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광고문의
연락처: 604-877-1178

라일락 꽃, 그 남자

박성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05-18 21:16

박성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봄꽃처럼 달콤한 게 있을까.

  해맑은 날 청신한 모습으로 피어 난 연보라 빛 라일락 꽃처럼 달콤한 게 어디 있을까. 민들레 꽃씨가 새털처럼 날리고 씀바귀 꽃과 애기똥풀 꽃이 누가 더 노란가 다투고 있을 무렵, 라일락 꽃은 조용하게 피어났다.

  이맘때면 그리운 얼굴이 있다. 유난히 웃음이 하얗고 키가 늘씬한 남자다. 그 때 내 나이는 23, 뒷동산에 바람이 참 많이 불었다. 새들은 더 푸드득푸드득 날개 짓을 했고, 연 초록 옷을 입은 나뭇가지들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얇은 원피스 차림에 얌전한 머리 가르마를 타고 발가락 나오는 샌들 신은 내 모습도 이슬에 젖거나 바람에 날려 엉망이 되었다. 속이 상했다.

  하지만 곧 분이 풀렸다. 어제까지 꼭 다물고 있던 라일락 꽃 입이 ‘키스해주세요’ 하 듯 입술을 쪽 쪽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주변은 온통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로 난 분분 난 분분했다. 우리 사무실 앞에 서있는 라일락이 제일 먼저 꽃을 피운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라일락 꽃 향기에 취했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이유는 순전히 이 라일락 때문이었다. 하는 일이라야 고작 경리와 전화 받는 일이 전부여서 따분하지만, 먼저 다니던 큰 회사 보다 재미있다. 온종일 새들이 종알거리고, 앞 다투어 피는 꽃들이 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게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먼데 하늘을 응시하건, 낮잠을 자건, 누가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직원들은 모두 건축과 설계로 현장을 뛰고 있었다.

  꽃 내에 휘감기어 잠깐 잠이 들었다. 열어놓은 문을 누군가가 똑똑 두드렸다. 언뜻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린다. ", 안녕하세요." -... .

  얼굴이 마주치자 일순 그 남자는 좀 전의 상냥한 말투와 달리 무척 수줍어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해댔다. 저토록 하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저토록 선한 눈동자에 긴 다리를 지닐 수 있을까. 27살 그의 젊음이 햇볕에 반사된 라일락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저는, 요 위에 현장 사무실로 오늘 처음 발령 받고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탓인지, 그의 몸매에서 풋풋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성함이." -미스 박이예요. "라일락 꽃이 활짝 핀 걸 보면, 여기가 햇살이 더 잘 드나 봐요. 꽃향기가 하도 좋아서 들렀어요. 혹시 꽃말 아세요." -젊은 날의 추억이라죠. 하양, 빨강, 파랑, 연보라 중에 전 연보라색이 제일 이쁜 것 같아요

  "맞아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고, 원산지는 유럽 중앙아시아며, 이 꽃 앞에서는 누구나 우아하게 보이죠." 

  라일락에 해박한 걸 보면 그도 이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수수꽃다리, 리라꽃이라고도 하죠." 

  쑥스러움을 면하려고 그와 난 라일락만 응시한 채 그 꽃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는 내게 라일락 꽃 향기가 난다고 했다. 그에게서도 라일락 꽃 향기가 났다. 사방이 라일락 꽃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첫 만남 후 그는 곧잘 드나들었다. 아침 출근길에 한번, 점심나절에 한번, 퇴근할 때 한번, 그가 하얗게 웃고 갔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의 사무실 건물만 기웃기웃 했다. 퍽 마음에 끌린다. 그가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고향에 정혼한 여인이 있다. 그래서 서로가 마음에 천 하나를 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그 남자는 하루에 한 번씩만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하얀 쪽지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마음'을 받아주면 안 되겠느냐는 애틋함 담긴 그의 편지다. 객지 생활이 외로운 탓인지, 라일락꽃 탓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도 나처럼 아롱거리는 봄기운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 가득 애정을 속삭이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저 황홀난측한 날씨에 마음이 팔려 은근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랐다.

  바람이 잔잔했던 날인 것 같다. 차를 마시러 온다고 한 그를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짐짓 모른 체 했다. 그도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진짜 잠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뺨이 확 뜨겁다. 그 아찔함이란... . 가만히 있었다. 모든 게 다 라일락꽃이 조종한 거라고. 그래서 주체할 수 없었노라고.

  라일락꽃이 다 질 무렵이었다. 동네에서 그와 내가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는 이제 정말 그의 여인을 위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즐거웠어요. 행복하세요'란 쪽지만 책상에 남겨둔 채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 진실이 담겨있던 그의 눈과 그가 내민 손이 아른거린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시월의 바다 2026.02.09 (월)
친구여 시월의 바다를 보러 가요에메랄드 번지는 바닷물 따라흰 돗이 기울듯 서툰 배는먼 항로를 찾아가고끝없는 햇살에 수평선이 눈부실 때젊은 꿈이 아직 말 못 하고 서 있지만해변의 잔돌들은 세월을 견디고여물어 가요겨울의 바다는 차가웁게 모두를 멀리하겠지요파도 속 산호는 빛을 잃고고기 때는 검은 투망을 피해 몰려다니고남겨진 조개들이 모래밭을 찾아 긴 행렬을 짓고검푸른 바위는 바다를 움켜쥐려고 울부짓을 거에요고동 소리를 담은...
김석봉
아버지를 찾아서 2026.02.09 (월)
  내 얼굴에도 인생의 흔적을 품은 고랑이 패기 시작하고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리게 되었다. 너 같은 딸을 낳아보라 하시던 엄마의 울분도 어느덧 내 것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50살이 넘어서야 집어 들었던 책이 있는데, 제목이 [아버지를 찾아서]이다. 아버지 없이 어린시절을 살아온 나였다. 그랬던 내가 저자를 따라 아버지를 찾아 나선 여정에 동행하였다. 나의 아버지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일곱 살 때 우리 엄마와 아빠는...
김보배아이
말은 입체다 2026.02.09 (월)
  어느 환자를 두고,"암입니다. 6개월 생존율이 5%이고 현재로선 치료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 A와,"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현대 의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치료 약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저와 함께 버텨봅시다."라고 말하는 의사 B가 있을 때, 환자는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을까.남편 중에도 A타입과 B타입이 있다. 아내가 저녁밥을 먹은 뒤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할 때,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많이 먹을 때...
정성화
     세 갈래 길     삼거리 이정표를 만나거든     세상살이의 이치여,     지나온 길 뒤 돌아 보게 하고     잠겨서 보이지 않는 길,     찾아야 할 희망을 가늠하며     마음 걸터 앉아 숨 고르는     쉼터 인 것을 알려 주구려.      삶이 한번이라도     등골이 휘는 세상살이를 일러     우연이라고 위로 해 주지 않듯   ...
조규남
“아빠, 뭐 보고 있어?”이른 아침, 아빠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풀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잠이 덜 깬 눈으로 쪼르르 달려가 아빠 등에 기대며 물었어요.“아고, 우리 호야 깼구나. 더 자지 않고?”“어? 텃밭 풀이 다 어디 갔어요?”내 키보다 훌쩍 자란 풀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우와! 텃밭에 풀이 다 없어져 보기 좋아요. 어젯밤에 우렁각시가 다녀갔나 봐?”“우렁각시? 하하 맞네. 착한 우렁각시.”아빠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정순
바람 2026.01.30 (금)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만나서 마음속으로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 진다. 바람을 쐬러 산책길에 나선다. 머리카락, 피부에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가슴을 열고 하늘을 본다.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감촉을 느끼게 한다. 하루에 한 번씩 바깥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어야 생기가 날 듯하여, 오후가 되면 산책길에 나선다. ‘바람을 쐬는 일’은 무슨 일인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스스로 물어보기도 한다.운동장을 몇 바퀴 걸으면 마음속으로...
정목일
이민 삼십 년 2026.01.30 (금)
이민자 낯선 땅에 뿌리내리려 할 때마다사람들은 내게 보이지 않는 눈금을 들이민다고향이라는 눈금, 학교라는 치수그들은 나의 과거를 재는 것이 아니라자신들이 밟고 올라설 사다리의 높이를 가늠하는 중이다골목마다 교회 숲을 이루는 도시절 향기는 댓돌처럼 차고 문지방처럼 높다교회의 찬송은 매끄러운 비단처럼 반짝인다사람들은 나를 그 화려한 그물 속으로 초대한다거절의 벽을 허물고 들어가 앉은 식탁 위에서나는 비로소 이방인의 허기를...
전재민
산에는산길에는해 오르고 달 오르는 길이 새롭다 산은철따라 외로움이 피고 지는꽃들의 터전 그리움이 울어넘는산새들의 고향이다 미움도 사랑으로 옷을 갈아 입는아라리 산길 산에 오르면제 마음 봄이되어발걸음이 가볍다 산은오를수록 제 안의 저를 알아가게 하는무언의 스승 그 산길에 오르며 배움이 깊다
유병옥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