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순 / (사)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지부
“Hi, My name is Seung li Park, I’m from Korea. 나는 영어를 조금밖에 못 해.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도와줄 거지?”
나는 더듬거리며 겨우 인사를 했다. 유학 오기 전부터 이 문장을 달달 외웠다. 막상 아이들 앞에 서니
머릿속이 하얘져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멋있게 잘하려고 했는데 속상했다.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5학년 여름 방학 때 캐나다로 유학 왔다. 캐나다는 9월이 새 학기다.
“삐이익, 삐이익!”
인사가 끝나자 사방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Hey, Monkey!”
머리카락을 칼같이 세우고 총천연색 물을 들인 아이가 큰 소리로 야유를 했다. 전통 있는 명문
사립학교라 안심하고 선택했는데 예사롭지 않다는 감이 딱 왔다. 캐나다 사는 막내 이모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학교였다. 영국본토 카톨릭 학교로서 기숙사가 있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다. 유일하게 교복을 입는 학교다. 이 학교는 대부분이 백인이며, 유학생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에 한국 학생이 몇 명 있다고 했다. 인터넷 화상 미팅으로 1대1 영어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입학허가서를 내주는 까다로운 학교다. 물론 필기시험도 화상으로 쳤다.
2학년 때부터 영어학원에 다녀 그쯤은 아주 쉬웠다. 엄마는 교복을 입는 학교라서 선택한 학교라고
했다. 나 자신도 교복을 입으면 규율 안에 있어 안심 될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이 학교에 저런 아이가
있다니 의아했다. 아무리 모든 게 자유로운 외국이라지만 두 눈을 뜨고 못 봐줄 노릇이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내가 지금은 영어가 시원찮으니 참는다. 한 달만 기다려라. 대한의 아들인 나를 멍키? 참을 수
없지.’
나는 속내를 감추고 부드러운 작전을 쓰기로 했다. 바보처럼 씨익 웃어주었다.
“킥킥킥!”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것은 한국 우리 반 아이들이 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던! 만만찮은 상대인데 조심해야겠다.”
잘 생기고 스마트해 뵈는 남자아이가 멍키라고 하던 그 아이를 보고 말했다. 저 아이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스쳐 갔다.
“만만치 않긴? 차이니스 주제에.”
녀석 이름이 조던이라고 했다. 녀석은 끝까지 나를 얕잡아 보았다.
“Anywhere sit down. Seungli!
엘리샤 선생님이 짧게 말했다. 어차피 길게 해도 못 알아듣는다는 생각했을 것이다. 앉고 싶은 곳 아무
곳이나 빈자리 찾아 앉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교실을 한번 휙 돌아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교실
분위기를 다 파악했다. 교실 분위기는 한국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거라면 아이들 생김새가
다를 뿐이었다.
조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겨냥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우리 속담이 생각났다. 걱정하고 있을 엄마 말이 귀에 쟁쟁했다.
‘승리야, 절대 나쁜 아이들 사귀면 안 되는 거 알지?’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전 지금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처음에 바보처럼 구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중학생 사촌 형이 일러주었다.
“승리, 백인들 되게 잘난 척하지만, 순수해서 칭찬을 조금만 해주면 금방 친해져. 여기 아이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든. 대신 잘난 척하면 왕따야. 네가 적응할 때까지만 바보인 척하는 거야.”
“형,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야.”
형은 캐나다에서 태어났는데도 한국말을 잘한다. 이모부가 어릴 때부터 가르쳤다고 했다.
내가 유학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조던은 여전히 까칠하게 굴었다. 첫날 조던에게 만만치 않은
아이라고 조언했던 그 아이 이름이 스캇이었다. 스캇은 나를 도와주었다. 내가 잘 못 알아들은
과제라든가. 학교 구석구석을 안내해주기도 하고 수업 중 이해 못 한 부분들은 통역도 해 주었다. 물론
한국말로 통역을 하는 게 아니다. 천천히 영어로 다시 말해 주면 문화적인 차이 외는 거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승리! 영어 실력 많이 늘었다.”
“고마워, 스캇 덕분이야.”
조던은 이런 우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스캇! 날 배신하면 그 대가는 치러야 할 거다!”
“어려운 친구 도와주는 게 왜 못마땅한지 모르겠다.”
스캇은 자기주장이 또렷한 아이였다.
첫 번째 시험을 쳤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모든 게 시험성적으로 평가되었다. 조던은 불량배처럼
보였는데도 우리 반에서 전 과목 액설런트를 받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아이가 공부를 잘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아 뜻밖이었다. 수업 중 조리 있게 발표를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인지는 몰랐다. 나 역시 영어, 수학, 과학 에세이에서 액설런트를 받았다. 그 뒤 조던은 더
까칠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호랑이를 잡는 데는 시간과 작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감히 원숭이 주제에 내 자리를 넘봐!”
그날 오후 내 책가방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이미 아이들은 하교하고 스캇만이 나를 도와 책가방을
찾으려 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조던 그 자식 소행이 틀림없어.”
스캇이 흥분했다. 청소도구함, 라커룸 등 숨길만 한 곳은 다 찾아보았다. 한참 뒤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책가방이 처박혀 있는 것을 스캇이 발견했다. 오줌까지 갈겨 놨다. 찌른 내가 진동했다. 나는
밤늦게까지 체육관에서 글러브도 끼지 않은 채 샌드백을 두들겼다. 그래도 울분이 가시지 않았다.
저녁에 침대에서 벽을 붙잡고 누웠다. 눈물이 났다. 룸메이트가 들을까 봐 입술을 깨물었다. 목에서
꺽꺽! 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엄마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울지 않으려고 이를 더 세게 앙다물다.
그런데도 자꾸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하고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아빠 말이
생각났다.
‘아들! 남자는 말이야, 태어나서 딱 세 번만 울어야 해. 태어날 때 한번, 부모가 죽었을 때 한번, 나라를
잃었을 때 한 번!’
공항에서 아빠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 말이었다.
“염려 마세요. 제 이름이 승리잖아요. 승리하고 돌아올게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속상할 때면 아빠의 그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조던만 빼면 그런대로 학교생활은 무난했다. 첫 시험 후 여자아이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특히
티나가 관심을 보였다. 금발 머리에 예쁜 아이다. 티나가 말을 걸면 손에 땀이 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로윈 데이 파트너 놀이에서 티나가 조던 앞으로 가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티나가 나를 파트너로 지적해 주길 바랐다. 티나가 나와 조던 앞을 왔다 갔다 하더니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아아아!”
조던이 괴성을 질렀다. 소란을 피우면 파티에서 추방당하기 때문에 조던은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파티 내내 신경이 쓰였지만, 별 탈 없이 파티를 마칠 수 있었다.
내가 맞는 캐나다 첫 겨울은 영하 30도였다. 하키 게임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 먹은 게 소화가 안
되었는지 배가 아파 화장실에 다녀왔다. 이미 오프닝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유니폼을 갈아입으려 라커룸에 갔다. 라커룸에서 신음이 들렸다. 조던이 라커룸 구석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조던! 왓 헤픈?”
조던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모두가 수업 중이라 라커룸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조던을
업고 보건실로 뛰었다.
“Help me!”
그날 조던은 맹장 수술을 했다. 맹장이 터져 위험한 수술이었다. 조던이 마치에서 깨어날 때까지 옆을
지켰다.
조던이 깨어나면서 엄마를 불렀다. 내가 조던 손을 잡았다. 조던이 눈물을 흘렸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도로 눈을 감았다.
“자식! 울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우는 거래.”
티슈를 건네주었다.
“너 내가 안 미워?”
“밉긴! 네 덕에 내가 이렇게 적응 잘하고 있는데. 호랑이 굴에 들어오길 잘 했네.”
“승리, 무슨 뜻이야?”
“뭐든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뜻이야.”
조던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승리, 고마워! 난 늘 불안했어. 공부도, 싸움도 모든 걸 내가 이겨야 했거든.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야. 숨이 막혀. 그래서 엄마랑 이혼했어. 울 엄마 엄청 착하거든. 겉으로는 바보같이
보일 만큼. 승리 너처럼.”
“하하, 내가 겉으로는 바보처럼 보였어? 근데 지금은?”
“하하! 내가 속았지. 윽!”
조던은 크게 웃다 배를 움켜쥐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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