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긴 합천의 대쪽같은 강골 유학자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6-12 13:26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2)
한 마디로 정인홍은 '그 임금에 그 신하,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쉽게 떠올려지는 사람이다.

한번 일단 관계를 맺으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 의리로 뭉쳐진 인격체라고 하면 정확한 그의 인물평이 된다. 이런 사람이다 보니 그에 관한 믿지 못할 신화가  합천의 가야땅에 수없이 구전되기도 한다.

그는 1535년 가야면 사촌리에서 평범한 양반인 정륜(정륜은 사후에 아들덕으로 영의정에 추증됨)과 진주강씨의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던 해 가야산의 한 봉우리인 성왕산의 풀과 나무가 마르기 시작하더니 3년동안 지속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그의 기가 너무 쌔서  합천 가야땅의 모든 정기를 싹쓸이했다는 찬사일 것이다.

그의 본관은 서산으로 고조부 정성검때 입향하여 대대로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는 집안, 그 전통에 훈도된 탓으로 그는 어려서 부터 비상한 기억력과 총명함이 돋보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가 세살 때 우연히 아버지 성륜이 읽던 성리서를 보다가 몇장을 실수로 찢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하자 아버지는 노발대발 야단을 치자, 반짝이는 눈망울을 굴리며 "아버지 책을 갖고 놀다가 실수로 몇장을 찢었습니다. 제게 지필묵을 주시면 찢겨져 없어진 글 부분을 다시 적어 붙여놓겠습니다" 하여, 지필묵을 주니 그 사라진 내용을 그대로 복기해 적어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그는 한 번 가르쳐 준 글은 두 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줄줄 외웠다고 한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렇게 영특한 정인홍은 소년기 무렵 안음현 북상의 갈천 임훈(林薰)문하의 갈천서당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지독한 공부벌레로 소문이 났다.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 의하면 섣달 그믐날 저녁 임훈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는데 모두 잠이들었으나 정인홍만은 앉은채 밤을 새웠다한다.

그는 졸음을 쫓기위해 온몸을 꼬집어 손톱자국과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다. 이런 그를 임훈이 집안의 제일 예쁜 계집종을 뽑아 인홍이 글읽는 방으로 보내 유혹했지만 태연히 글만 읽고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고 하자, 부드러운 문풍을 지닌  임훈은 그가  지닌 초인적인 인내력과 집념이 상스럽지 못하다 여겨 내쫓았고...그를 거둔 스승이 바로 합천의 남명 조식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한다.

그가 11살 때 , 절에서 글을 읽었는데(아마 용추사일 듯), 마침 수동 효리의 명유(名儒) 양희(梁喜:그는 명종조 정승으로 명나라로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동지사가 되어 만력제 신종을 알현하는 중 북경 여관에서 60의 나이에 그곳에서 병사했다. 신종이 직접 조사를 내리는 은전을 입음. 이듬해 유해를 모셔와 함양땅에 안장)가 당시 경상도의 감사로 당도하여 글외는 소리가 들려 찾아가니 바로 정인홍이라 기특하게 여겨 묻기를  "네가 시를 지을 줄 아느냐?"라고 묻자 잘 짓지 못한다고 겸손해 하니 양희가 작은 소나무, 즉 왜송(倭松)을 글제로 하여 운(韻)자를 불러주자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는 것이다.
                                                    
倭松
단단고송재탑서(短短孤松在塔西)                  짧디 짧은 외로운 솔하나 탑 서쪽에 있으니
탑고송하불상제(塔高松下不相齊)                  탑은 높고 솔은 낮아 키가 가지런하지 않네
막언금일고송단(莫言今日孤松短)                  오늘에 외로운 솔 낮다고 말하지 마오
송장타시탑반저(松長他時塔反低)                  솔이 자란 다음 날에 탑이 숫제 낮으리라


이쯤 되면 어린 인홍이 정승 양희를 제대로 한방 엿을 먹인 것이다.정3품의 당상관, 판결사인 양희가 감탄을 하며" 너는 훗날 반드시 현달할 것이다. 하지만 뜻이 참람하니 부디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한다. 이를 인연으로 인홍은 양희의 첫째 딸에게 장가들어 잠시 수동 효리의 처갓집에서 생활하는 인연이 될 줄이야.


<▲ 안의의 황석산 정상에 있는 황석산성 최근 복원됨. 정유재란을 맞아 이고을 사람들은 이 산성에서 결사 저항하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거의가 절벽에 떨어져 순국한 장열한 역사의 현장이다. 정인홍은 배후에서 이 황석산 싸움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 이후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남명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수제자로 성장하며 당시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인 최영경, 김효원, 곽재우, 이산해, 김우옹, 한강 정구, 이발, 하진보등과 함께 남명학파를 대표하게 된다. 그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본 스승 조식은 그에게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 송의 주희가 예기에서 빼낸 한 편을 대학이라는 서물로 장절로 나눠  정리한 책, 대학에 나오는 정심수기치인의 방법론인 팔조목을 말함)를 지어주고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격려하고 만년에는 자기가 차고 다니던 칼을 주자 늘 꿇어 앉아 칼을 턱밑에 대고 정신 가다듬기를 계속하였다고 전한다.

젊어서 학행으로 천거되어 이미 선조 초기에 관직에 진출했고, 선조 5년인 1572년 임란이 일어나기 20년전 스승 조식은 임종에 이르러 그가 찬 경의검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죽기전 그에게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로 칼을 수여했다고나 할까. 그후 6품직에 올라 황간 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고 중앙으로 복귀하여 사헌부 지평(요즈음의 비리적발 검사)과 영천군수로 나갔다.

그 후 동인에 가담 서인 정철과 윤두수들을 탄핵하다 도리어 파직당하여 낙향했고 1580년 정4품 사헌부 장령(부장검사급)에 임명되어 공직기강을 확립하기위해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걸리면 무조건 준열한 탄핵을 가했다. 그로 인해 백관들이 무서워 정신을 차리고 상인들을 엄히 단속하여 유통질서를 확립하는 등 대쪽같은 강직한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의 소문은 지방까지 널리퍼져 그의 얼굴을 보러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도 있어 한 시골 사람은 "정장령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기에 그 위엄이 먼 시골 구석까지 퍼져 수령들이 두려워하니 참으로  "대장부"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비위 적발 검사로서 조정에서 아무도 못건드리는 당대의 거물 정경세가 모친 상중에 육식을 하고, 강원도에 출장가서는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사실을 알고, 눈치코치 볼것없이 탄핵하여 같은 사헌부 동료들에게 왕따당하고 율곡이 그를 "돌격장"이나 할 인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가 조정에서 활동할 무렵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가시화 되면서 1589년 피비린내나는 정여립 역모 옥사사건이 일어난다. 그 유명한 서인의 송강 정철이 동인 이발을 이 역모에 엮어 수우당 최영경을 비롯한 2천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기축옥사가 일어나면서 정인홍도 삭탈관직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그 이후 이 사건의 조작혐의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송강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당내엔 서애 유성룡, 우성전등의 온건파와 사형을 주장하는 강경파로 분당하는데 온건파가 남인, 이산해 정인홍은 북인이 된다. 임란이후로 가면 다시 다음 왕위의 적통이 광해냐 갓태어난  영창이냐를 놓고 북인은  영창파인 소북과 광해파인 대북으로 또 분열한다.

정인홍은 물론 의리를 택한 광해를 지지하는 대북을 이끌게 된다. 소북은 명분을 택한 영창이 적통임을 주장한다. (계속)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6 ·최종회)
여하튼 좋다 정희량은 역적으로 사책에 기록되고 또 이것이 앞으로 시정되는 일은 아마 없지 싶다.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난후  거의 300년이 다 되어간다.그리고 안의군이라는 행정...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5)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정희량의 경우도 이러한 향토 정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숭명사대주의(崇明事大主義)에 쩔어빠진 모순도 부족하여, 그들만의 부귀영화를 위해 옳은 소릴...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4)
한마디로 무신란 이후의 안의골은 영남의 '광주'였다. 아니 광주도 안의만큼 괄시받고, 고통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호남의 광주가, 아무리 전라도 사람들이 차별대우 운운하며...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3)
정가놈을 잡을 때 함양의 금군 장교 박정신(朴挺身)또한 죽을 힘을 다해 힘을 합쳐 잡았는데, 정빈주는 총도 있고 칼도 있으므로 도적의 무리를 죽여 없앨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나,...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2)
물론 이런 공신전은 대대로 세습이 가능하고 면세의 특전을 갖는다. 이런 재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바로 역적으로 몰린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노적’(奴籍)의 절차에 의해...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1)
사랑의 배신이나,친구의 배신이나,부하의 배신이나,그 순간에 임하는 배신의 느낌은 '화'하다.심순애에게 배신당한 이수일의 느낌이나, 믿었던 심복 브루투스(Brutus)에게 배신 당한 유리...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20)
동 기사는 또 "우하형이 처음에 묶여온 포로들을 만나자 정희량 등이 금상전하를 모욕하는 부도한 말을 많이 하므로,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칼을 빼 손수 목 베려 하였는데, 이술원의...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9)
질서있게 기치 창검도 정연한 관군의 위엄에 주눅이든 반란군은 기선제압을 위해 하세호(河世浩)로 하여금 관군 진앞으로 가서 싸움을 걸게하면서 그 허실을 엿보게 하였다. 이때...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8)
육체와 육체가 부딪치는 모든 운동경기도 그렇지만, 수만 명의 아군 적군이 온갖 병기를 동원하고 머리를 짜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도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소위...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7)
이 때, 이웅좌(웅보)군은  소머릿재(牛頭嶺)에, 정희량군은 성초역(안의 역말에서 70리 고제면 궁항리에 있었슴)에 진을 치고 있었다. 격문이 드디어 우두령에 나붙고, 이곳의 역도들이...
해외에서 쓰는 고향역사(16)
자 그렇다면 과연 이 "효"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류의 스승 공자는 과연 조선시대와 같이 하는 것이 효라고 진짜 가르친 것일까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절대 공자가 이렇게...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5)
조선사회의 지방지리지인 안의읍지나 함양군지의 빛바랜 책장을 넘기다 보면 효자열전과 열녀열전이 지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곧 이 조그만 고을 안의나 함양에 효자나 열녀로...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4)
정인홍의 태도도 그의 스승 남명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나, 임란이라는 국난을 만나 모른척하고 비겁하게 도망하지 않고 자원하여 의병대장으로 맹활약하고 그후에 열번이 넘는 벼슬이...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3)
모진 칼바람 북풍 한설이 내린 후에야 소나무의 푸르고 굳은 절개를 안다고 했던가(歲寒然後知松柏). 정인홍의 진면목은 임란전쟁에서 그 성가가 여지없이 증명되는데,  남명 조식의...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2)
한 마디로 정인홍은 '그 임금에 그 신하,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쉽게 떠올려지는 사람이다. 한번 일단 관계를 맺으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 의리로 뭉쳐진...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1)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몰라도 한국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잠재적으로 의식하는  가치중 "의리"(義理)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 친구 의리있다' 든지, '그 친구 의리없다'는...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10)
유안음옥산동(遊安陰玉山洞)                             안의 화림동 계곡을...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9)
"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 돼 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8)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 인터넷에 "조성좌"를 입력했더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조성좌의 묘소 사진이라, 이거다 싶어 상세히 검색해  글쓰기에 참조할 옛 비문의 탁본이나...
해외에서 쓰는 고향 역사(7)
오명항은 무고한 백성이 뒤섞여 살육될까 염려하여 명을 내리길 "사로잡은 자는 상을 주겠으나 참수해 바치는 놈은 상을 안준다" 하니 군사들이 새끼줄로  굴비처럼 엮어 놓은 무수한...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