네. 가지 않겠다면 다른 학생을 선발할 거고. 하지만 나는 자네가 이 길에 적임자라고 생각하네.”
궁금증을 더 참지 못한 내가 물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요?”
언제 때렸냐 싶게 바비루사를 쫓아다니는 캥거루를 바라보며 선생님이 말했다.
“모든 걸 말해 줄 수 없는 비밀이라 자네가 확실히 가겠다고 약속하면 길과 목표를 말해주겠네. 하나 더 확인할 게 있네. 가족관이 입학 당시와 변한 것은 없는가?”
내가 되물었다.
“무슨 가족관이지요?”
선생님이 답했다.
“먹고 살 만큼의 최소한의 땅만 주어진다면 제한 없이 아이를 낳겠다고 했지?”
내가 대답했다.
“변한 것은 없지만 애를 혼자 낳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짧은 꼬리를 추켜 세우고 긴 코로 냄새를 킁킁 맡고 다니는 바비루사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거야 2차 이주민은 같은 가족관을 가진 여성, 3차는 자네와 비슷한 남성, 4차는 2차 이주민과 유사한 여성으로 보내기로 되어 있으니, 적도 발사체에서 대기권을 통과하기 위해 '엔진은 더 강하게, 로켓 중량은 더 가볍게'라는 목표보다 맘에 든 이성 친구를 만나기가 더 빠를걸세.”

결국, 학교를 떠나 집으로 가는 길과 새로 들어설 길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은 나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생육, 번성, 모두 승자’의 삼다도를 목표로 하는 섬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먼저 날아올랐다. 자신감이 커졌다. 식물과 동물이 고루 발달하여 크게 자라나 온 섬에 퍼지게 해야 하고, 입주민 모두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높은 행복감을 쌓도록 해야 하며, 동식물이 강한 유대관계를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주문이 귀에 감겨왔다.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 될 학교 기숙사에서 지도를 찾았다. 점 하나로만 보이는 동그란 그 섬은 술라웨시섬과 민다나오섬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 집시족이 땔감을 구하러 드나드는 작은 무인도지만 화산섬답게 토질은 비옥하고 풍광은 아름답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 역할이 무엇일지, 나중에 들어올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증이 커져만 가는 밤이었다. 나라에서 왜 적도 부근 바탐섬에 한 학급의 외국인 학교를 만들어 무료교육을 시켜주는지, 내가 첫 이주민으로 선발된 것이 나의 항공 우주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등등의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웠다.
이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선생님께 물었다.
“저 두 녀석이 선발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바비루사는 술라웨시에서 수컷 바비루사를 만날 것이네. 암컷은 수컷이 겪는 고통을 겪지 않지만 대신 느낄 필요는 있지. 남의 아픔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녀석들도 있기 때문에. 연간 두 마리 새끼를 낳게 하는데 도움은 되겠지.”
내가 물었다. “수컷의 고통이 암컷의 출산 고통 보다 큰가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세상 어느 수컷도 출산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아. 그러나 바비루사 수컷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수시로 절규해대니까 암컷이 자기는 특별한 복을 타고난 것으로 생각해서.....”
수컷의 고통이 무엇인지는 내가 술라웨시에서 만나게 될 바비루사 수컷의 자기 두개골로 파고드는 뿔을 보면 감을 잡을 거라고 하며 선생님은 그 고통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성년 수컷 경험이 없는 나는 단순히 결혼이 필수인 수컷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끼리의 혈투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물었다. “생육과 번성의 의무를 캥거루는 지지 않는 건지요?”
선생님은 캥거루의 역할은 수컷 바비루사가 더 생겨날 때까지 한시적이라고 했다.
내가 소리쳤다. “네?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은 암컷 바비루사는 경쟁을 거치지 않는 수컷의 구애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수컷 바비루사가 캥거루를 이겨내야만 교미라는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겠군요. 만약에 캥거루가 수컷 바비루사를 이겨버리면 캥거루와 바비루사의 이종교배가 이루어지나요?”
선생님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말을 이었다. “바비루사 암컷은 날카로운 캥거루 발톱으로도 뚫리지 않는 피부와 맷집으로 생기는 인내심으로 승리하고, 수컷은 맷집이라는 방패에 4개의 뿔이라는 창까지 갖고 있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암컷 바비루사 외에는 아무도 그를 이길 수가 없어.”
주롱 항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 전에 선생님께 물었다.
“공부는 계속할 수 있는 거지요?”
선생님이 답했다. “자네는 연소공학과 우주 발사체 분야의 인재가 될 걸세, 그 분야 최고의 선생님들이 하나하나 자네를 일대일 비대면 수업으로 이끌게 될 테니.”
내가 물었다. “2, 3, 4차로 들어올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일까요?”
선생님이 답했다. “항공 우주 분야의 떡잎들이지 않겠나? 자네가 살면서 느끼게 될 필요한 분야, 예를 들면 토양, 생물, 열대 농업, 해양생물, 화산, 적도 지리 등에서 우선순위를 정해 건의할 수는 있네.”

배가 떠날 준비를 마쳤고, 선생님은 억센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의 성공이 나라의 성공이라고 했다. 나라에서 전투기 수출품 대금으로 받은 섬을 동식물이 무성한 땅이자 제2의 고흥 나로도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나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몇십 분 만에 작은 배는 싱가폴 주롱항구에 도착했고 나와 두 녀석은 덩치에 비해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더 큰 고깃배로 옮겨타고 주롱 항구를 떠났다.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듯 나의 기분도 하늘 높이 올랐다. 배가 인도네시아 자와 해를 중간쯤 왔을 때 바비루사가 약간의 자율신경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나 제빨리 멀미약을 먹여 큰 어려움 없이 진정되었다.
한나절이 지나 배는 수라바야 항구에 도착했고 우리는 좀 작은 고깃배로 갈아탔다. 캥거루가 갈아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통에 바비루사가 바다에 빠졌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살려달라는 고함을 치는 것 외에 다른 구조 방법이 없었다. 놀란 캥거루가 껑충껑충 뛰어올라 배가 뒤집힐 뻔했다. 그러나 정박 중인 다른 배들에서 쏟아져 나온 어부들의 도움으로 죽어가는 순간 건져져 다시 출항할 수 있었다.
주롱에서 수라바야 오는 시간만큼의 또 그만큼의 시간을 항해한 끝에 북 술라웨시의 비통 항에 도착했다. 도중에 바비루사가 싼 똥이 캥거루 얼굴에 묻어 바닷물로 씻어 주는 일이 좀 힘들었지만, 폭풍우나 험한 파도 한번 만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라웨시에서 3년 전 4천여 명이 사망했다는 강진과 해일로 파괴된 토양과 건축물의 잔해가 그대로 나뒹구는 모습을 보았고, 그 순간 하늘을 나는 나의 꿈은 꿈보다 아름답지 않는 현실의 땅으로 내려앉았다.
항구 대합실에 원주민 노인이 나와 바비루사 수컷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현실의 비릿한 향내를 외면하기 위해 미지에서 온 청년에게서 자신의 지난 모습을 찾기 위해 왔다고 했다. 노인에게 채워지지 못한 빈 공간이 나로 인해 채워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노인이 나에게 오늘 밤은 비통 항에서 자고 내일 아침 칼라마 섬으로 출발할 거라고 했다. 노인이 나를 수의학 실습생으로 착각한 듯이 말했다.
“바비루사는 태어나 한두 해 만에 성숙해져 아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짝짓기 전에 수컷들의 싸움이 진행됩니다. 암컷의 임신 기간은 5, 6개월이며, 한 마리에서 두 마리의 새끼를 출산합니다.”

잠을 이루기 전에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비통 항에 잘 도착했고 수컷 바비루사도 잘 만났습니다. 두 녀석은 아직 만나게 하지 않았지만 내일 아침 세 녀석 사이에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전기를 다룰 줄 아는 노인이 현지에서 만날 바다 집시족과 함께 칼라마섬의 지열 발전 설치 작업에 참여할 거라고 합니다.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는 편지를 보낼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날 그날 일지를 쓰려고 합니다. 저의 꿈이 다시 하늘 높이 솟아오르도록 선생님의 기를 동쪽 하늘로 향하는 솜털 구름에 실어 보내 주세요.'
그 순간 적도의 밤하늘에서 허름한 숙소의 창문을 통해 달빛이 보슬비처럼 한 방울씩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coreits14@gmail.com)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돌담 2025.11.07 (금)
시멘트로 틈도 없이 매끈한건물을 짓는 현대의 우리에겐모양도 크기도 저마다 다른 돌들을하나씩 날라 와서얼기설기 쌓은 돌담이엉성해 보이지만 모두가 다른 우리 사이는그렇게 어설픈 듯 맞춰가면서천천히 시간을 내어 쌓아야지찬란한 현대 건축의 기술로는쌓아 올릴 수 없어
송무석
쉬었다 가세 2025.11.07 (금)
눈 내린 도시는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내리는 눈은 계절의 흐름을 잊지 않게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눈에 덮여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고, 햇살은 구름에 가려 흐릿한 시간 속으로 스며든다.      평일인데도 주말처럼 느슨한 오전이었다. 커피를 내리고 시아버님 방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적막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단하고 낯선 기운이 가슴을 눌렀다. 조심스레 스위치를 켰지만, 희미한...
허정희
[독자기고] 흙 2025.11.07 (금)
큰아버지 식구들이캐나다로 이민을 간다큰어머닌 눈이 빨갛다한수, 현수는얼굴이 빨갛다한수, 한수, 한수현수, 현수, 현수이름부터자꾸자꾸 멀어진다그런데  큰아버진 어딜 가셨지?고개 돌려보니공항 밖 화단에 앉아 계신다가만가만  흙을 만지고 계신다
김종순
 *사물주의 시에 대한 근원과 정의  ‘물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반응했다. 밥에게 미움을 주니 까맣게 썩고, 사랑을 주니 흰밥 그대로였다.’ 이런 파장 연구는 옛날 같으면 귀신 씻나락 까먹을 일인데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신이 창조한 생물 외에 물질도 기운과 정체성이 있다는 걸 중세 시인들의 시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인류에 기여한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려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에 근거해야 한다....
이명희
연어 2025.11.07 (금)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그 얼마 만인가거친 폭포를 뛰어 넘어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누구나 먼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누구나 가난한 사랑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그 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강 깊었다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울지 마라인생을...
정호승
마지막 정류장 2025.10.31 (금)
해 저문 골목 어귀어느 사람의 하루가 천천히 닫힌다 생(生)을 실은 버스 한 대낯선 정류장에 멈추고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를 따라앞좌석의 누군가가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여직흘러내리는 시간을 바라보며가라앉은 시간의 틈을 더듬어 본다 오래된 햇살 같은 이름 하나젖은 이불 깃에 스며든바람의 온도 창밖의 어둠 속으로사람들은 하나둘 그림자를 거두고나는 묵묵히 남은 모래알을 세고 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은빛...
임현숙
기억의 집 2025.10.31 (금)
  가을빛 향연에 이끌려 길을 나선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단풍나무 숲을 지나 산책길 끝의 공원묘지로 향한다. 캐나다의 공원묘지는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에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햇살과 잘 가꿔진 잔디와 꽃들 사이를 거닐며,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툭’ 하고 단풍잎 하나가 어깨 위로 떨어진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민정희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윤의정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