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라일락 꽃, 그 남자

박성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05-18 21:16

박성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봄꽃처럼 달콤한 게 있을까.

  해맑은 날 청신한 모습으로 피어 난 연보라 빛 라일락 꽃처럼 달콤한 게 어디 있을까. 민들레 꽃씨가 새털처럼 날리고 씀바귀 꽃과 애기똥풀 꽃이 누가 더 노란가 다투고 있을 무렵, 라일락 꽃은 조용하게 피어났다.

  이맘때면 그리운 얼굴이 있다. 유난히 웃음이 하얗고 키가 늘씬한 남자다. 그 때 내 나이는 23살, 뒷동산에 바람이 참 많이 불었다. 새들은 더 푸드득푸드득 날개 짓을 했고, 연 초록 옷을 입은 나뭇가지들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얇은 원피스 차림에 얌전한 머리 가르마를 타고 발가락 나오는 샌들 신은 내 모습도 이슬에 젖거나 바람에 날려 엉망이 되었다. 속이 상했다.

  하지만 곧 분이 풀렸다. 어제까지 꼭 다물고 있던 라일락 꽃 입이 ‘키스해주세요’ 하 듯 입술을 쪽 쪽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주변은 온통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로 난 분분 난 분분했다. 우리 사무실 앞에 서있는 라일락이 제일 먼저 꽃을 피운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라일락 꽃 향기에 취했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이유는 순전히 이 라일락 때문이었다. 하는 일이라야 고작 경리와 전화 받는 일이 전부여서 따분하지만, 먼저 다니던 큰 회사 보다 재미있다. 온종일 새들이 종알거리고, 앞 다투어 피는 꽃들이 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게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먼데 하늘을 응시하건, 낮잠을 자건, 누가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직원들은 모두 건축과 설계로 현장을 뛰고 있었다.

  꽃 내에 휘감기어 잠깐 잠이 들었다. 열어놓은 문을 누군가가 똑똑 두드렸다. 언뜻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린다. "저, 안녕하세요." -... .

  얼굴이 마주치자 일순 그 남자는 좀 전의 상냥한 말투와 달리 무척 수줍어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해댔다. 저토록 하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저토록 선한 눈동자에 긴 다리를 지닐 수 있을까. 27살 그의 젊음이 햇볕에 반사된 라일락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저는, 요 위에 현장 사무실로 오늘 처음 발령 받고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탓인지, 그의 몸매에서 풋풋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성함이." -미스 박이예요. "라일락 꽃이 활짝 핀 걸 보면, 여기가 햇살이 더 잘 드나 봐요. 꽃향기가 하도 좋아서 들렀어요. 혹시 꽃말 아세요." -젊은 날의 추억이라죠. 하양, 빨강, 파랑, 연보라 중에 전 연보라색이 제일 이쁜 것 같아요. 

  "맞아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고, 원산지는 유럽 중앙아시아며, 이 꽃 앞에서는 누구나 우아하게 보이죠." 

  라일락에 해박한 걸 보면 그도 이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수수꽃다리, 리라꽃이라고도 하죠." 

  쑥스러움을 면하려고 그와 난 라일락만 응시한 채 그 꽃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는 내게 라일락 꽃 향기가 난다고 했다. 그에게서도 라일락 꽃 향기가 났다. 사방이 라일락 꽃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첫 만남 후 그는 곧잘 드나들었다. 아침 출근길에 한번, 점심나절에 한번, 퇴근할 때 한번, 그가 하얗게 웃고 갔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의 사무실 건물만 기웃기웃 했다. 퍽 마음에 끌린다. 그가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고향에 정혼한 여인이 있다. 그래서 서로가 마음에 천 하나를 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그 남자는 하루에 한 번씩만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하얀 쪽지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마음'을 받아주면 안 되겠느냐는 애틋함 담긴 그의 편지다. 객지 생활이 외로운 탓인지, 라일락꽃 탓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도 나처럼 아롱거리는 봄기운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 가득 애정을 속삭이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저 황홀난측한 날씨에 마음이 팔려 은근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랐다.

  바람이 잔잔했던 날인 것 같다. 차를 마시러 온다고 한 그를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짐짓 모른 체 했다. 그도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진짜 잠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뺨이 확 뜨겁다. 그 아찔함이란... . 가만히 있었다. 모든 게 다 라일락꽃이 조종한 거라고. 그래서 주체할 수 없었노라고.

  라일락꽃이 다 질 무렵이었다. 동네에서 그와 내가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는 이제 정말 그의 여인을 위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즐거웠어요. 행복하세요'란 쪽지만 책상에 남겨둔 채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 진실이 담겨있던 그의 눈과 그가 내민 손이 아른거린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가을이여, 와서 2026.10.23 (금)
해바라기 자궁에황혼이 발아한다 태양을 흠모하던 꽃잎이황금빛을 떨구면 초록을 잉태한 씨앗을바람에 건넬 것이다 가을이여, 내게 와서성실과 희망의 꽃말로나를다시 써 다오 소슬바람 한 줄기오래된 계절의 문을 닫으면 나도한 잎처럼 가벼워져 훌훌 먼 길을 건너리.
임현숙
마음속 회색 돌담 2026.10.23 (금)
‘오! 멋지네’   사하라 사막에서 보내온 아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정지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굽이굽이 펼쳐진 모래 결 위에서 낙타에 올라탄 채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모래바람이 사진 밖으로 불어오는 듯해 농담처럼 대꾸했다. 나도 연말에 적금 타면 낙타를 사겠노라고. 하지만 사진을 덮고 난 뒤에도 시선은 한참이나 허공을 헤맸다. 사실 원하던 것은 낙타가 아니었다. 모래 위를 걷는 ‘시간’을 사고 싶은 마음이 천천히 모래...
김아녜스
팬스타 미라클호(대한민국이 건조한 최초의 크루즈 페리선)가 드디어 지난 4월 13일 부산-오사카 구간을 취항했다. 선박 운항사인 주식회사 팬스타는 일본 오사카로 가는 새로운 뱃길이 탄생하였으며, 고급스러운 객실과 각종 편의시설, 선상에서의 즐거운 이벤트와 차별화된 서비스로 안락하고 품격 있는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배의 길이는 170m, 폭 25m 중량 약 2만 2천 톤으로 승객 545명과 화물 20피트 컨테이너 254개를 싣고...
정관일
강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물결들이 속살거리는 소리, 셀로판지처럼 물결무늬 반짝이는 소리, 모래톱을 밟고 올라오는 물 알갱이들의 심호흡 토하는 소리, 심호흡에 맞춰 은빛 페달을 밟고 강둑을 달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햇살을 차고 올라오는 물고기 떼의 은빛 아가미 팔딱거리는 소리, 소리의 입술들, 입술의 소리들이 노란 수채화로 뜬다    강가에 앉아 바람 소리 듣는다 나뭇잎들의 숨 쉬는 소리, 숨소리 뒤에 숨어 포르릉 포르릉...
이영춘
침묵 2026.10.15 (목)
그가 침묵하면  통속적 영화 대사에 익숙한 나로써는  어색해진다  왜 이리 조용하지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어찌 됐든  그의 침묵에 젓어들면  미미한 수증기가 안개가 되듯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공백이 큰 의미를 띤다  내가 할 말이 없어지고 그도 할 말이 없어지면  그런 랑데뷰가 일어날 때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재촉할 것이다  말좀해 하면서  아무 말이나...
박락준
열한 살이던 그해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는 끔찍한 소식과 함께 어머니는 밤새 미숫가루를 만들었다. 다음 날 새벽 우리는 피난 길에 올랐다. 전연 준비가 없었던 전쟁이라 우리는 허둥지둥 한강을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을지로 6가 집에서 장충단 공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쌀자루를 들고 어머니는 미숫가루와 몇 가지 실용품만 챙겨 올망졸망한 우리 5형제들을 이끌고 걸었다.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는데 걸어서 한강 쪽으로 가서...
김춘희
손 편지를 쓰면서 정보를 전하고 마음을 전하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에는 편지를 쓰는 일이 하나의 정보 전달을 위한 통신 수단이기도 했으며, 편지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책상 앞에 앉아 편지지를 고르고, 펜을 선택하고, 첫 문장을 몇 번이고 썼다가 다시 지웠다. 펜을 쥐고 편지지를 마주하던 시간에는 속도가 없었다. 생각은 천천히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은 손의 리듬에 따라 종이에 스며들었다. 잉크를 이용한...
이봉희
엄마가 가시고슬픔이 정박한 마음에 세상 문은 닫히고 청력마저 녹은 듯 칠흑 지도 위 암흑기가 펼치는가 했는데                      말도 안 돼 엄마가 없는데도 배는 왜 고파지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우적우적 돌을 씹고                 엄마가 없어도 바람은 불어오고 강물은 흘러가고                     지금도 가끔 로키 너머 저쪽...
한부연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