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할아버지의 봄

박성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4-27 09:04

박성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느 해 봄이었다.


할아버지는 햇볕만 찾아다녔다. 안마당, 바깥마당을 오가며 먼 하늘과 산을 바라보고, 새로 소생한 나무와 풀, 꽃 따위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긴 한숨을 토했다. 그 눈빛은 너무 아득해 아무도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그랬다. 말 수도 줄고, 왕성한 식욕도 떨어지고, 웃음도 잃어갔다. 말을 건네고 맛난 음식을 해다 바쳐도 영 반응이 없다. 그저, “물 한 대접과 요강이나 갖다 놔라.” .


할아버지에겐 3가지 낙이 있었다. 1은 남에게 인정을 베푸는 일이요, 2는 소리 내어 책읽기요, 3은 식도락이다. 일제시대, 6.25, 보릿고개를 겪은 할아버지는 배곯는 거지나 땅꾼들을 보면 멀리서도어이!” 하고 불러다 엄마에게 푸짐한 밥상을 차리게 하고, 필요한 옷가지와 먹거리를 챙겨주곤 했다.


당신은 평생 남의 집 부지깽이 하나 얻어 오는 법이 없었지만, 혼자 사는 늙은이가 불쌍하고, 누가 쌀이 떨어졌다며 챙기고, 처음 보는 사람도 측은해 보이면 데려와 배를 채워줬다.


어느 날은 서울 큰아버지 집으로 가더니, 지하철 타는 법을 익히고, 버스를 타고 서울 지리와 지하철 노선을 완전히 외우신 후 에야 내려왔다. 그러곤 수시로 서울을 드나들며 서울 노인들을 사귀고, 동물원이며 공원, 고궁을 찾아다니며 어딜 갔네, 어디가 좋네 하며 보는 사람마다 구경한 걸 들려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했다.


할아버지는 80의 연세에도 꿋꿋했다. 수 십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로웠는지 어디서 마나님을 데려왔다. 효자자식들보다 등 긁어줄 사람이 낫던 모양이다. 큰아버지는 새살림 집을 얻고, 아버지는 연신 쌀과 음식을 해 날랐다. 고모와 작은아버지는 필요한 세간을 사 나르고 비위를 맞췄다. 할아버지도 새할머니가 좋아하는 일이면 신이 나서 뭐든지 다 했다. 그런데 새할머니는 1년도 못살고 무엇이 궁했는지, 그 살림을 다 팔아 치우고 달아났다. 그간 넉넉히 드린 용돈이 모자란다, 쌀 가마 갖다 준지 얼마 안 돼 쌀이 동이 났다 앙탈을 부리더니. 할아버지는 마지막 여생까지 맘 붙이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자식들 볼 면목이 없었는지 손녀인 우리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그전엔 꼭 우리 먹을 걸 한보따리 사 가지고 왔는데 그땐 그냥 빈 몸만 달랑이었다. 멋스럽던 옥색 바지저고리에 금박 물린 노란 마고자 차림이 그날따라 왜 그리 쓸쓸해 보이던지. 나는 약아빠진 서울 노인네가 한없이 미웠다.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향집 사랑방에서 노래하듯 밤낮으로 책을 읽었다. 고전부터 현대 책까지 닥치는 대로 모조리 읽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풀어놓을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였다.


난 여기서 죽고 싶구나. 죽을 때까지 너희들 하고 살련다.”


할아버지는 먼저처럼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했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맷돌질과 절구질, 떡메질을 해서 만든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우러나는 것들이다. 순두부, 두부, 콩국, 녹두전과 인절미, 아웃국과 고깃국, 그리고 갖가지 약주다. 그런 음식이 만들어지는 날에는 꼭저 건너 노인네들....” 하면 엄마는 금세 잔칫상을 차렸다.


얘야, 노인네들은 먹고 싶은 것 실컷 먹으면 건강하단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수시로 심었던 그 많은 나무도 돌보지 않고, 산으로 들로 노인정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한약재를 채집해 한의원에 내다 파는 일도 재미없어 하고 햇볕만 찾더니 그 해 겨울 자리에 누웠다. 이젠 더 이상 그 맛난 음식도, 친구도,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21살 꽃 다운 나이로 시집와 40년 할아버지를 모신 엄마는 무슨 한이 맺혔는지 한숨만 내쉬고,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며 울먹인다.


그러곤 이듬해 봄, 식목일이자 부활절인 그날 할아버지는 89세에 산속으로 가셨다. 땅 속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이 막 새싹을 내 놓을 때, 미소 띤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사람들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소나무 숲과 밤나무 숲을 지나 산새 소리 가득하고 진달래꽃 만발한 산으로 아주 가셨다.


비바람이 유난히 변덕스럽던 그해 봄날은 그날따라 바람 한 점 없이 얼마나 맑고 포근했던지. 충만한 햇살과 함께 할아버지는 좋은 자리에 묻혔다. 멀고도 깊은 산 속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49재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돌담 2025.11.07 (금)
시멘트로 틈도 없이 매끈한건물을 짓는 현대의 우리에겐모양도 크기도 저마다 다른 돌들을하나씩 날라 와서얼기설기 쌓은 돌담이엉성해 보이지만 모두가 다른 우리 사이는그렇게 어설픈 듯 맞춰가면서천천히 시간을 내어 쌓아야지찬란한 현대 건축의 기술로는쌓아 올릴 수 없어
송무석
쉬었다 가세 2025.11.07 (금)
눈 내린 도시는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내리는 눈은 계절의 흐름을 잊지 않게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눈에 덮여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고, 햇살은 구름에 가려 흐릿한 시간 속으로 스며든다.      평일인데도 주말처럼 느슨한 오전이었다. 커피를 내리고 시아버님 방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적막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단하고 낯선 기운이 가슴을 눌렀다. 조심스레 스위치를 켰지만, 희미한...
허정희
[독자기고] 흙 2025.11.07 (금)
큰아버지 식구들이캐나다로 이민을 간다큰어머닌 눈이 빨갛다한수, 현수는얼굴이 빨갛다한수, 한수, 한수현수, 현수, 현수이름부터자꾸자꾸 멀어진다그런데  큰아버진 어딜 가셨지?고개 돌려보니공항 밖 화단에 앉아 계신다가만가만  흙을 만지고 계신다
김종순
 *사물주의 시에 대한 근원과 정의  ‘물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반응했다. 밥에게 미움을 주니 까맣게 썩고, 사랑을 주니 흰밥 그대로였다.’ 이런 파장 연구는 옛날 같으면 귀신 씻나락 까먹을 일인데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신이 창조한 생물 외에 물질도 기운과 정체성이 있다는 걸 중세 시인들의 시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인류에 기여한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려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에 근거해야 한다....
이명희
연어 2025.11.07 (금)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그 얼마 만인가거친 폭포를 뛰어 넘어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누구나 먼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누구나 가난한 사랑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그 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강 깊었다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울지 마라인생을...
정호승
마지막 정류장 2025.10.31 (금)
해 저문 골목 어귀어느 사람의 하루가 천천히 닫힌다 생(生)을 실은 버스 한 대낯선 정류장에 멈추고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를 따라앞좌석의 누군가가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여직흘러내리는 시간을 바라보며가라앉은 시간의 틈을 더듬어 본다 오래된 햇살 같은 이름 하나젖은 이불 깃에 스며든바람의 온도 창밖의 어둠 속으로사람들은 하나둘 그림자를 거두고나는 묵묵히 남은 모래알을 세고 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은빛...
임현숙
기억의 집 2025.10.31 (금)
  가을빛 향연에 이끌려 길을 나선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단풍나무 숲을 지나 산책길 끝의 공원묘지로 향한다. 캐나다의 공원묘지는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에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햇살과 잘 가꿔진 잔디와 꽃들 사이를 거닐며,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툭’ 하고 단풍잎 하나가 어깨 위로 떨어진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민정희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윤의정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