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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사 황선의 고발 문학: 지방 진압군 수령들의 추태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8-29 11:24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3)
정가놈을 잡을 때 함양의 금군 장교 박정신(朴挺身)또한 죽을 힘을 다해 힘을 합쳐 잡았는데, 정빈주는 총도 있고 칼도 있으므로 도적의 무리를 죽여 없앨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나, 이 역적놈들은 다른 놈들과는 갈라 반드시 사로잡아 조정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들 장교들은 체포하는 과정에서 칼을 맞아 상처도 입고, 혹은 뭉둥이를 맞는 등,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생포한 포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곤양군수는 공공연하게 두 역적놈을 좌수의 아들에게 내주어 그 사사로운 원수를 갚게 하였으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나머지 포로들은 또 진주 진영 이석복이 모조리 베어 죽였으니 처음 의도와 완전히 어긋나게 된 낭패를 야기하였습니다.

거창 좌수 이술원은 역적의 무리가 본읍의 군사를 장악하여 귀순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신법'(新法)이라 일컫고는 머리를  베고 그 면상을 세로로 다시 가르니 곧 죽었으며(이 끔찍한 집도를 담당한 사람은 거창읍의 한 백정이었는데, 몇년이 흐른후 잡혀 사형을 당함), 그의 첩 김동일(金同日)은 자결하였습니다.역적중에서 그 후임으로 차출된 김학령(金鶴齡)은 따라가지 않으려고 도망쳤으며, 적진이 함양으로 잠시 이동한 사이 향중에서 다시 또 그 후임으로 차출된 신명익(愼溟翊)은 그들이 함양에서 돌아온 뒤, 말을 듣지 않는다하여 곤장 29대를 쳐버려 그 목숨이 오늘 내일 끊어지려 합니다.

거창의 그들이 임명한 수령은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 역적들이 고제로 진을  옮겨가자 관가로 들어가 비로소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 이들을 독려하여 적들을 추격할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정빈주 등이 진술한 공초에 이르길 '이웅보, 정희량 나숭곤 등 20여명을 자기가 적진속에서 사로잡은 정황이 명명백백하고 움직인 지점도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바이므로 속일 수 없다고 하며, 곤양곤수 우하형이 진친 곳은 적진에서 10리 남짓 떨어졋고. 진주 영장 이석복이 결진한 곳은 우하형의 진에서 뒤로 다시 10리 남짓 떨어진 곳이니 처음부터 적과 교전한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석복의 장계는 '군마를 거느리고 성초역의 동쪽에서 우하형을 뒤쫓아 곧장 성초역의 서쪽으로 진군하여 앞뒤로 협공을 가하자 적들이 진퇴양난에 빠졌고, 이에 적을 따랐던 장졸의 무리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적을 결박해와 항복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정빈주의 자술서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또한 금오진 절제사 박필건과 독용진 절제사 이보혁의 보고서 내용도 이석복의 장계와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이석복이 협격했다는 말은 허무맹랑합니다. 생포한 역적들을 중도에서 가로채 버린 정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웅보등이 어떤 대역죄인입니까? 이미 생포했다면 마땅히 서울로 압송하여야 하는데도, 한갓 공명심에서 무모하게 적의 머리 베는 일만 주도하였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도리에 어긋나다 아니할 수 없으며, 이런 나라의 역적을 거창 좌수의 아들에게 던져주어 사사로이 원수갚게 허용하였으니 고약한 일입니다.

우병사 이시번은 이석복과 한 통속이 되어 군사를 모아 성문을 닫고는 반란이 발생한 뒤로 촉석문 밖의 일을 살피지 않은 것이 열흘이나 되었으니, 토벌의 대임을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습니다.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병영에서 70리 떨어진 삼가현에 군사를 정돈하여 죽치며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파진하여 돌아왔으니, 그 관망만 했던 정상을 신이 전후의 장계에서 이미 피력한 바 있습니다.이는 이시번의 장계를 보더라도 바야흐로 일이 급박해진 뒤에도 여전히 군사를 출동하는 일을 멀리 중앙의 묘당에서 결재해 달라고 청하였으니 본디 역적을 칠 뜻이 없슴을 이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단 한오라기의 기강만 있었더라도 이 무리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한심한 사람들을 중벌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인심을 바로 세울 수 없으니 이시번 이석복의 죄상을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소서.

상주영장 한속(韓束)은 신이 재삼 재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도를 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중진을 가볍게 떠날 수 없다는 핑계를 장황하게 보고하더니, 이윽고 진군의 길이 멀어 양초 보급량 부족을 들먹여 신으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는 시간을 벌어 지체하더니 엄중한 말로 꾸짖어 재촉한 후에야 비로소 늑장을 부리며 행군하고 가는 곳마다 머물러 겨우 지례현에 도착하더니 조금도 전진할 뜻이 없이 뭉기적거리다 파진하고 돌아왔으니 군중에 의기있는 사졸들이 팔을 걷어부치며 통분해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죄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처결케하소서.

안동영장 김정상(金鼎相)은 군사를 거느려 출동하게 하였더니 이웃 지경인 의성에 당도한 뒤에 신의 감영에 여쭐 일이 있다고 핑계대곤 행군한지 사흘이 지나도록 의성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곧 행군에 문제가 있다며 적괴의 토벌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파병하여 그의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초계 군수 정양빈은 좌방장으로 임명하여 이웃 고을 군사를 거느려 출동하게 하였는데 허둥지둥 겁만 집어먹고 한결같이 뒤로 물러서는 일만 일삼아 병부를 발송하여 장차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한 연후에야 겨우 한 고을 군사를 거느려 성주진으로 달려갔으며,합천을 칠 때에는 혹은 길을 나누어 진군시키기도 하고, 요충에 진을 쳐 파수하게 하기도 했는데, 줄곧 머리를 흔들며 다만 성주군의 후미에만 쓸데 없이 붙어 있었을 따름이라 그 꼬락서니가  역겨웠습니다. 안음의 전 현감 오수욱을 어제 비로소 잡아왔는데, 삼가의 전 현감 이정수도 그 죄를 물을 때 달리 다룰 수 없어 똑 같이 잡아들였습니다.

오수욱은 역적놈이 본현의 옛 고을에서 처음 기병했을 때 그 수효가 몇명 되지도 않았는데도, 자신이 고을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생각은 아니하고 칼을 찬 역적 한 사람만 보고서도 허둥지둥 달아나 피하는 동안 적들이 세를 불려 인근 고을을 연이어 함락시키게 하였으며, 이정수는 적도가 합천을 함락시킨 뒤 진주영의 지시로 군병을 관아의 문앞에 모으기는 했어도, 적병이 오지도 않았는데도, 한갓 헛소문만 듣고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 본 고을의 좌수가 군사를 거느려 도적에게 투항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연을 각별히 엄중하게 따져 조목 조목 밝힌후 각기 20대의 곤장을 쳐 방면할 계획으로 있음을 보고드립니다.

이상이 황선의 유서가 되어버린 장계 내용이다. 어쩌면 저리도 치밀하고 자상하게 사리를 밝혀 무신란 최종 진압작전인 거창 전투 전개 과정을 기록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더구나 꼬랑지 내리고 어떻게 하면 전투를 피해볼까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지방 수령들의 행태를 폭로한 장면은 문학성마저 돋보이는 문장력이 압권이다. 더구나 한문으로 된 원문을 읽으면 그 감칠 맛이 사마천 필치에 못지 않아 감탄할 뿐이다. 참으로 영명한 경상감사 황선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의 혁혁한 수고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공신책록에 들지 못하는 비운을 맞았지만 , 정조 초기에 감명을 받은 정조 임금이 그가 감사로 있었던 대구 감영앞 네거리에 그의 공을 기리는 평영남비를 세워 황선의 공적을 기렸다.

나는 그가 감사로로서 직분을 완벽하게 수행한 무신란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영조는 이와같이 영명한 신하가 있었기에 무신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정희량 반군에 맞서 제대로 그 책임을 다한 지방 수령은 성주 목사 이보혁, 선산 부사 박필건, 그리고 경상감사 황선 뿐 나머지는 모두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겁쟁이들 뿐이다.그나마 사나이로서 배알이 있어 보이는 우하형 곤양군수는 공과 사의 구분도 못하고 생포한 정희량과 나숭곤을 이우방이 사사로이 원수갚는 제물로 처형하게 허용했고, 나머지 전쟁포로들도 무참하게 학살한 이석복에게 그들을 인계한 장본인이니 한심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모두 조선 500년의 무관을 경시한 문약에 흐른 결과이다. 일본은 전국 시대 이후 그들의 지배계층인 사대부가 공맹만 옹알거리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칼찬 사무라이 선비 중심으로 움직인 나라다....이들을 중심으로 근대화를 이루고 아시아의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으니 양국의 역사 발전의 재미있는 비교라 아니 할 수 없다.(계속)


<▲안의읍에서 바라본 황석산성이 있는 가파른 절벽이 보인다. 천혜의 요새이다. 성이 함락된 것도 김해부사 백사림이란 자가 왜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다는 배신의 비극이 있는 곳, 안의 사람들은 황석산의 장렬한 순국을  위대한 정신적 유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마사다같은 곳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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