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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 이후락의 몰락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5-09 10:44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2)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서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증대를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케 된다.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8월 30일~9월 2일)과 서울(9월 18일~9월 20일),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회의(1차 10월 12일 판문점 자유의 집, 2차 11월 2일 평양)가 각각 개최되었다.

1969년 말부터 세계정세는 엄혹한 동서냉전체제에서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세계적으로 데땅트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서독 브란트수상의 적극적인 동방정책으로 서독과 소련 간에 평화 및 경제협력조약이 성립되었고 동.서독간 상호인정(1민족 2국가)과 UN동시가입, 상호 인적 물적 교류 등 평화와 협력증진을 위한 회담이 양독 총리 사이에 진행되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미국. 중국간 핑퐁외교가 시작되었고 키신저 미백아관 안보보좌관의 극비 방중에 이은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방문 발표와 중국의UN 가입 등이 71년에 실현되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세기적 뉴스들이 연이어 발표되었고 세계는 급속도로 긴장완화와 화해 협력의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71년의 남북 국력을 비교하면 경제는 대한민국이 약간 앞섰으나 군사력에 있어서는 4대 군사노선(전국토의 요새화, 전인민의 무장화, 군장비의 현대화 등) 을 추구해온 북한이 월등히 우세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도발과 위협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변화에 즈음하여 박대통령은 한반도의 전쟁예방과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남북관계 정립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따라 대북관계 책임을 맡고 있는 이부장이 69년 말 취임하

면서부터 북한내부를 "면밀히 들여다보면서"(본인의 표현임) 남북간 긴장완화와 화해협력 방안을 탐색한 것은 현명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이부장은 진행 중에 있던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의 일원인 정홍진 정보부국장으로 하여금 북한대표단의 실력자 김덕현(노동당 간부)에게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를 제의토록 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었고 이후락정보부장 대 김영주(김일성동생, 노동당조직지도부장 겸 정치위원) 회담 개최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부장은 72년 1월 정국장을 단신 방북케하여 이+김 회담의 절차와 사전준비 작업에 관해 북측과 협의토록 했다. 이어 이부장은 72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극비 방북하여 이+김회담에 이어 김일성 면담을 통해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하였다.

5월 2일 오전 적진을 향해 출발하는 이부장에 대해 박대통령은 공산당을 잡는 책임자이며 대한민국 정보의 총책인 그의 신변안전 문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주한 미국 CIA 책임자에게 방북 사실을 알리고 긴밀한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공조체제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부장도 인질로 잡힐 경우 자결할 각오로 청산가리를 준비해 가지고 간다는 사실을 박대통령에게 밝혔다. 지금이야 종교계, 사회연대, 학생 등 누구나 합법 불법 간에 쉽게 남북을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극열한 체제대결의 세대인지라 공무일지라도 보내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 목숨을 건 비장한 각오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한반도의 긴장완화, 전쟁방지, 평화정착, 화해협력증진을 위한 박대통령과 이부장의 굳은 의지와 투철한 애국심이 크게 돋보이는 역사적 장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과의 면담은 방북 마지막 날인 5월 4일까지 이루어지지 않다가 자정을 넘기고 5월 5일 새벽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부장이 이때 주머니에 넣고 있던 청산가리를 만지작거린 탓에 이것이 녹아서 낭패를 보았다는 얘기를 그가 경기도 광주 도요장에 은거할 때 지인들에게 밝혔다는 것. 나는 이 얘기를 그 도요장에 자주 출입했던 내 친구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5월 29일 이부장 방북에 대한 답방형식으로 북한의 박성철부수상등 3명이 극비로 박대통령을 예방하였고 박대통령은 이들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당시 정부의 통일정책은 △6·25 남북전쟁의 적대관계 해소와 상호신뢰구축 △휴·정전 체제로부터 평화 정착 △가능한 분야로부터 교류협력의 증진 △남북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를 통한 통일이라는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야당 당수가 된 김대중(DJ)은 정부의 통일정책과는 전혀 다른 미국·일본·중국·소련의 4대국 안보보장론, 남북한 UN 동시가입, 연방제 통일론 등을 주장하여 정부를 당혹케 했다.

남북대화의 성공적인 진전을 위해 올인하고 있던 이후락 정보부장으로서는 김일성 유일체제와 고려연방제 통일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내부결속과 체제강화가 긴요했다. 그런 그가 10월 17일 유신을 주도했다. 계획과 세부작업을 정보부에서 했다.

남북회담은 1973년 8월 23일 북측의 대화중단 발표가 있기까지 국민과 여론은 남북대치 상항에서 곧 기시적인 그 무엇이 이루어지리라는 성급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 기대와 흥분만큼 이후락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주변으로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몰렸다. 권력서열 2인자의 위상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혔다.

그는 협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고구려를 방문하여 후에 신라통일의 주역이 된 김춘추에 비유되는 얘기가 요로에 유포됐다. 성급한 후계자설도 나왔다. 이후락으로서는 지극히 조심하고 몸을 낮추어야 할 계제였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유혁인 정무수석 등 대통령 참모들에 대한 우호적인 사적 만남도 몇 차례 있었다. 2인자에 후계자설까지 나오는 그에게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이와 관련, 김성진도 이후락이 사무실로 오라고해서 갔더니 돈을 주기에 받아가지고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하니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다음날 수표 봉투를 내놓고 보고를 드렸다. 대통령께서 듣고 그냥 가져가서 쓰라고 말했다고 10·26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애기한 바 있다.

이후락이 연루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숙청사건이 1973년 초 발생했다. 윤필용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재임 중으로 박 대통령의 총애와 신뢰를 받던 군내 최고 실세였다. 그는 유신 선포 후 유정회 국회의원 선발 시 군 출신의 대거 발탁을 이부장에게 건의했고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맡은 일이나 잘하라”고 언짢아했다는 것...

그는 이후락 정보부장을 형님이라 불렀고 친밀하게 지냈다. 유신 초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 주최 만찬에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 김시진 비서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노쇠 노망 얘기와 이후락 후계론이 설왕설래 되었는데 윤필용이 “다음에는 형님이 해야 합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달쯤 뒤 박 대통령의 뉴코리아 골프 라운딩에 참석한 신 사장이 그늘집에서 쉬는 동안 “각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주변 측근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추궁 끝에 신 사장은 만찬 때 있었던 대화내용을 자백했다.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막강한 병력과 전력을 가지고 수도서울의 경비와 청와대 외곽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군부실력자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보와 권력에 대하여 2인자 후계자설까지 도는 정보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하여 권력의 속성과 분할통제 용인의 달인인 박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 두 사람에 대한 신임은 거두어지고 거세수순 을 밟게 된 것이다. 박대통령은 강찬성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윤필용 수방사령관을 숙청했으며 박대통령의 심기를 가장 잘 헤아린 박종규경호실장은 이부장을 정치적으로 견제 압박했다.

윤필용은 1973년 4월 28일 군사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숙청됐다. 윤필용과 가까웠던 김연준 대한일보사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고(후에 무혐의로 석방), 내가 재직했던 <대한일보>도 폐간됐다.

윤필용의 숙청 과정에서 이후락 정보부장도 함께 해임될 뻔했으나 두 권력기관장을 동시 해임하는 것이 정권안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김정염 청와대 비서실장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이후락은 위기를 모면했다. 윤필용은 먼 뒷날 박 대통령이 자기를 친 것은 2인자 후계자설 등이 도는 이후락에 대해 "까불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락은 불안 초조했고 박 대통령의 신임회복에 급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무렵, 10월 유신 선포 직전 방일했던 DJ가 일본에 망명하여 미국을 오가면서 극열한 반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에 추대되었고 망명정부를 세워 그 수반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의 회담계획을 추진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박 대통령의 심기가 편할 수가 없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런 상황에서 정보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이부장을 압박했다. 코너에 몰린 그는 8월 8일 DJ 납치를 결행했다. 최고 권력자의 신임 회복을 위한 외곬의 의지가 맹목적 충성으로 표출되었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본인의 파멸은 물론 조총련 소속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여사 서거의 비극을 초래하게 됐다. 그날 공보비서실은 김성진 대변인 주재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DJ 납치 외신전문이 들어왔다. 김 대변인이 그 쪽지를 들고 곧바로 김 비서실장에게 알렸고 이어 박 대통령께 보고됐다.

박 대통령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난감해 하면서 △일본 우익 과격분자의 소행 △재일 거류민단 과격분자 소행 △정보부 공작 △DJ 자작극, 이렇게 네 가지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어떤 경우든 DJ에게 신체적 위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부장은 자신의 지시로 진행된 DJ 납치 사건에 대해 5일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서울에 데리고 와서야 보고했다.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정부는 김종필 국무총리(JP)를 진사(까닭을 밝히며 사과) 사절로 파견하기로 했다. 김 총리는 다나카(田中) 일본 수상을 관저로 예방하고 진사함으로써 한일 경색국면이 풀렸다. 이 과정에서 홍경모 KBS 사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NHK 사장을 움직여 수상 관저 예방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이부장은 정보부국장의 민간인에 대한 월권 독직사건과 관련하여 박 대통령의 직접 국문을 당하고 여러 관련자를 해직하는 사태를 겪었다. 결국 그 해(1973년) 말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10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10·26 사건을 맞이했다.

그는 박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공백기인 어느 날 갑자기 공화당 당사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열고 느닷없이 JP 후계자 불가론을 주장, 정가에 큰 충격을 불러 오기도 했다. 부정부패 당사자로 지목되자 떡고물론을 주장하여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이후락의 DJ 납치와 관련하여 후일 JP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저질러 박대통령도 어떻게 손 쓸 수 없게 함으로서 공동운명체화하려 했던 꾀였다고 평한 바 있다.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권력상층부 이너서클 간의 알륵과 견제 및 충
성경쟁이 빚어낸 과잉충성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편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경기도 광주에 도요(도자기 만드는) 시설을 마련하고 철저한 은둔생활을 했다. DJ의 대통령 당선 후 고향 친구이며 DJ의 측근이던 최영근을 앞세워 DJ를 예방 진사했다.

이때 이후락이 많은 재산을 헌납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DJ 재임 중 그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보복 없이 이례적으로 관대하게 넘어갔음은 정치보복 근절 차원에서 다행이라 하겠다. 그의 말년 생활이 곤궁했다는 얘기를 그의 광
주도요를 출입했던 지인들로부터 들었다.
 

권력무상,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
(위의 기사 중 일부는 김정염 회고록을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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