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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차별의 진원지 서부경남 안의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9-04 10:31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4)

한마디로 무신란 이후의 안의골은 영남의 '광주'였다. 아니 광주도 안의만큼 괄시받고, 고통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호남의 광주가, 아무리 전라도 사람들이 차별대우 운운하며 볼멘 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선거때마다 이 문제를 이슈화하여 대통령선거이든, 국회의원 선거이든 선거는 하나마나한 몰표로 그들의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 적어도 안의사람들이 무신란 이후 조선이 망해갈 무렵인 고종조까지 받은 구조적 차별에 비하면 정말 속된 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하고 막말로 "깜"도 안되는 불평이라 해야 마땅하다.

고종조에 잠시 안의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현'의 구식 행정 단위 명칭을 '군'으로 통일하여 명명된 것일 뿐 , 병탄후 1914년엔 다시 무신란 폐현의 굴욕을 되풀이하는 수모를 다시 당하여 영원히 우리 안의 고을은 인근 두 고을 함양 거창에 두 갈래로 찢겨져 분속되어 버리고 말았다.

일인들이 식민 통치를 위한 지방 행정 단위 개편에 따른 행정 조치라고는 하나 이 작업에 참여한 친일파 떨거지들이 구 기득권 세력인 노론의 잔당일 진대, 그리고 반골 기질이 강한 이 고장이, 더구나 그들의 침략 전쟁인 임란 때, 황석 산성에서 처절하게 죽음으로서 저항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한 사실을 고려에 넣었을 것은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황석산성 싸움에서 현감 곽준을 위시한 순국의 영령들을 배향하는 황암사마저 폐철한 장본인들이니 그 누가 이런 음모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할 것인가 말이다.

올해는 1914년 안의군이 폐현된지 만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강점기 36년, 또 해방후 60여년이 흐르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거쳐오면서 우리 안의가 또  지난 100여년 동안 겪어야 했던 굴곡을 되돌아 보면 한숨만 나오는 일들 뿐이었으니 우리 안의는 무신란 이전의 안의와 무신란 이후의 안의로 나눌만치 무신란은 안의 사람들에게 역사의 분깃점이요, 전환점(turning point)이며, 불행의 진앙점(振央點 epicenter point)이다.

그리고 이 경천동지할 진앙을 야기한 장본인이 바로 정희량이라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모든 악연의 중심에 선 정희량에 대한 평가는 '만고역적'이라는 부정적 평가만 있을 뿐이며, 그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의 사람들이 연대 책임을 지고 당했으니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희량만 아니었더라면, 아니 정희량이 고향을 버리고 순흥에 이사간 놈이라니, 그 곳에서 일을 벌렸어야지, 왜 하필이면, 위천 강동 마을에 갑자기 돌아와 그 짓을 벌려, 무고한 읍민들을 나락의 수렁에 빠지게 만들었느냐는 원망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안의 고을의 자부심인 만고 충신 동계 정온의 직후손이라는데  사람들이 느끼는 갈등의 본질이 또 뒤채여지는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데 안의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의라는 고장은 예로부터 좀 다른 동네다. 안의 읍지의 연혁에 조선의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여 "사납고 강하며 싸우기를 좋아하는"(强悍爭鬪)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다. 모르긴해도, 이런 평가가 적어도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 초기까지의 향민성(鄕民性)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아마 워낙 지리 덕유의 험준한 산악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라  한편으로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와 싸우고, 붙여 먹을 땅이라고는 별로 없는 변방지역으로 신라, 가야, 백제가 자웅을 겨루다 보니 툭하면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주인이 뒤바뀌는 살벌한 곳이다 보니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인 동물이니 살아 남기 위한 적자생존의 원칙이 어김없이 적용되었기에 그런 성격을 가진 것이지 누가 태어날 때 부터 '모질고 사납고 싸우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이런 변방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중앙권력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왜냐하면 집권 세력들이 신경쓰야 하는 도성 거주 지역 다수를 위한 정책이나 그들의 권력 나눠 먹기 방식에 소외될 수 밖에 없다보니 반항의식이 저절로 생기기 마련이라 할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환경(geopolitical environment)에 처한 민중은 정의감이 강하다.

그리고 불의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절대로 불의와 타협하는 정치따위는 모른다. 이러한 변방지역 고을인 안의 사람들이 그나마 예의와 염치를 숭상하는 유학의 훈도를 받고 환골 탈퇴한 것은 그 유명한 지곡 개평의 일두 정여창이 안의 현감으로 내려와 교화에 심혈을 기울인 조선조 초기의 무렵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향교가 세워져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고, 광풍루와 제월당을 중창하여 안의 고을이 유서깊은 선비 고을로 함양과 함께 경상우도의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며, 그 후 기라성같이 많은 선비들이 원학동에서 쏟아져 나와 동계 정온같은 인물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안의고을이 배출한 선비들이 기호 지방이나, 경상 좌도의 그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바람직한 군자상으로 후천적 속성인 문(文)과 선천적 바탕인 질(質)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것을 주문했다.

그는 문으로 치우치면 너무 사변적인 사(史)한 사람이 되며, 바탕인 질에만 치우치면 거칠은 야비(野)한 사람(質勝則野.文勝則史)이 되니 이 두 가지가 함께  알맞게 조화된 문질빈빈(文質彬彬)한 군자가 될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감이 잘 안잡히는 말이나 더 쉽게 설명하면 책벌레만 되면 문약에 흐르기 쉬워, 기질의 연마도 중요하니, 지성과 야성을 동시에 갖춘 지식인이 되라는 소리다.참으로 올바른 지적이다. 조선왕조 500년 문약에 흐른 결과가 곧 임란 전쟁에서 거의 모든 수령들이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 가기 바쁜 추태가 아니었던가.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불세출의 학자가 이 서부경남에서 나왔으니 바로 남명 조식이라는 사람 아닌가. 사단칠정론이니 주기론, 주리론의 쓰잘데 없는 공리 공론만 일삼는 샌님이 되기보다 경의검(敬義劍)이 상징하는 칼찬 선비 의기 남아 선비로서 의를 실천하는 선비가 되라는 남명학파가 우리 고장을 비롯한 서부경남 지도자들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보라 안의 고을의 산들을! 뾰죽한 바위 투성이의 황석산, 괘관산, 기백산, 금원산의 금체(金體)아니면,화체(火體) 일색의 조산(祖山)들이 벼려내는 기질이란 무림고수의 기가 강한 문무겸전한 선비들이지, 야트막한 야산들과 붓처럼 생긴 문필봉만 어우러진 개평과 같은 지형이 배출해냄직한 문사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 래서 우리 선조들은 임금이 의주로 도망가기 바쁜 전화의 와중에 서부 경남만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왜적과 끈질긴 싸움을 벌이며, 이 고장을 지켰고, 마침내 왜놈들이 복수을 위해 재침한 정유재란에 서부 경남의 뜻있는 모든 선비들과 백성들이 황석 산성에 들어가 죽음으로서 항거한 순국정신을 어김없이 발휘했던 자랑스런 고장이다. 또 임란의 전쟁 참화를 직접 경험한 동계 정온이라는 화끈한 선비가 나와 광해의 폐모살제하는 패륜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며, 이어진 오랑캐의 침략에 분연히 맞서 화의를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의 항복을 하는 무릅을 꿇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을 참지 못하고 할복자살이 미수에 그쳤고, 죽지 못한 것을 통한의 수치로 다시 여기고, 북상의 덕유산 자락 모리(某里)에 내려와 백이 숙제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만 먹고 생을 마감한 깨끗한 선비의 고장 아니던가.

이러한 전통은 곧 무엇을 말함인가?

한마디로 정의에 죽고 사는 정신이다.

불의와 타협하며 구차하게 사느니, 죽을지언정 당당하게 정의롭게 사는 길을 기꺼이 택함이다. 다시 말해, 먹을 것 때문에, 입을 것 때문에 굽히지 않는 삶에 만족하는 의협심 아닌가 그 말이다.(계속)


▲건평 150평에 달하던 우람한 조선 중기에 축조된 안의객사 건물 일제 강점기시절 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된 모습, 해방후 안의 중 고가 차례로 이곳에서 개교하였다. 하지만 1960년 1월 의문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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