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특별기고]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5)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3-20 10:07

압박해오는 국내외 정세
■ 한미 관계는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 악화 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에 따른 한국군의 방위력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 증강계획을 합의 추진했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였다. 뿐만 아니라 KIST(현 KAIST의 모체)와 구미공업학교 설립 지원을 약속, 실행했다.

이처럼 한국과 미국은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최상의 밀월관계를 지속했다. 그러나 카터 정부 출범 후 한미 관계는 냉각되기 시작, 급기야는 최악의 갈등 관계로 치달았다. 1977년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한국 정부와 박 대통령을 맹비난하기까지 했다.

남베트남(월남) 패망 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도미노 현상의 불안이 고조되었고 북한의 무력시위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북한 인민군의 공군, 전차부대, 포병부대 등이 휴전선 가까이로 전진 배치되었으며 각종 도발이 기승을 부렸다.

1974년 북한 함정이 백령도 근해 상에서 우리의 어선들을 납치, 침몰시켰다. 우리 해군 초계정이 피격, 침몰된 것도 이때였다. 땅굴이 발견되었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도 발생했다. 이러한 때에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발표되었고 미국 정부의 유신 반대와 인권 압력은 더욱 심해졌다.

이와 같은 미국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미 의회와 정부 및 언론 등에 로비를 벌였고 급기야 박동선 불법 로비사건이 터졌다. 미국의 청와대 도청 사건은 또 하나의 불편한 관계로 작용했다. 카터의 철군 압박과 인권 압력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거칠어졌다.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한 새로운 무기체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고 핵 개발도 유력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것은 1978년 11월이었다. 한반도 평화유지에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했다.

1979년 6월 19일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박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 방한 공항 영접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참모들이 강권해 공항에 나섰으나 끝내 탐탁해하지는 못했다. 카터 대통령도 영접 행사가 끝나자마자 미군 헬기를 타고 동두천 미군부대로 가서 거기서 1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한-미 정상회담에 임했다.

박 대통령은 철군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실무자 합의를 무시한 채 치밀한 사전 준비를 해 휴전선 지도까지 보이면서 2시간 동안 점심도 거르고 철군 불가의 당위성을 설득했다. 카터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인사와 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만나 그들의 일방적인 하소연과 불만을 경청했고 그들에게 고무와 격려의 메시지를 주었다.

한편에서 카터 미국 정부는 의회 일부 반한 세력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다각적인 파상공세를 계속했다. 미국 의회에는 프레이저 청문회 등 반한 무드가 고조된 반면 친한국 의원들의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다.

미 국무성의 하비브 차관은 한국정부의 유신체제와 인권탄압이 국기(國基)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함병춘 주미 한국 대사에게 망명을 권유했다. 박 대통령은 함 대사의 이러한 보고를 받고 대노했다. 함 대사는 자신에 대한 하비브 차관의 망명 종용 사실을 공개 비난하면서 미국 정부에 항의했다.

미국 정부의 대한국 정책노선은 미국 주요 언론 논조에 반영돼 한국 비판과 반한 무드 조성을 주도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정책 노선이 한국주재 미국 CIA(중앙정보부) 지부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시 미국 CIA 서울지부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정기적인 주례 회동을 통해 시국 사태를 협의하고 한미 간 현안 문제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 이 같은 주례회 동의 반복을 통한 세뇌 가능성과 미국의 잘못된 메시지에 대한 오해, 그리고 국내 정치 정세와 소요 사태 등에 대한 확대 해석과 오판 등이 박 대통령 시해의 범의(犯意) 조성에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 유신 선포후 들끓었던 한국 정세

1972년 10월, 유신 선포가 있었다. 그 해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 적십자 회담 서울개최, 본격적인 남북교류와 대결이 현실화 되었다. 북한의 강력한 군사력 우위와 김일성 유일체제에 대결하기 위한 강력한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유신의 명분이었다. 휴전 이래 김신조 등 무장특공대의 청와대 습격사건, KAL기 납치,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및 EC121 정보수집항공기 피격 침몰, 간첩과 무장 공비의 대량 침투 등 북한의 군사도발은 증강일로였다.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오글 목사 등 외국인을 포함한 국내 종교인들의 인권운동과 반체제 활동, 공장 여공들에 대한 의식화 활동, 야당 의원의 극단 언행(성남의 산모가 먹을 것이 없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삶아먹었다는 김한수 야당 의원의 본회의 발언, 김대중의 예비군 폐지, 남북교류, 중립국론 등) 등이 선을 넘는 상태였다.

이에 대항해 박 대통령은 유신체제 선포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여기에는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배양을 가속화함으로서 남북대결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유신 선포 8년 동안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며 중화학 공업을 건설했다.

그 대신 의회 활동은 위축되었고 정치는 실종됐다. 야당과 재야 및 학생, 종교계의 반정부 반체제 활동은 더욱 거세졌다. 1978년 12월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68석, 야당인 신민당 61석, 무소속 22석이 되어 사실상 여당이 패배한 결과가 되었다.

야당인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정부가 바랐던 이철승이 패배하고 김영삼이 당 총재로 당선되어 극단적인 대 정부 강경 노선으로 치달았다.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공 200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하여 농성하였는데 경찰의 강제해산 도중 1명이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YH무역은 동일방직과 더불어 내실이 착실하고 사내 복지가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업체였다. 그런데 도시산업선교회가 침투, 여공들을 의식화하고 처우 개선과 복지 확대 요구를 내세우며 연일 시위를 했다. 결국 두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

나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 자료를 보았다. 자료에 의하면 도시산업선교회는 영등포에 본부를 두고 구로공단 주변의 열악한 여공들의 환경에 침투하여 인권 세뇌와 권리투쟁 시위를 사주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노동투쟁, 거리투쟁을 격화하여 이를 보도한 자료들을 수집,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시사업선교회 세계 본부에 보내서 활동보고를 하고 그에 따른 활동비를 지원 받았다. 10년여 동안 당시 돈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수령했다는 자료였다.

한편 초강경 노선의 김영삼은 미국이 박정희 정부의 대한민국을 더 이상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뉴욕타임스>와 했다. 여야는 사대주의의 표본이라고 격분 대소동이 벌어졌다. 급기야 김영삼은 의원직제명을 당하게 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원 총사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공화당에서는 일괄 반려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뒤늦게 선별사퇴수리론이 나오면서 야당은 더욱 격양되었다. 앞서 밝혔듯 이 선별수리론은 강경론을 내세웠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밀어붙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부산대학교에서 제일 먼저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다음날 시민 시위 사태로 번졌다. 이어 마산으로 번져 이른바 부마민주항쟁으로 확대 발전했다. 계엄령과 위수령이 내려지고 군부대가 진주하는 과정에서 10·26이 발생했다. 격동의 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자주국방을 위한 새로운 무기체계 개발과 유신시대는 마감되고 새로운 혼미와 갈등의 ‘신군부와 삼김의 시대’가 열렸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박정희 시대' 18년 5개월 동안에 대한민국은 굶주림과 가난에서 해방되었고 전통적인 농경 국가에서 중화학공업 수출국으로 발전했다.분단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자원과 자본, 기술도 없이 오로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고속도로와...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9)
새마을운동은 오늘날 '박정희 시대'의 상징 브랜드가 되어 농촌진흥과 경제개발을 지향하고 있는 세계 모든 나라에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국가발전 모델이 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8)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1961년 5·16을 결행한 박정희는 10일 만인 5월 25일 우리나라 농가의 80%가 해당되는 농가고리채 정리를...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7)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한국군 월남(베트남) 파병(1964년)에 대한 후속조치로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경제원조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존슨...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6)
박정희 시대에 이룬 성취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이다. 그것은 5000년 민족사상 가장 거창한 토목사업이며 외부 도움 없이 우리 자본과 기술, 그리고 우리의...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5)
'박정희 시대'는 1961년 5·16에서부터 1979년 10·26까지, 18년 5개월 동안이다.그 시대에 우리는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4)
김정염 대통령비서실장은 인재를 모으고 키워 국가 동량으로 배출했다. 행정부처의 유능한 엘리트들을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발탁했다.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통하여 국정에...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3)
김정염은 일제시대 충남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에 있는 오이다고등상업학교에 유학했다 3학년 재학 중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히로시마교육대에서 훈련 중 1945년...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2)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서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증대를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케 된다. 이산가족 찾기...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1)
◇박종규와 홍종철의 갈등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임명되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에 박종규...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0)
육영수 여사 묘비 건립 작업이 끝났을 무렵인 1974년 10월 초순 나는 김정염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나에게 비서실장 보좌관을 하라고 말했다. 전혀 의외였다. 나는...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9)
나는 공보비서관 피명 3개월 만에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조절위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맞이했다.남북적십자 회담은 흥분과 환호 속에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고...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8)
지난 글에 이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에피소드 몇 토막을 더 소개한다. 1968년 후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육 여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대통령 가족들만의 자리로 단독 초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만 근영 근혜 학생들은 먼저 식사를 뚝딱...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7)
나는 1960년 겨울 <대한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한 이래, 사회부(경찰서) 경제부(한국은행)를 거쳐 5·16 후 최고회의를 출입했다가 민정이양 뒤 제6대 국회를 출입하면서 야당 담당 취재...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6)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었다. 그 금고는 내가 6년간 관리했다. 금고 안에는 비서실장의 판공비도 있었다. 나는 분기별이나 두...
압박해오는 국내외 정세
■ 한미 관계는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 악화 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에 따른 한국군의 방위력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
‘청와대 셰퍼드’ 차지철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8·15 경축식장에서 일본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총격으로 육영수 여사는 서거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해임됐고 후임에 차지철이 임명됐다.당초 박정희...
■ 총성이 멎은 후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일어났던 그 광란의 총성이 멎고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현장에서 빠져 나갔다.혼자 남은 김계원은 유혈이 낭자한...
朴대통령 통치관련 비밀자료 보일러 속으로
■ “우리는 곡(哭) 할 때만 들어오느냐”10월 27일 새벽 4시20분이 지나면서 김종필등 20여명의 친인척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장관들이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대접견실의 빈소 마련...
내가 겪은 10.26 사건
권숙정씨는... 1960년부터 72년까지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이어 72년부터 79년까지는 대통령공보비서관,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유신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