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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만나기 여섯 시간 전

줄리아 헤븐 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9-20 15:37

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대학 때 첫 미팅을 나가던 날, 이랬을까? 아니면 일대일 소개팅을 나가던 순간이 이랬을까? 둘 다 아닌 것 같다. 점심시간이 지나감과 동시에 부리나케 열어젖힌 옷장 문. 청바지에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질감의 블라우스를 입고 거울을 보니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다. 흰 바지에 감색 티셔츠를 입고 하늘색의 얇은 재킷을 걸치니 역시 내가 아는 몸이 아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의 풍성한 원피스를 걸치니 그제야 어렴풋이 익숙한 얼굴과 겹쳐진다. 챙이 넓은 모자도 꺼내 써 보고 커다란 리본이 뒤에 달린 좋아하던 모자도 바꿔 써보지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낯선 내가, 거울 안에 어색하게 서 있다. ‘후~우 살이 무던히도 쪘구나…’ 푸념을 뱉어내며 몸을 이리저리 돌아봐도 기억 속에 담겨 있는 나는 더는 없다. 오래전에 잘못 골라 들고 온 한 치수 큰 원피스가 이제야 빛을 발하니 변화를 예견한 선견지명에 탄복하며 위로를 해야 하나?  그 당시 바꾸러 가기 귀찮아 놔둔 옷이 마치 치수를 잰 듯 불룩 불거져 나온 아랫배도 덮어주니 게으름도 쓸모 있을 데가 있다. 갱년기에 들어서며 불어 가던 살이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아예 허리와 팔뚝에 자리 잡고 자석처럼 살을 불러들였다. 밴쿠버로 이사 오던 해에 구매한 6년 전의 바지는 허벅지 위로 올라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나마 그때는 살이 덜 붙었나 보다. 친구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되레 살이 빠져 걱정이 된다는데, 난 갱년기를 맞기 전까지 날씬하다 못해 말라깽이여서 살덩이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야무지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자만과 태만의 결과는 옷장 안에 가득 쌓인 몇 번 입지 못한 옷들이 증명해 준다. 살이 늘어가는 속도에 둔감했던 탓이기도 하다.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온종일 집에서 편한 옷차림으로 입맛을 감당한 것도 한 몫은 했으리라. 어찌 되었든 물방울무늬의 원피스에 내 몸이 맞춰지니 입고 나갈 옷은 자연스럽게 정해지고, 들고 나갈 가방과 신발의 색을 맞춰 놓고 나니 그때부터 설렘은 오늘 밤 열한 시에 맞춰진다.

 남자를 만나러 나간다고 거울 앞에서 꽃단장하고, 패션쇼 하듯 여러 벌의 옷을 갈아입어 보며 나를 바라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물기 젖은 머리도 말릴 새 없이 청바지 위에 커다란 티셔츠 한 장으로 털털하게 집 밖을 나섰던 나다. 그런데 나이가 무색하게 상기되고 야릇한 흥분마저 감도는 이 마음은 무엇에 비유해야 할지… . 최근에 즐겨 보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에게 빙의라도 된 걸까? 남자 주인공에게 갖던 여주인공의 마음이 내게 옮겨온 것이 맞다. 흥미로운 것은 나 스스로 이 마음이 싫지가 않다. 아니 오랜만에 갖는 또 다른 이상한 행복감이다.

 

 약속은 무려 4개월 전이었다. 처음부터 좋은 시간과 날짜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없이 거의 일방적이다. 콧대가 높고 자존심이 셌던 내가 한 풀 꺾고 설렘으로 약속을 받아냈으니 상대가 여간내기가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지난 2월 3일, 지금부터 4개월 후 6월 2일 수요일 밤 11시 잊지 말라는 메시지만 달랑 날려 주고, 나는 순종의 미를 보이듯 조용히 만날 날을 기다리며 지내왔던 터이다. 4개월 전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여섯 시간 전이니 이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를 알게 되는 사람마다 내게 하는 반응이 있다. 생각보다 숙맥이네, 연애도 많이 해 보지 못하셨지요? 겉보기와 딴 판일세. 부모님의 중매로 결혼할 만큼 난 학과 미팅도 소개팅도 관심 없던 그저 평범하고 단순한 미술학도였다. 아니 활활 타오르는 열정에 새로운 시도의 작품 세계에 빠져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지 과제가 놓이면 과 친구들보다 먼저 제출했을 만큼 의욕이 넘치는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런 나를 거울 앞에 세워 둔 사람. 삐져나온 살이 부끄럽고 수줍어 당황하게 만든 그 사람. 환갑이 넘어가도 나를 설렘으로 행복하게 하는 그 남자. 나만의 남자가 아닌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남자, 빈센트 반 고흐.

 

 지난 2월 반 고흐 전 티켓을 예매하던 당시에는 6월 2일 수요일 밤 11시 관람 티켓만 남아 있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티켓을 구매했는데, 코로나 19 백신 접종받은 사람들이 늘고 방역에 안전을 체크하며 관람객 수를 늘리고 기간을 연장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 나보다 뒤늦게 티켓을 산 사람들이 먼저 보는 경우도 생겼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화가를 한 사람 더 가까이할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은 일이기에 마치 예수님 앞에 한 사람 더 이끄는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티켓을 구매한 지 4개월 만에 드디어 Imagine Van Gogh- The Exhibition 반 고흐 전을 오늘 밤에 보러 간다. 빔프로젝터로 스크린을 비추는 방식이라는 안내 외에 나는 일부러 인터넷을 통한 어떠한 설명이나 안내조차 가까이하지 않았다. 아무런 지식 없이 온전하게 그 남자의 흔적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갤러리에 있게 되는 것도 난생처음이고, 그것도 빈센트 반 고흐를 그 시간에 만난다는 것도 정말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집을 나서기 전에 여러 벌의 옷을 꺼내 들고 입어 보며 오랜 시간 거울 앞에 서 있어 보기도 처음이다. 아마도 다녀와서 감상평은 남기지 못할 것 같다. 그건 미비한 필력이 내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니라 황홀한 작품 세계에 흠뻑 취해 꿈속을 거닐다 온 듯한 그 마음을 어찌 표현 할 수 있으랴! 처음엔 익숙한 그림에 반가워서, 그다음은 세대 차이라 명하고 싶을 만큼 엄청나고 독특한 스케일의 설치 미술처럼 명화를 감상할 수 있어서, 그로 인해 2021년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와 놀라움으로 나는 그렇게 오늘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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