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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도의 정신적 대부 남명 조식, 그는 누구인가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5-15 14:53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8)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 인터넷에 "조성좌"를 입력했더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조성좌의 묘소 사진이라, 이거다 싶어 상세히 검색해  글쓰기에 참조할 옛 비문의 탁본이나 걸려들겠지-기대했는데,.. 이 사진이 달랑 90년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캡쳐했다는 설명 뿐이라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고 역적으로 합천 고향에서 참수당한 그가 이제 석재공장에서 공업용 그라인더로 갈고  다듬은 다음, 다이아몬드 펜으로 글을 새겨 만든 것이 분명한 산뜻한 화강암 묘지석과, 왕릉같은 묘지 둘레석으로 치장한 것을 보니 이런걸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신란 이후 최근까지 우리 고장에서  만고 역적 정희량과 조성좌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사항이었고, 입에 담으면 큰일나는 줄 알고 목소리를 낮추고 거의 귓속말로 언급해야하는 "쉬쉬 사항"에 속했다.

국사책에도 이인좌의 난이 거의 보일까 말까한 한 두줄 기사로 얼버무려 넘어가고 정희량, 조성좌는 누군지도 모르고 자란 것이 우리가 경험한 중고교 시절의 역사 시간으로 기억한다.


<▲정희량의 생가 동계 정온 고택의 솟을 대문, 보이는 것은 사랑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대정현 귀양중 광해조때 똑같이 귀양온 동계 정온의 인품에 감화되어 귀양이 풀린후 이곳을 방문하여 써주었다는 충신당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


그러던 것이  80년대 말부터 갑자기 합천이 뜨기 시작한 것이다. "황강에서 북악까지"라는 대머리 모씨의 입지전적인  자서전이 나올 무렵이지 싶은데,......그 땅에서 태어난 남명, 정인홍, 조성좌가 뜨고, 합천 삼가의 깡촌 시골에  3.1운동 직전의 2월에  이곳에서 있었다는 3만 군중의 만세 시위를 기념하는 거대한 석조 조형물이 들어서는  일련의 대대적 향토 문화 사업은 물론,  거대한 황강댐을 만드는 국책 사업을 병행함으로서 합천 고을 전체는 때아닌 번영을 구가 했었다.

이 모든게  합천에 생가를 복원한  "전 대머리"덕분에 가능했던 역사의 반전이 아니랴. 우리 안의 땅엔 그런 사람 안나오나? 민주화 시대에 앞으로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지만...쿠데타 반역의 고향이 또 다른 쿠데타 반역 주모자에 의해 충절로 각색되는  역사속의 반전 드라마요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하기사 조선조에 역적과 충신의 구분은 종이 한장 차이밖에 없다. 왕이란 지위가 절대적이고, 거기에 따르는 권위와 부귀영화가 엄청나다 보니 , 군침을 삼기는 야심가들이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다보니 임금이 제일 무서워하고 소름끼치게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역모 사건!  이런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연루된 사람이나, 모함으로 걸려든 사람들, 그 몹쓸 연좌죄로 굴비처럼 묶여진 사람들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국사범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 500년 역사는 충신이 수백명 있었다면 그 반대편에 선  역적은 아마 수천명 수만명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피바람의 역사라 할 수 있다...그렇게 억울하게 죽다 보니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 거의 모두가 명예와 직위를  원상회복였으니(사육신,조광조, 김종직, 정여창등이 그 좋은 예),역적과 충신의 구별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할 것이다.

구한말의 동학란을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진주민란을 진주농민혁명으로 평가되는 판국에 전국적 규모의 양반사대부 세력과 10만명에 달하는 민초들의 호응을 얻은 무신란은 아직도 역사의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 있으니 우리는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Henry Carr의 질문을 다시한번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무신란이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인들(노론)이 일으킨 쿠데타인 인조반정이후 그들은 이조가 망할때까지 경상우도 즉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 출신 인재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철저히 고수한 집권세력 노론의 전횡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함경도나, 평안도, 전라도에 대한 차별대우는 알면서 정작 우리 지역에 대한 250년에 걸친 차별은 언급되지 않고 있는 모순은 우리 자신까지도 잘 모르고 있다  그말이다.

그런데 그 가혹한 차별의 중심에서 서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합천땅의 정인홍이요.그가  임란시 영남 의병의 총사령관으로 동분서주하며 광해군이 의주로 피난간 선조와  조정을 나누는 분조(分朝)의 대임을 받고  함경도로 파견되어 민관군을 지휘하는 가운데  서로 긴밀한 전우관계를 유지한  교분을 시작으로 그 악연은 시작된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북인들이 서인들을  영창대군 옹립 역모로 엮어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인 계축옥사에서  완전히 숙청되었던 바, 와신상담하며 울분의 세월을 보낸  서인들에겐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 광해군 정권의 실세인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의 영수 정인홍이였고 그들은 쿠데타가 성공하자 87세의 호호백발 노인 정인홍을 불법으로 참수한 것으로도 부족했는지(조선은 80세 이상으로 정승을 지낸  노인은 참수를 금한다는 전례와 국법이 있었다), 



그들의  최대 위협인  정인홍의 스승이요 북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남명 조식까지 그 죄를 소급 적용하는 당론이 성립한다. 그들은 이 남명학파들을 발본색원하여 중앙정계에 발을 못붙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부귀와 영화를 대대로 보장받을 수 있는  관건으로 여겼는지, 이조말 고종때까지, 남명은 불온 사상가로 취급받아,조야에서 입도 뻥긋 못하는 "불순 세력의 괴수"로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조 중기 화담 서경덕에 버금가는 처사형 도학자요,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난 동년배 학자사이로, 이율곡과 동시대를 살며 일세를 풍미한 조선 4대 유학자중 하나였지만, 끝내 그는 문묘에 배향되지 못하는 불운을 감수해야 했다.

그의 제자들과 후학들, 그리고 사림들이 그 간 몇번이고 연대서명한 상소로 종묘의 문묘제향을 건의했으나 번번이 노론들에게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해방후에도 남명사상은 이런 저런 이유의 불온사상으로 치부되어  기피대상이 되었던 것이나, 80년대들어 조명을 받기시작하더니, 이제는 남명을 주제로한 무슨 무슨 연구소에 남명 국제 학술 대회다, 남명학회다 하며 부산을 떠는 등, 이퇴계와 이율곡의 전통적인 소위 퇴율(退栗)유학이 퇴조하고 남명이 오히려 "신선한 충격"(pleasant surprise)의 신유학으로 대접받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무신란 주역인 남인계, 소론계 인사들 모두가 남명학파에 속하며, 조선 후기 정약용을 위시한  남인 실학자들과 천주교에 귀의한 유학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남명사상에 훈도된 사람들이다.

이것은 곧 소위 "꼴통 보수 기득권"세력들이 가장 혐오하고 기피하는 진보 개혁 사상이 곧 남명사상이라는 논리가 올곳이 성립한다는 말에 다름아니다.그리고 조선 중기부터 이 남명사상으로 훈도되고 무장된 사람들이 바로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곽준을 위시한 임란의병의 주역들이였고, 이들의 올곧은 남명사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 곧 동계 정온이며 그 후손들인  정희량 조성좌에 이르는  사람들이  영남지역에서 최후의 항전을 불사한 무신란 주역들이란 말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이 제자들을 이끌고, 가르치고, 배우며, 더러는 심산유곡을 찾아 천지자연의 정기를 받고 소요했던  그 무대가 바로 지리산의 품에 안긴  이곳 서부 경남의 함양, 산청, 안의, 거창, 삼가, 합천이며 우리 안의의 화림동은 그가 심심하면  찾아와 시를 읊은 옥산동(玉山洞)으로 그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남명은 바로 이 지리산을 하늘처럼 숭배하는 처사임을 자임하고 그 정기와 훈도를 받고 자라난 조선 최대의 학자요, 사상가란 점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며, 그의 수제자 정인홍이 수동면 우명리 효리에 살던 구졸재(九拙齋) 양희(梁喜)의 사위로 와서 살다가 합천으로 돌아간 사실도 아울러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가 말년을 보낸 산청 덕산의 산천재(山川齋)와  생가터가 있는 합천 삼가의 뇌룡정(雷龍亭)은 이제 번듯하게 성역화되어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남명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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