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박정희 시대'에 이룬 것은 무엇인가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5-30 14:36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5)
'박정희 시대'는 1961년 5·16에서부터 1979년 10·26까지, 18년 5개월 동안이다.

그 시대에 우리는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그룹에서 중진국 선두의 자리까지로 끌어 올렸다.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89달러로, 세계 125개 국가 중 101위였으나 18년 5개월이 지난 1979년에는 1510달러, 세계 49위의 중진국 선두에 다다랐다. 당시 김일성의 북한은 1인당 GNP 350달러 내외로 세계 59위 중진국 수준이었으나 1979년 말에는 세계 120위의 최빈국 그룹으로 전락했다.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 학생의거에 의해 붕괴 되었다. 이후 장면 민주당 정부가 출범했으나 데모 만능, 실업 사태, 학생들의 무조건적인 남북합작운동, 농촌의 피폐와 가난의 악순환 등으로 우리사회는 격심한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하루 수차례씩 거리를 메운 데모가 매일 지속되었고 장면 총리는 데모대 면담 때문에 국정을 볼 수 없었다. 학생 데모대가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하여 국회의장석을 유린하는 무법사태가 벌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곽상훈 국회의장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 정도였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했으나 국가지도력은 부재 상태였다.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기운이 각계각층에 팽배했다.  

이러한 때 5·16이 일어났다. 윤보선 대통령마저 '올 것이 왔다'고 평했다. 박정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건설을 하려고 해도 자원과 자본, 기술이 없었고 국민적 희망이나 의욕도 없었다. 한일회담을 타결하여 받아낸 청구권 자금으로 국가재건을 위한 ‘씨드 머니’로 했고 상업차관과 재정차관을 과감히 도입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와중에 북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다.  

1967년 1월 19일 우리 해군경비정이 북한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사건에 이어 1968년 김신조 등 북한특공부대 31명이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3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고 7월 임자도 간첩사건, 8월 서귀포 무장간첩선 침투(12명 사살) 사건, 11월 2일 강원도 울진․삼척지역에 북한 무장공비 100여 명 침투, 다음 날인 11월 3일 소대단위 북괴군 중동부전선 침투 등 동시 다발적인 북한의 무력도발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1968년 한 해 동안 356건에 달하는 북한의 무력도발과 간첩침투 사건이 일어났고 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9년 들어서도 3월 강원도 주문진 무장공비 출현, 4월 15일 미 공군 EC121 정보기 격추, 5월 김규남 국회의원 간첩사건, 12월 KAL기(승객 승무원 51명) 납북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격열비도 간첩 침투, 6월 군자만 침투 간첩선 나포 및 동해 간첩선 침투, 해군방송선 피격피랍, 6월 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등 북한의 무력도발이 한층 빈번했고 더욱 가중되었다.  

김일성의 남침 야욕이 점점 노골화 되어가고 있었고 한반도 전쟁 재발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0년 2월 18일 아시아지역 분쟁에 대하여 △미국 지상군의 불개입 △당사국 자체 방위 원칙을 내용으로 하는 '괌독트린'을 발표한 데 이어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1971년 철수통보를 한국정부에 전달해 왔다. 그리고 이 철수계획은 1971년 3월에 이루어졌고 판문점 구역을 제외한 휴전선 155마일 전 구간 방어경비를 한국군이 전담하게 되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1969년부터 불원간 닥쳐올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자주국방 태세의 강화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대미 안보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펼쳤다. M16 소총 공장 차관 합의를 본 것은 1970년 7월 25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1970년 8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애그뉴 부통령을 맞이하여 점심도 거른 채 무려 6시간 동안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찬 한미안보협의를 계속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단기간에 걸친 주한미군의 철수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유혹과 오판 유발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4만 명 이상의 한국군 월남파병, 주둔 △김일성의 도발 증대와 준전시 하에 있는 한국의 입장 △동북아와 세계평화를 위한 군사전략 등에 비추어 한국에 대한 예외조치와 선 한국군 현대화 조치를 논리 정연하게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한·미는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 철수와 1개 사단 계속 잔류를 합의했으나 애그뉴 부통령은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5년 내에 주한미군 모두를 철수 한다고 발표했다.  

이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위험과 약소국의 비애를 통감해야 했다. “자주 국방만이 우리가 살길이다”라고 그는 비장한 독백을 했다.  

“내 집에 불이 났을 경우 먼저 온 가족이 달려들어 전심전력으로 불을 끄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웃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고 이웃들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도와주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도 가족들이 팔짱 끼고 불구경만 한다든지, 성의 없이 한다면 어느 누가 도와주겠는가.”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안보외교를 끈질기게 계속토록 하여 △주한 미7사단 1만8000 병력 철수 △주한 미 2사단의 후방배치 △15억 달러의 한국군 현대화 계획(이 중 49% 한국부담) △한미 외무+국방장관 연례안보협의회 개최 등의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박 대통령은 또한 포커스레티나 훈련, 프리덤 불트 작전, 한미연합방어 및 합동 공수기동훈련의 강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전쟁을 각오한 단호한 응징과 결의 표명, 북한의 남침 시 7일 섬멸 격퇴 작전과 박 대통령의 서울 사수 천명, 향토예비군 및 민방위 훈련강화, 군 사기진작과 국민단결 촉구, 국력 집중과 배양의 가속화 등 북한에 대한 군사적, 비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면서 김일성의 전쟁 의지를 견제했다.

이와는 별도로 박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전쟁 방지 및 평화 유지를 위한 다각적인 평화노력을 지속했다. 1970년 8·15 경축사를 통해 △무력도발의 방지 △인위적 장벽의 단계적 철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간의 체제경쟁(전쟁대신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하고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여건을 만들 것인가를 경쟁하자는 것) 등을 제의 선언했다. 1971년 6월 비무장지대의 평화이용제의를 했으나 북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 제의와 상호 불간섭과 평화공존, 신뢰 회복, 단계적 교류확대, 평화통일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이 1972년에 있었고 1973년에는 대한민국의 대 공산권 문호 개방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제의한 6·23 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1974년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박 대통령은 △상호 무력 불사용 △상호 내정불간섭 △휴전협정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평양과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열렸으나 북한은 이 기간에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 1974년 11월 제1 땅굴, 1975년 3월 제2 땅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비행기 전차 대포 등 공격용 전력을 휴전선 가까이 남진 배치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1·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현충문 폭파사건에 이어 세 번째로 1974년 8·15 경축기념식장에서 박 대통령을 저격하고 영부인 육영수여사 서거의 폭거를 저질렀다. 이는 박 대통령이 적화통일의 장애이며 박 대통령만 없으면 적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집념의 표시라 하겠다. 박 대통령이 김일성의 의도와 전략을 꿰뚫어 보면서 전쟁도발의 명분과 허점, 틈새를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외교적 군사적 선제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월남 패망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면서 도미노 현상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극에 달하고 있는 김일성의 호전성과 야만성, 잔인성을 만천하에 들어냈다. 이 사건은 판문점 미군 관할지역의 시계 청소를 위해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하던 미군을 북괴군이 공격, 도끼로 찍어 살해한 사건이다.

박 대통령은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고 규탄했고 미군 대신 한국군이 절단적업에 나서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다. 한미 양국은 전쟁을 각오하고 항공모함, B52, F111 전투기, 미 해병 상륙대 등 아시아에 배치된 전력을 총동원한 가운데 한국군 특전단 장병들이 들어가서 그 나무를 절단했다.  

결국 김일성은 꼬리를 내리고 사과와 유감 표명을 했다. 이때 한미 양국은 북괴군의 저항이 있을 경우 이를 초토화시키고 연백평야를 넘어 38선까지 진격하여 황해도 일대를 탈환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었다.  

한편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남북 간 월등한 국력의 차이가 벌어져 김일성이 감히 전쟁 엄두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라 보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건설을 서둘렀다. 국력을 총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배양을 가속화 했다. 1976년을 고비로 박 대통령의 예상은 현실로 나타났고 남북의 국력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 체제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1961년 대한민국 GNP 89달러, 북한 GNP 350달러 선에서 출발하여 15년 만에 대역전을 이룬 역사적 쾌거였다.  

<다음호에 계속>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박정희 시대' 18년 5개월 동안에 대한민국은 굶주림과 가난에서 해방되었고 전통적인 농경 국가에서 중화학공업 수출국으로 발전했다.분단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자원과 자본, 기술도 없이 오로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고속도로와...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9)
새마을운동은 오늘날 '박정희 시대'의 상징 브랜드가 되어 농촌진흥과 경제개발을 지향하고 있는 세계 모든 나라에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국가발전 모델이 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8)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1961년 5·16을 결행한 박정희는 10일 만인 5월 25일 우리나라 농가의 80%가 해당되는 농가고리채 정리를...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7)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한국군 월남(베트남) 파병(1964년)에 대한 후속조치로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경제원조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존슨...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6)
박정희 시대에 이룬 성취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이다. 그것은 5000년 민족사상 가장 거창한 토목사업이며 외부 도움 없이 우리 자본과 기술, 그리고 우리의...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5)
'박정희 시대'는 1961년 5·16에서부터 1979년 10·26까지, 18년 5개월 동안이다.그 시대에 우리는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4)
김정염 대통령비서실장은 인재를 모으고 키워 국가 동량으로 배출했다. 행정부처의 유능한 엘리트들을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발탁했다.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통하여 국정에...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3)
김정염은 일제시대 충남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에 있는 오이다고등상업학교에 유학했다 3학년 재학 중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히로시마교육대에서 훈련 중 1945년...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2)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서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증대를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케 된다. 이산가족 찾기...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1)
◇박종규와 홍종철의 갈등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임명되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에 박종규...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0)
육영수 여사 묘비 건립 작업이 끝났을 무렵인 1974년 10월 초순 나는 김정염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나에게 비서실장 보좌관을 하라고 말했다. 전혀 의외였다. 나는...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9)
나는 공보비서관 피명 3개월 만에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조절위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맞이했다.남북적십자 회담은 흥분과 환호 속에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고...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8)
지난 글에 이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에피소드 몇 토막을 더 소개한다. 1968년 후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육 여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대통령 가족들만의 자리로 단독 초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만 근영 근혜 학생들은 먼저 식사를 뚝딱...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7)
나는 1960년 겨울 <대한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한 이래, 사회부(경찰서) 경제부(한국은행)를 거쳐 5·16 후 최고회의를 출입했다가 민정이양 뒤 제6대 국회를 출입하면서 야당 담당 취재...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6)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었다. 그 금고는 내가 6년간 관리했다. 금고 안에는 비서실장의 판공비도 있었다. 나는 분기별이나 두...
압박해오는 국내외 정세
■ 한미 관계는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 악화 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에 따른 한국군의 방위력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
‘청와대 셰퍼드’ 차지철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8·15 경축식장에서 일본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총격으로 육영수 여사는 서거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해임됐고 후임에 차지철이 임명됐다.당초 박정희...
■ 총성이 멎은 후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일어났던 그 광란의 총성이 멎고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현장에서 빠져 나갔다.혼자 남은 김계원은 유혈이 낭자한...
朴대통령 통치관련 비밀자료 보일러 속으로
■ “우리는 곡(哭) 할 때만 들어오느냐”10월 27일 새벽 4시20분이 지나면서 김종필등 20여명의 친인척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장관들이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대접견실의 빈소 마련...
내가 겪은 10.26 사건
권숙정씨는... 1960년부터 72년까지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이어 72년부터 79년까지는 대통령공보비서관,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유신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