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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유 7년 전쟁의 영웅: 영남 의병 총사령관 정인홍의 눈부신 활약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6-19 13:17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3)
모진 칼바람 북풍 한설이 내린 후에야 소나무의 푸르고 굳은 절개를 안다고 했던가(歲寒然後知松柏).

정인홍의 진면목은 임란전쟁에서 그 성가가 여지없이 증명되는데,  남명 조식의 제자들 모두가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조선 중기의 문약에 쩔은 선비들에게 무언가 보여주는 쾌거요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592년 20만 왜적이 조선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동문수학한 곽재우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니,파직되어 고향에 있던 정인홍은 함께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성주의 왜적을 물리치며, 고령에서 매복작전으로 왜적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고, 그해 10월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기도 하였으며, 영남지방을 동분서주하며 왜적을 격파하는 혁혁한 전공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정인홍의 분전은 의주로 피난간 선조에게도 보고되어 여러 개의 지방관  벼슬이 제수되긴 하지만. 그보다  서부경남 지방관들의 추대로 영남의병대장에 임명된 것은 그가 수없는 승전을 통한 강력한 카리스마로  지방여론이 인정하는 튼튼한 기반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정인홍은 자기의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자기자랑하는 것이라며 사양하다보니  일일이 장계올리지 않은 전공이 더 많다고 한  당시 남원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의 기록이 있어 대장 중의 대장으로 손색이 없는 명성을 얻은 칼찬 선비였다.

조정이 공식 영남의병대장으로 임명하나 고사하며, 오히려 장문의 상소로 임란초기, 무방비 상태의 혼란을 일으킨 원인과 전쟁수행 방법, 전후 국가재건 사업등을 건의함으로서 그는 진정한 "항일구국전쟁영웅"이었다.  명나라의 개입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595년 서애 유성룡이 왜적과 화의를 주장하자 그는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다 이를 듣고 과무계(過茂溪 무계를 지나며)라는  시를 지어 주화론자들을 통렬하게 질타한다.
 
 
필마경과구전장(匹馬經過舊戰場)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가는데
강류유한여구장(江流遺恨與俱長)         강물도 한을 품어 저리 함께 흐르는가
어금수창와융설(於今誰唱和戎說)         어쩌자고 지금 왜놈과 화해하자 떠드는가
장사당년왕사망(將士當年枉死亡)         하고많은 장졸들이 원통하게 죽었는데!
 
 
그 후 1597년 정유재란의 왜적이 재침하자 다시 의병을 모아 참전하고 종전후 합천으로 낙향한다.전쟁에 시달린 심신을 쉬고 싶었던 것이리라.1598년 명나라에서 일본과 조선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할 것이란 소문이 돌아 외교문제로 비화하자, 해명사절을 보내야 하는데 유성룡등 그외 아무도 가려하지 않자,그는 고향에서 명의 관리에게 해명하는 편지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기도 한다.

1602년 사헌부 대사헌(요즈음의 검찰총장)에 제수되나 정경세를 탄핵한 일로 시비에 말려들어 사직했다. 이후 그는 임란중 화의를 주장한 유성룡을 탄핵하여 벼슬에 물러나게 하였으며, 그 후에 선조의 신임을 얻은 북인들의 영수가 되어 억울한 기축옥사의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당쟁에 참여하다 염증을 느껴 모든 벼슬을 버리고 다시 낙향한다.

이때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소북의 유영경이 적통론을 들먹거려 영창을 옹립하려하고 선조가 광해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대북의 입장인 그는 의리상 마땅히 광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선다.

당 시 동계 정온은 폐모살제를 통박하는 상소로 광해의 미움을 샀고, 스승인 정인홍과 사제지간의 의를 끊고 중북(中北)으로 돌아선다.  또한 이때 스승 남명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을 주도하게 되어 그가 쓴 발문에 퇴계 이황을 비평한 것이 문제되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의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그들의 엄청난 반발에 시달렸고 이후 이황의 제자들과 껄끄러운 사이가 된다.

이윽고 선조가 죽고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 대사헌에 다시 등용되어 대북정권을 주도하게 되지만 그는 서울의 벼슬살이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는지, 벼라별 높은 벼슬을 내려도 고사하고 합천에 기거했다. 그와 임란중 교분으로 전쟁 업적을 인정한 광해는 아무리그를  불러 중용하려 해도   올라오지 아니하여, 아예 1품의 관직을 유지한채 합천에  은퇴 생활을 하도록 배려한다..이런바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도 조정의 움직이게 하는 영향력 )이다. 말하자면 이산해 이이첨의 대북 광해군 정권 실세들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원격 조정장치를 가진 고문역할인 셈...

이 때 퇴계 이황과 우계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조정 논의에  스승 남명이 빠지자 강력하게 이를 반대하는 파란이 인다. 그는 스승 남명을 위한 의리에 몸을 던진 것이다.그는 이황이 조식을 비난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조목 조목 남명을 제외시킨 그들의 종사(從祀)를 반대하고 스승을 옹호하는 간곡한  상소를 올린다.다음은 그 상소의 일부분:
 
" 이황은 과거로 출신(出身)하여 완전히 나아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며 스스로 중도(中道;중용의 도리)라  하였습니다.... 신의 스승 조식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나라의 부름을 받아도 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황이 이를 괴이한 행실이며, 노장에 물든 자로 인식하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처사입니다.... 조식은 은둔 중에도 누차 상소로 나라를 위한 대책을 건의했으니 어찌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이란 말입니까...그때 스승의 나이 70이었습니다. 오히려 벼슬을 그만 두어야 할 나이 아닙니까.  신은 이황의 일이 의혹스럽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엄청난 논란에 휩싸여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정인홍을 처벌하라며 연일 데모를 벌리고 복합상소를 올리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동맹휴학인 권당(捲堂)도 불사하며, 정인홍을 전국 유생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제적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그는 사랑하는 스승 남명 조식을 끝까지 옹호하는 사제지간의 의리를 지킨 일에 불과한 일인데도 말이다. 


<▲ 황석산이 보이는 길목에 보이는 이정표 의기 논개의 고향도 안의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묘도 옛 안의땅 서상에 있다. 안의는 항일독립투사와 충절의 선비, 의병의 고장으로 알려져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위 반골기질이 있다고 하는 것일까 >


내가 누구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구구절절이 옳은 말 아닌가. 안동의 도산서원에 포진한 학자들의 대부분이 좀 뜻뜻미지건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답답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 어떻게 보면 그쪽 동네 '물태우'와 닮은 꼴이다.

그에 비해 전대머리는 화끈하기라도 했는데...그래서 이황이 출(出)함도 처(處)함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어찌 중용의 도라 할 수 있느냐 꼬집은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퇴계나 이율곡의 학문적 업적이 대단하긴 하나,  이들 대신에 실천 유학을 강조한 남명학파들이 당시의 조정을 주도했었다면 조선의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고, 임란의 참화를 조기에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종종한다.여기서 정인홍이 지적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죽칠것이냐'하는 출처(出處)의 문제는 제대로 된 선비들의 처세론인데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라 설명을 부연하고저 한다.

유학자들의 출사는 그들의 최고 경전인 논어나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을 최상의 바로메터로 삼는다.논어 위령공 6장에 그 당시가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기라,공자는 거백옥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도가 행해지면 나가서 벼슬을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때려치우고 자기가 지닌 도를 모조리 돌돌말아 짐싸가지고 물러나와 앉아 가슴깊이 간직하라"(邦有道則仕,邦無道則可圈而懷之)가 그것이다.

전자가 出이고 후자가 處이다. 쉽게 설명하면 여기 호나우두같은 신출귀몰하는 축구 선수가 있다고 하자, 축구 경기의 룰이 제대로 지켜지고 심판이나 관중의 수준이 높으면 나가서 뛰라 하지만 모든 게 개판으로 돌아가는 경기라면 유니폼 싸가지고 집에 들어앉되, 기량을 계속 연마해 간직하라는 소리가 될 것이다.그래서 남명은 철저하게 평생을 하나같이  벼슬을 고사하고 "처사"를 자임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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