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특별기고] 출입기자에서 비서관으로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4-11 12:55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8)
지난 글에 이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에피소드 몇 토막을 더 소개한다.
 

1968년 후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육 여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대통령 가족들만의 자리로 단독 초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만 근영 근혜 학생들은 먼저 식사를 뚝딱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 내외분과 나, 셋만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단은 소박했다. 나물무침 몇 가지와 된장찌개, 생선구이, 막걸리가 전부였다. 나는 어릴 때 먹었던 비름나물 무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청와대 식탁에 어떻게 이런 나물이 나옵니까.”

박 대통령께서 자세히 설명했다.

“내가 소학교 다닐 때다. 몇 십리 길 학교를 다녀서 오후에 집에 도착할 때에는 배가 고파 허기가 졌다. 급히 부엌으로 들어가면 밥은 없고 어머님이 이 비름나물을 된장에 무쳐 바가지에 담아 부뚜막에 놓고 들일을 나가셨다. 나는 이것을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먹고 허기를 채웠다.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청와대 채전에 조금 심어 생각날 때 가끔 먹는다.”

나도 6.25동란 이후 시골에서 된장에 무친 이 나물을 많이 먹었다. 그날 나는 대접과 고추장, 참기름을 더 부탁해 여러 나물들로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는 두 분의 눈길이 부드럽게 느껴졌고 따뜻한 정이 내 가슴에 와닿았다. 다음날 나는 이 비름나물 얘기를 기자실에 전파했고 김종신 비서관이 그의 저서에 인용했다.

1970년 초가을 무렵 나는 청와대 기자실에 있다가 육 여사의 부름을 받고 본관 영부인접견실에서 뵈었다. 이런저런 얘기도중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인 근혜 큰영애의 얘기를 한 뒤 내 의견을 하문하셨다.

“근혜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됐는데 대통령 가족 입장에서 이것을 받아야 할지 다른 학생에게 양보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장학금은 공부를 잘한 모범학생에게 주는 상이고 명예입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고 더욱이 다른 학생에게 양보할 성질의 것도 아닌 줄 압니다. 일단 장학금은 그대로 받도록 하시고 그 돈의 열 배쯤의 장학금을 학교에 기부 하시면 더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처리된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또 한 번은 육 여사가 근혜 근영 두 영애의 성격에 대해 말씀한 적이 있다.

“작은아이(근영)는 활달한 편이지만 큰아이(근혜)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큰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고 마음이 놓인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어느 집의 누구는 신랑감으로 좋다더라' 하면서 시장 아들, 장관 아들 등 서너 명을 거론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을 가진 보통 엄마의 모습이었다.

박근혜 큰영애의 결혼과 관련, 나는 1984년경 한 사립대학 설립자로부터 자기 아들과의 간곡한 혼담 희망 제의를 전달한 바 있다. 그러자 박근혜 큰영애는 아버님의 기념사업과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 만드는 유지를 계승 실현하는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나는 이 뜻을 그 설립자에게 전달했으며 그는 “기념사업에 자기도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며 아쉬워했다.

1969년 3선개헌을 앞두고 박 대통령께서 청와대기자단과 오찬을 함께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 무력도발 위협의 고조, 경제건설 등 국가보위와 부국강병을 위한 3선 개헌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나를 지목하면서 “권 기자는 3선개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시면 되겠습니다”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1971년 말, <조선일보> 김윤환, <동양통신> 문태갑 등 선배 기자들과 함께 청와대 출입기자를 마감하고 각기 내근 데스크로 승진했다. 박 대통령은 연말연시가 끝난 1월 하순경 청와대 출입을 그만두게 된 우리들을 위하여 전별 만찬을 베풀어주셨다. 김정염 비서실장, 김성진 대변인도 동석했다.
 

만찬이 끝나고 전별금과 선물로 만년필 세트를 받았다. 송별만찬을 끝내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박 대통령이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면서 “이 친구, 권 기자 출세 좀 시킬 수 없나”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다. 나를 포함해 김 비서실장, 김 대변인 모두 흘려들었다. 어느 누구도 주의하여 듣지 않은 것이다.

이 때 내가 받은 전별금 봉투는 빈 봉투였다. 대통령이 봉투를 만들면서 내용물 넣는 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며칠 뒤 나는 새 전별금 봉투를 전해 받았는데 '지난번에 빈 봉투를 주어서 미안하게 되었다'라는 추신까지 들어있었다. 색다른 기념물이 생긴 셈이다.

박 대통령 전별 만찬에 앞서 나는 육영수 여사의 위로와 선물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정부에 들어와서 일하라”는 육 여사의 권유를 받았다. 나는 그 후에도 몇 차례 육여사의 전화를 받은 바 있다.

1972년 3월 5일경 신문사에서 석간 마감을 끝내고 있는데 김성진 대변인이 급히 만나자고 해 사무실로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내일부터 당장 공보비서관실로 출근하여 근무하시오”라고 느닷없이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내일부터 당장 청와대로 출근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회사에 사표처리를 해야 하고 또 공무원 임용이 되려면 신원조회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하지 않겠느냐. 며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고려대와 언론계 선배로서 내가 청와대 출입기자 때 공보 비서관으로 피명, 홍보와 취재관계로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나는 청와대 출입 5년을 마감하고 내근으로 들어왔고 그는 대변인으로 승진했다.

그 무렵부터 정부는 경제부처의 시책업무 홍보 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변인제를 신설하고 그 대상자를 언론계로부터 스카우트했다. 그때 김 대변인은 경제부처 대변인 자리를 나에게 제의 한바 있는데 1차 사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른 경제부처의 대변인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또 사양했다.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다. 김 대변인의 내용 설명인즉 아래와 같다. 박 대통령과 김 대변인의 대화다.

“권숙정 기자의 자리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경제부처 등 몇 군데 알아보고 있습니다.”

“공보비서관 자리가 비어 있지 않는가. 그 자리로 발령 내라.”

김 대변인은 나에게 “그러니 내일 당장 출근하고 신원조회 등 임용절차는 근무하면서 하라. 회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라”고 말해 나는 꼼짝없이 다음날 청와대 공보비서관(2급갑)으로 출근했다.

김 대변인은 나에게 공보비서관 제의를 하는 자리에서 “진작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하면서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고 처리하게 됐다고 송구해 했다. 박 대통령은 공보비서관 한 자리가 공석 중에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한 아무개 공보비서관이 강원도 파로호 근처에 땅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개발하여 방갈로 여러 채를 짓고 낚시꾼들에게 임대하는 영업을 했다. 이 일대가 군 작전지 역임에 따라 군으로부터 건축허가 사전 동의를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군단장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그 김 아무개 군단장이 육사 2기, 박 대통령과 동기생이었다. 그는 서울에 출장 나왔다가 박 대통령의 골프 초대를 받고 라운딩 하던 중 전혀 고의 없이 “한 비서관의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골프를 마친 박 대통령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무슨 일인지 사실 확인을 지시했다. 박 실장의 사실 확인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은 “청와대는 돈벌이 하는 곳이 아니다. 장사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 실장은 그날로 그 비서관을 면직 처리토록 했다. 청와대 비서실의 기강이 이렇게 엄정했다. 공석이 된 그 자리가 비어 있다가 내 자리로 된 것이다.

나는 공보비서관(대통령 스피치라이터) 2년 7개월 동안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고심했다. 연설문은 기승전결(起承傳結)이 맞아야하고 정확한 메시지 전달과 이를 위한 정확한 용어 선택이 요체다.

더욱이 대통령의 연설문은 정확한 메시지 외에 당시로서는 국민 계도적인 내용의 필요성이 요구됐던 시대였다. 정부 시책과 국정운영을 대통령이 앞장서 강력히 이끌고 추진했던 때였다. 연설 횟수도 많았다. 대통령의 연설은 곧 국민에 대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따라서 대통령의 연설문은 간결 정확하면서 알기 쉽고 힘이 꽉 차있어야 했다.

나는 이러한 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대통령 연설문은 그의 생각과 그의 할 말을 정확히 다듬어 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수준의 생각과 그의 언어를 찾아야 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8·15 경축사와 육군사관학교 유시 때에는 북한에 대한 경고, 제의, 국민에 대한 촉구 등 국가 보위와 안보에 관한 대통령의 결의와 지침 등을 담았다.  

유신 때는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국력배양의 가속화’ 등이 강조 되었고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태 때에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단호한 연설이 김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미친개…’라는 대목은 박 대통령이 점잖은 표현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직접 써넣은 것으로 김 대변인 이하 스피치 라이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박정희 시대' 18년 5개월 동안에 대한민국은 굶주림과 가난에서 해방되었고 전통적인 농경 국가에서 중화학공업 수출국으로 발전했다.분단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자원과 자본, 기술도 없이 오로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고속도로와...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9)
새마을운동은 오늘날 '박정희 시대'의 상징 브랜드가 되어 농촌진흥과 경제개발을 지향하고 있는 세계 모든 나라에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국가발전 모델이 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8)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1961년 5·16을 결행한 박정희는 10일 만인 5월 25일 우리나라 농가의 80%가 해당되는 농가고리채 정리를...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7)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한국군 월남(베트남) 파병(1964년)에 대한 후속조치로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경제원조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존슨...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6)
박정희 시대에 이룬 성취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이다. 그것은 5000년 민족사상 가장 거창한 토목사업이며 외부 도움 없이 우리 자본과 기술, 그리고 우리의...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5)
'박정희 시대'는 1961년 5·16에서부터 1979년 10·26까지, 18년 5개월 동안이다.그 시대에 우리는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4)
김정염 대통령비서실장은 인재를 모으고 키워 국가 동량으로 배출했다. 행정부처의 유능한 엘리트들을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발탁했다.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통하여 국정에...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3)
김정염은 일제시대 충남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에 있는 오이다고등상업학교에 유학했다 3학년 재학 중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히로시마교육대에서 훈련 중 1945년...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2)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서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증대를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케 된다. 이산가족 찾기...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1)
◇박종규와 홍종철의 갈등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임명되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에 박종규...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0)
육영수 여사 묘비 건립 작업이 끝났을 무렵인 1974년 10월 초순 나는 김정염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나에게 비서실장 보좌관을 하라고 말했다. 전혀 의외였다. 나는...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9)
나는 공보비서관 피명 3개월 만에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조절위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맞이했다.남북적십자 회담은 흥분과 환호 속에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고...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8)
지난 글에 이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에피소드 몇 토막을 더 소개한다. 1968년 후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육 여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대통령 가족들만의 자리로 단독 초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만 근영 근혜 학생들은 먼저 식사를 뚝딱...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7)
나는 1960년 겨울 <대한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한 이래, 사회부(경찰서) 경제부(한국은행)를 거쳐 5·16 후 최고회의를 출입했다가 민정이양 뒤 제6대 국회를 출입하면서 야당 담당 취재...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6)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었다. 그 금고는 내가 6년간 관리했다. 금고 안에는 비서실장의 판공비도 있었다. 나는 분기별이나 두...
압박해오는 국내외 정세
■ 한미 관계는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 악화 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에 따른 한국군의 방위력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
‘청와대 셰퍼드’ 차지철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8·15 경축식장에서 일본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총격으로 육영수 여사는 서거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해임됐고 후임에 차지철이 임명됐다.당초 박정희...
■ 총성이 멎은 후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일어났던 그 광란의 총성이 멎고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현장에서 빠져 나갔다.혼자 남은 김계원은 유혈이 낭자한...
朴대통령 통치관련 비밀자료 보일러 속으로
■ “우리는 곡(哭) 할 때만 들어오느냐”10월 27일 새벽 4시20분이 지나면서 김종필등 20여명의 친인척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장관들이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대접견실의 빈소 마련...
내가 겪은 10.26 사건
권숙정씨는... 1960년부터 72년까지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이어 72년부터 79년까지는 대통령공보비서관,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유신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