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기념사업 위해 평생 바칠 것”
가이 블랙(Guy Black) 재향군인회 명예 회원이 가평전투 기념식(4월 21일)을 앞두고, 오는 14일 한국전 용사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블랙 씨는 14일 가평석이 서 있는 랭리 더블데이 수목원을 출발해
26일 포천에 도착하는 약 300km의 위대한 걷기 대장정을
계획하고 있다.
가평전투는 6.25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공세가 한창이던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걸쳐 진행됐던 전투로, 당시 캐나다군이 포함된
영국 연방군은 5배 이상의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 서울의 함락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아직도 캐나다군 역사상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번 걷기 프로젝트를 계획한 이유에 대해 그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고 할 때 걷거나 뛰잖아요. 테리 폭스가 암 연구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요. 저도 한국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걷기 프로젝트를 준비하게 됐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14일 오전 11시
랭리 가평석 앞에서 출정식을 한 후, 한국전에서 전사한 윌리엄 스트라찬(Strachan) 일병의 가족이 거주하는 메이플릿지에 들리고, 버나비
센트럴 파크의 평화의 사도비와 밴쿠버 마운틴뷰 묘지를 방문해 한국전 전몰장병을 추모한 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할 계획이다.
블랙 씨는 영국과 프랑스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그가 한국에서 대신 기릴 수 있도록, 양국의 영사관으로부터 국기 배지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포천까지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이후 블랙 씨는 아내 이선옥 씨와 함께 한국전이 일어났던 여러 곳을 둘러보고, 6월 25일에 맞춰 부산에 있는 UN
기념공원을 방문해, 그곳에 잠들어 있는 스트라찬 일병을 참배할 예정이다.
블랙 씨는 원래 이번 여정의 종착지를 가평의 전투지로 잡으려고 했지만, 작년
스트라찬 일병의 누이인 엘리자베스 씨의 편지를 받아 감명을 받은 후, 종착지를 변경하기로 했다. 스트라찬 일병이 1951년 21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은 곳이 바로 포천의 각흘산이었다.
한국전에 빠지게 된 ‘전쟁사 덕후’
블랙 씨의 한국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23년 전부터 시작됐다. 어려서부터 ‘전쟁사 덕후’였던
그는 밴쿠버의 시포스 하이랜더스 군사박물관(Seaforth Highlanders of Canada Museum)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됐다.
“사실 그 전 까지만 해도 한국전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는데,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돈(Don Parr-Pearson)과 샘(Sam Urguhart) 아저씨가 제 인생을 바꿔놨죠.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두 분은 제가 여러 일 때문에 바쁜데도, 저 옆에서 한국전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전이 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릴까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블랙 씨는 어린 시절부터 쌓아왔던 ‘전쟁사 마니아’로서의 능력을 한국전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난 20여 년에 걸쳐 한국전과 관련된 캠페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며 200명이
넘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명단을 새롭게 발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2020년 한국 정부로부터 유엔군
참전의 날 국민포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20년
동안의 활동을 통해 밴쿠버에 거주하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뜨거운 인연을 맺었고, 지금도 재향군인회의
명예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전 용사를 생각하며 걸은 300km의 여정
그는 2년 전인 2021년
4월에도, 밴쿠버 아일랜드 토피노에 위치한 가평전투 기념비에서
랭리 가평석까지 9일 동안 300km의 걷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하지만 이 여정 또한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악천후와 고립, 그리고 산길에서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육체적은 물론 정신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전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길 양쪽에 있는 숲을
벗 삼아 걷고 뛰고, 또 걸었다. 모토홈을 빌려 밤마다 그에게
휴식 공간을 마련해준 아들 션의 존재도 큰 힘이었다.
“당시 여정의 위기는 마지막 이틀이었어요. 발이 너무 부어서 ‘더 이상 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죠. 하지만 평화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한국전 전몰용사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한, 래드너에서
랭리까지 함께 걸어 준 16세의 한인 청년 이용진 군과 그의 어머니 간현주 씨도 위안이 됐죠.”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 랭리에 들어서자 그는 걷는 대신 달리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가평전 70주년 기념식이 거행 중이던 데릭 더블데이 수목원에 딱 맞춰서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기념식에서 연방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기념 메달을 수여받은 블랙 씨에게는 열흘간의 걷기를 마쳤다는 홀가분함과
피로보다, 가평전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용사들에 대한 경외심이 더 묻어 있었다.
“한국전 기념사업은 평생의 숙원”
올해 블랙 씨는 이번 랭리-포천 대장정 외에도, UN군 참전의 날인 7월 27일이나
리멤버런스 데이인 11월 11일까지 5000개의 포피를 직접 만들어 버나비 평화의 사도비에서 참배를 할 계획이다.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대한민국에서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한국전 기념사업은 저에게 있어 평생 끝나지 않을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전 기념의 최전선에 서 있는 밴쿠버 한인사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는 작은 바람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밴쿠버 마운틴뷰 묘지에는 캐롤 보이드 레큐이어(Carol Boyd Lecuyer), 윌리엄
뮤어(William Muir), 프리데릭 슬레이터(Frederick
Slater), 제임스 레이몬드 잰톨라스(James Raymond Zantolas), 에드워드
고든 케인(Edward Gordon Kain)라는 이름의 다섯 용사들이 잠 들어 있습니다. 바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용사들이죠.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용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직접 찾아가 감사를 전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블랙 씨는 밴쿠버와 한국에서 그와 함께 걷기에 동참하고 싶다면 이메일 korea19501953@yahoo.com으로 연락해 달라고
전했다.
손상호 기자 ssh@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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