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풍으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병마가 내게 일깨워 준 것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1-09-23 14:07

이관호•이영은 부부

이관호씨(53)의 인생에서 쉼표란 없었다. 사소한 곁눈질 한 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그였다. 믿음직한 아들,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 그는 순항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를 막아선 것은 다름아닌 병마였다. 지난 해 8월 이관호씨는 풍으로 쓰러졌다. 머릿속에서 화산 하나가 폭발하는 것 같더니, 이내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일주일 후였다.  긴 쉼표의 시작이었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은 달라져 있었어요.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요. 책을 집어드는 것도,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켜는 것도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력에서 포기나 절망 같은 단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고교시절 그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있는 집 자식’이어서가 아니다. 이관호씨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메릴랜드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후 그는 한국으로 눈을 돌렸고, 사업가로서 달콤한 성공을 맛보았다.


“윤전기 관련 사업체를 20년 정도 운영했는데, 신문사를 상대로 수백억원대 계약도 여러 차례 성사시켰어요.”


2003년 그는 남부럽지 않은 사업체를 접었다. 한국사회는 기회도 많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팽배해 있다는 게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풍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풍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걸 저도 은연 중에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에 캐나다 이민을 굳히게 된 거죠.”
이민 와서는 부동산중개사로 새 삶을 시작했다. 아내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그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유전의 벽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풍으로 쓰러지고 병상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이관호씨는 제일 먼저 아내를 떠올렸다.

 

 


“평소에 잘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후회스럽기도 하고 너무 미안하기도 했지요. 50을 훌쩍 넘긴 어른을 단숨에 두세 살 어린애로 만드는 게 바로 풍이란 병이에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남편의 곁을 아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지켰다. 그 마음은 절망감에 빠져 있는 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아내의 도움으로 병상에 묶여 있던 그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바라본 세상은 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행복을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진 것 같아요. 지금 제게는 통증 없이 잠을 푹 잘 수 있는 것도 행복이고, 찬송가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에요.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게 됐어요.병상에 묶여 있었을 때는, 그리고 건강했을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죠.”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그는 새로운 변화를 체감했다.


“병원에 있을 때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가 저를 위로해 주더군요. 저까지 생각해 주는 그를 납득하기 어려웠죠. 자신의 상황도 절망스러웠을텐데 말이죠.”


이관호씨는 그에게 물었다. 두 다리를 잃었는데도 어떻게 행복해 하고, 남을 위로할 수 있는지를.


“자기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대요. 하지만 나뭇가지가 꺽인 자리에 새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걸 보면서 차츰 마음을 추스릴 수 있게 됐다고 하더군요. 자신도 의족을 차고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해졌대요.”


한쪽 몸을 온전히 가눌 수 없게 된 이관호씨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선 휠체어를 타서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의 꿈은 조금 달랐다.


“휠체어가 아니라 지팡이를 짚고 걸어보라고 하더군요. 아내가 저보다 욕심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내의 소원대로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퇴원했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지금, 아직도 몸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팡이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게 됐다. 이것 역시 아내 덕분이다.


“병원에 있었을 때 저는 콘도로 이사가길 원했어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았지요.”


하지만 아내의 선택은 하우스였다. 편한 것에 익숙해지다보면 회복도 더딜 것이라는 게 아내의 생각이었다. 집안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무섭기까지 했는데 차츰 익숙해지더군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윗몸일으키기도 시작했어요. 앉았다 일어서기도 반복해서 하고 있지요.”


아내는 음식에도 크게 신경썼다. 될 수 있으면 싱겁게 먹고 물,야채,과일도 많이 섭취했다. 몸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인데 아프기 전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죠. 지금은 내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통증이 심해지더라도 진통제에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짜 약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 1월부터 이관호씨는 부동산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아내가 수행비서처럼 그의 곁을 지킨다. 서서히 예전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가 잊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병을 통해 평소에는 당연한 일 혹은 사소하게 여겼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런 통증 없이 푹 잘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라고.”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머챈트 법률그룹의 디에고 A. 솔리매노 변호사
지난 11월 내려진 한 법원의 판결에 BC주 사회가 크게 술렁였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운전자에 대해 단속한 경찰이 즉각적인 처벌을 내릴 수 있게 한 조항이 공권력 남용”이라며...
“한국 의료서비스 북미에서도 간편하게 신청해요”
사람들은,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정부 관계자는 캐나다 사회의 자랑거리 중 하나로 의료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점을 꼽는다. 하지만 전문의를 만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줄이...
‘설원의 지존’ 정우찬 데몬
‘스키 달인’을 꼽으라면 스키 데몬스트레이터(Ski demonstrator·이하 스키 데몬)가 빠지지 않는다. 이들은 스피드를 겨루는 알파인 스키와 달리 스키 기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구사하느냐는...
써리 길포드 플레이스 공동 인수한 박노수·최영준씨
밴쿠버에서 1번 고속도로를 타고 48번 출구로 빠져나오면 써리 152가에 들어서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달리면 도로 왼편에 서 있는 쇼핑몰 ‘길포드 플레이스’(Guilford Place)를 만날...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효부상 받은 이경옥씨
어려운 환경 속에서 며느리 역할을 묵묵히 해온 한인 여성의 소식이 밴쿠버 한인 사회에 훈훈함을 주고 있다. 미담의 주인공은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시부모를 20년간 친부모처럼 봉양한...
“모션 골프 3D 시스템, 골퍼의 모든 것을 잡아낸다”
골프 애호가들에게 밴쿠버의 겨울은 낙원과는 거리가 멀다. 궃은 날씨 탓이다. 필드는 닫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시린 날을 견디기엔 야외 연습장의 시설도 뭔가 미흡한 듯 보인다....
“북미에서 한의학의 영토확장을 꿈꾸다”
동양의학의 중심은, 적어도 이곳 북미권에서는 중의학이다.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넓고 견고한 탓이다. 미국에만 약 60개의 한의학 교육기관이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의학이...
밴쿠버 방문한 제이슨 케니 이민부 장관 인터뷰
“지난해 영주권 취득자 수가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현 정부가 이룬 성과죠."   9일 오후, 최근 연이어 발표된 이민 정책에 대한 각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피고 의견을 수렴하기...
한인 최초 유아 교육 부문 캐나다 총리상 받은 이재경 원장
매년 캐나다 총리가 우수 교사에게 수여하는 올해 캐나다 총리상(Prime Minister’s award) 명단에 한인의 이름이 올랐다. 주인공은 코퀴틀람에서 키즈빌리지를 운영하고 있는 이재경 원장....
“버나비시 교육위원 출마, 증오범죄 통계법 제정에 총력”
헬렌 장(한국명 장희순)씨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된다. 무대는 11월 19일 치러지는 BC 지방선거. 장씨는 녹색당 후보로 버나비시 교육위원 선거에 나선다. 그녀에겐 네 번째 도전이다.장씨의...
“음악 교육자로서 내가 품은 꿈”
‘2011 코리안 페스티벌’이 지난 10월 5일 서울 KBS 홀에서 열렸다.  세계 한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이번 공연에는 헬렌 권(독일), 양방언씨(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나라당 재외국민위원장 서병수 의원
서병수 한나라당 의원이 11일 밴쿠버를 전격 방문했다. 서 의원은 3선 국회의원으로 현재 한나라당 재외국민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서 의원의 이번 밴쿠버 방문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영화 ‘에일리언 비키니’ 배우 홍영근
“어렸을 때, 홍콩 영화에 열광했어요. 영화 속 배우들은 제 우상이었죠. 그때부터 ‘나도 연기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왔어요. 성인이 된 후에는 연기가 선택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찌질한 사람들의 일상 고스란히 훔쳐 본다면…”
김동명 감독도 용호상 부문에 진출한 또 한 명의 반가운 얼굴이다. 밴쿠버 국제영화제가 주목하고 있는 김 감독의 작품은 ‘피로’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찌질한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
마이너리트를 품은 영화감독 김경묵
김경묵 감독의 시선은 늘 ‘마이너리티’를 향해 있다. 특히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김 감독은 자신의 영상언어를 통해 사회적 통념상 받아들이기 힘든, 그래서 불편한...
“탄자니아 우물을 만들어 주기 위한 29주년 정기 연주회”
넉넉한 사회에서는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쉽게 눈치 채기 힘들다. 물도 그런 사소한 것들 중 하나다. 단수가 되지 않는 한 불편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똥파리><애정만세> 양익준 감독
이 남자의 이력 참 특이하다. 직접 연출하고 주연까지 한 ‘똥파리’라는 작품으로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그려내는가 싶더니 다음 작품 ‘집 나온 남자들’이라는 영화에서는 코미디...
로터스 정씨 11•19 지방선거 출마
11월 19일 치러지는 BC 지방선거에 한인 로터스 정(한국명 정병연)씨가 출마해 버나비 시의회 입성을 노린다. 정씨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버나비시 교육의원직에 도전한 바 있다. 이번이...
이관호•이영은 부부
이관호씨(53)의 인생에서 쉼표란 없었다. 사소한 곁눈질 한 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그였다. 믿음직한 아들,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 그는 순항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를 막아선 것은...
아메니다 한인담당 이윤경씨
2002년 11월 이윤경씨는 홀로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그래서 더욱 힘겹고 외로운 선택이었다. 한국의 한 대형은행에서 VIP 고객을 전담 관리했던 그녀에겐...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