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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찬 선비 남명 조식의 사상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5-29 14:46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0)
유안음옥산동(遊安陰玉山洞)                             안의 화림동 계곡을 거닐며

백석운천면(白石雲千面)                  하얀 너럭 바위들은 천가지 구름의 얼굴이요,
청라직만기(靑蘿織萬機)                  푸른 수풀 덩굴 어우러짐은 만개의 베틀이 짜놓은 듯
막교모사진(莫敎摸寫盡)                  여보게들 이 경치 죄다 읊어 쓰지 말게나
래세채미귀(來歲採薇歸)                  내년에 고사리 뜯어러 다시 와야 하니 그렇지

(이 시는 남명이 66세인 1566년 개평의 옥계(玉溪) 노진(盧眞)댁을 거쳐 북상의 갈천(葛川) 임훈(林薰)댁을 예방하고 안의의 삼동을 유람하며 화림동에 들린 것인데 이때 그의 제자들인 노진, 강익,하항, 대소헌 조종도등이 수행하였다 함)

나 는 남명의 시가 이태백과 두보같은 문장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초탈한 기품이 넘치는 그의 사상을 담은 사상시라고 생각한다. 화림동의 너럭바위가 꼭 뭉게구름 피어나 파아란 창공에 흘러가는 구름같이 보인다는 첫 구절은 표일한 도가 사상이 엿보이고,  다른 썩은 선비들처럼 이 경치에 음풍농월하는 문약에 흐르지 말것을 주문한 후, 주 무왕의 부름을 고사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죽었다는 절조의 원조, 백이. 숙제의 기분을 내기 위해 내년에 다시 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끝 구절로 가히 화림동의 경치에 홀딱 반한 그의 심경을 저리도  장대하게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그는 평생, 술을 입에도 대지않는 계율을 지켰다니,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자신에 정말 저렇게  엄격할 수 있나 혀를 내두를 만치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되어 경외심과 함께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피어오른다.

또 다른 무서운 사상시를 보자! 이 시는 그가 49세인 1549년 그가 태어난 삼가땅 감악산(지금의 거창 신원면 구사리 포연대<鋪淵臺>라는 바위밑의 소를 말하는데 그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함양의 문사 임희무와 박승원이 달려와 같이 목욕했다함)

욕천(浴川)     시냇물에 목욕하며
전신사십년전루(全身四十年前累)    온몸에 40년 동안 찌들어 붙어있는 때를
천곡청연세진휴(千斛淸淵洗盡休)    천 섬의 맑은 물 괸 이 소(沼)에서 씻어내고 말리라
진토상능생오내(塵土尙能生五內)    만약에 그래도 먼지가 내 오장육부에 생긴다면
직금과복부귀류(直今刮腹付歸流)    당장 배룰 갈라 꺼내, 모조리  이 냇물에 흘려 보내리라.


<▲ 안의의 심진동 계곡에 있는 용추폭포 전경,  폭포의 주위엔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해인사에 버금가는 대한 사찰과  암자에 수백명의 중들을 거느린 장수사가 있었으나 국군은 1950년 공비토벌을 빌미로 고의 방화하여 소실된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 >



참으로 무서운 내면의 세계를 가진 남명의 추상같은 사상이 엿보이는 시라 아니할 수 없다.산청 덕산의 산천재의 벽화엔 그 유명한 요임금의 벼슬하라는 얘길 듣고 영수(潁水)에 더럽다고 귀를 씻고 그 이야기를 듣고 그물이 더럽다고 평생 마시지 아니했다는 소부와  허유의 고사가 그려져 있다. 소를 몰고 밭을 가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남명이 나라에서 영의정 벼슬을 준다한들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렇다고 그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은둔군자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여 바로 잡을 것을 그때 그때 지적하여 상소를 올리는 현실참여주의자라는 점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윤원형따위의 소인배가 득실거리는 조정에 들어가 봤자 자기 입만 더러워 질 것이라는 예리한 통찰력이라고 할까.

나는 가끔 조선의 사극드라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웃곤한다..  국왕이 용상에 앉아 있는 좁아터진 빈청마루에 품계순으로  코가 앞사람의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허리숙인 상태에서 옳든 그르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하고 마음에 없이 웅얼거리는 장면을 보노라면, 앞에 있는 정승이 방귀라도 발사하면 뒤에 있는 놈은 끽소리 못하고  그 고약한 냄새를 맡아야 하는 숙명이라 출세에 열을 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는 말년에 지방아전들이 백성의 고혈을 짜는 기생충이라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주창한 올곧은 재야의 목소리였다. 무신란 당시 서부경남의 아전들이 이술원빼고 전부 정희량 조성좌 반군에 가담하는 현상과 대조를 이룬 것도 남명의 훈도를 받은 이지방 아전들의 집단 행동이 틀림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서부 경남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이 모두 노론계 벼슬아치라 가렴주구를 일삼아 아전들을 달달 복았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라,  지방 말단 행정요원들이 반군에 가담하는 민심이반 현상을 웅변하는 반증에 다름아닐 것이다.

남명 조식은 1572년 향년 71세의 나이로 산천재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과 의를 당부하며 올곳이 앉은채로 마치 고승처럼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는  수제자 정인홍의 덕분으로 광해조 초기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남명 조식만치 치열하게 살다간 조선의 유학자나, 선비가 5천년 역사상 또 있을까?

그와 비슷한 사람이 송도 삼절이라는 탈속한 화담 서경덕이 있다고는 하나 그는 황진이와 로맨스를 나누며, 거문고 타는 풍류 도학자일 뿐이다. 이런 현실과 무자비할 정도로 타협을 모르는 선비를 좋아할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은 이 세상에 없다.그는 마치 유대 광야에서 털옷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서서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광야의 목소리 '세례 요한'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나쁜 비교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부패한 '샤'의 이란 독재 왕정에 직격탄을 날려 무너뜨린, 원리주의자 호메이니(Khomeini)에 비견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사상으로 무장된 남명학파들이 조선 중기이후 말기까지 내내 박해를 받았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거짓은 진실을 두려워하는 법이다.부귀영화에 눈이 먼 노론 세력들은 남명이나 그 제자들이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여겨져 철저하게 배척했던 것이 250년에 걸친 영남차별의 이유 바로 그것이 아니랴!(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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