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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너서클의 암투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5-02 13:53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1)

◇박종규와 홍종철의 갈등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임명되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에 박종규 최고회의 경호실장(소령 예편 후)이, 그리고 대통령 경호실 차장에 최고회의 위원이며 군정시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던 홍종철 대령이 각각 임명 되었다.

박종규와 홍종철 사이에선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들렸고 상호 알력과 갈등이 심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종철 차장이 문공부 장관으로 전보되었다. 홍 장관은 정부의 홍보업무와 언론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장관 취임인사차 기자실에 들렀을 때 일화다. 그때는 중앙청 기자실에서 총리실, 문공부, 외무부 관계 기사를 모두 커버할 때였다. 각 언론사에서 2~3명씩 출입했고 신문사 외에 방송사와 통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기자들과 일일이 첫인사를 나눌 때였다. 통신사 기자의 차례가 되었다. “○○통신사에서 나오는 아무개입니다”라고 자기소개가 되었다. 인사를 받은 홍 장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통신사 기자가 왜 여기에 나오느냐”고 반문, 좌중을 긴장시켰다. 통신사 기자를 전기통신회사의 기술자로 착각해 일어난 해프닝이다.

제3공화국 언론정책에 대한 기자들의 집중적인 질문공세가 계속되자 홍 장관은 “살카쥬(살려 달라)”를 연발함으로서 첫 상견례를 치렀다. 각 언론사 사장을 예방하는 자리에서도 “살카쥬”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래서 ‘살카쥬’가 그의 애칭이 되었다.

공직기강 확립과 부패방지를 위해 대통령직속으로 사정특별보좌관제가 설치되고 그 첫 번째 보좌관으로 홍 장관이 임명되었다. 외국차관 사업이 한창이었고 청와대 비서실장 이하 수석 비서관들이 모두 대형 미제 승용차를 각자 요령껏 장만하여 타던 시절이었다.

홍 특보가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리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렸다. 박 실장이 그 사실을 알고 홍 특보를 비서실장실로 불러 언쟁을 벌렸다. 급기야 박 실장의 권총이 발사됐고 홍 특보가 발등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홍 특보가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두 사람 간의 불상사는 청와대 기자실에까지 퍼졌다. 그 후 치질 때문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여름 어느 날 홍종철 특보가 팔당댐 아래 미사리에서 밤낚시를 하던 중 의문의 실종 사고를 당했다. 박 경호실장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확인불명이고 다만 그때 박 실장이 홍 특보의 시신 수색을 진두지휘하는 등 수고를 아까지 않았다.

◇김형욱의 반역과 죽음

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9년 3선개헌 후 경질됐다. 그는 육사 8기 육군 중령으로 5·16에 가담한 바 있다.
 
김종필(JP) 직계였던 그는 김종필의 추천으로 정보부장이 되어 충성맹세까지 했으나 취임 후 곧바로 김종필 탄압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그는 JP에 대한 24시간 감시를 했다. 전화 도청은 물론 집 앞 골목길에 군고구마 장사를 가장한 정보요원이 상주하여 모든 출입자를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여야를 불문하고 가혹한 정치사찰과 탄압을 자행했으며 경제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청구권 자금과 상업차관 도입이 한창일 때인 1960년대 정치자금 모금을 둘러싸고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형욱 정보부장, 장기영 부총리 등과 알력이 심했다.

부총리 사무실을 밤중에 뒤졌는가 하면 김성곤과는 내기 골프 끝에 말썽이 생기자 정보부에 보관중인 그의 좌익 활동 기록을 보내 혼비백산케 하고 거액의 돈을 받아냈다. 야당의 김영삼에게는 초산 테러를 자행,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JP 직계인 김용태에게는 이른바 ‘복지회 사건’을 무리하게 만들어 정치적 거세를 했다. 김용태의 부인도 정보부에 끌려가서 치도곤을 치르고 낙태까지 했다. 김형욱은 3선개헌 작업이 진행 중인 어느 날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개헌에 반대 입장에 섰던 김용태에게 권총 협박을 했으며 김 의원도 위축되지 않고 쏠 테면 쏴라 하고 대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락 실장이 만류하여 더 이상 분란이 확대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역시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육사 8기 동기생이며 황해도 동향 출신인 오학진 신윤창 등에게 권총을 들이대면서 협박하기도 했다.

그는 정보부장 퇴임 후 1971년 전국구 의원으로 제8대 국회에 진출했을 때 국회 구내 이발소에서 머리를 만지던 김용태를 찾아가 큰절을 하고 땅바닥에 꿇어 앉아 용서를 빌었다. 그의 신분이 국회의원이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외감과 보복의 공포심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그는 미화 700만 달러를 미국에 옮겨놓았고 그 돈으로 몇 년 동안 호화 방탕 생활을 했다.

그는 1977년 6월 하순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 대한 반역적인 증언을 했다. 증언에 앞서 중앙정보부와 공화당 국회의원 등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익에 반하는 증언 만류를 했지만 끝내 조국과 섬기던 대통령에게 배신과 반역의 칼을 꽂았다.

그는 술과 카지노 등 방탕 생활로 돈이 궁해지자 회고록 집필을 미끼로 200만 달러를 요구하는 흥정을 걸어왔다. 회고록 원고와 200만 달러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정보부가 만류와 회유를 끈질기게 했으나 응할 듯, 응할 듯하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

‘절친’이던 혁명주체 동기생이 미국까지 갔으나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군의 선배이며 고향 선배인 민병권 의원이 미국 뉴욕에서 만나 회고록 출판 중지와 박 대통령의 신변안전보장 메시지를 전하고 귀국 종용을 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패가망신의 길로 질주했다.

그 후 그는 정보부의 유인공작에 걸려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국제 살인 청부조직에 의해 사료 공장에서 살해 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이후락의 부침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떨쳤던 인물은 단연 이후락이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창설 멤버였다. 이승만 정권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냈고 민주당 정부 때에는 장면 총리 직속 정보분석실인 79부대(그의 군번이 79번임)를 창설, 운영했던 정보통이며 정일권과 함께 대표적인 친미 인사였다.

5·16 후 한때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서 영자신문사 사장으로 잠깐 있다가 최고회의 공보실장에 발탁되어 군정 2년 동안 파란 많던 정국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변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통령비서실장에 취임, '박 대통령 입안의 혀, 박 대통령의 제갈량'으로 불리며 꾀보·모사·책사로 1960년대 권좌를 주름잡았다.

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각하, 저는 생각이 너무 앞서서 미처 말이 따라 나오질 못해 말을 더듬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영리 명석함을 말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이후락은 내 의중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내 생각을 앞서는 생각을 한다”고 평했다.

1969년 10월, 3선개헌 후 6년 만에 퇴임, 주일한국대사로 전보됐던 그는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결정(1970년 10월)에 따라 중앙정보부장에서 1년 만에 퇴임한 김계원의 후임으로 1970년 12월 말 정보부장에 취임, 1년 만에 다시 권좌로 복귀했다.

이후락은 정보부장 취임 4개월 뒤에 실시된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와 한 달 뒤의 제8대 국회의원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어 10월 2일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 국회통과에 따른 항명주동자 길재호와 김성곤 및 그 추종 의원들을 정보부에 강제 연행, 가혹한 곤욕과 수모를 가하고 국회의원 사퇴와 정계은퇴를 강요하여 60년대 정·재계를 주름잡던 4인방 권력체제를 일거에 궤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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