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오늘은 신문처럼, 내일은 신문지처럼

정성화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01-06 08:40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창가로 비쳐드는 아침 햇살과 신문, 그리고 향이 그윽한 원두커피 한 잔, 이것이 우리 집
‘아침 3종 세트’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제 막 나온 것’이다. 오늘의 기사가 궁금한지 내가
펼치는 면마다 햇살이 저 먼저 고개를 드민다. 키가 작은 커피 잔도 계속 하얀 김을 전령으로
내보내며 소식을 기다리는 눈치다. 신문에 쏠리는 눈들이 아침을 더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신문 기사는 대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의 온도는
오르락내리락한다. 의안을 한 건도 가결하지 않은 채 회기를 넘긴 국회의원들의 세비를
생각하면 열이 나고, 내수경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는 기사에는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러다가 사회면에 들어가 누가 온정을 베푼 사연을 읽고 나면 다시 마음이 뜨듯해진다.
허투루 쓴 기사가 없다. 가끔 두 면에 걸친 전면 광고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 또한 신문사의
허리를 받쳐주는 힘이라 생각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신문은 그날이 지나가면 ‘신문지’가 된다. 이게 또 매력 덩어리다. 신문이 갓 시집온 새댁
같다면 신문지는 살림꾼이 다 된 아낙과도 같다. 못 하는 게 없고 가리는 일이 없으며
궂은일일수록 두 팔을 걷어붙인다. 콩나물이나 멸치를 다듬으려고 할 때, 어쩌다가 주방
바닥에 식용유를 쏟았을 때, 중국 음식이 배달됐을 때, 소포 상자에 어정쩡하게 남은 빈

공간을 채울 때 등 그때마다 신문지가 나선다. 가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싶을 때에도
야무지게 접힌 신문지가 들어가서 평형을 맞춘다. 신문지가 우리 집 해결사다. 구겨지고,
접히고, 잘리고, 뭉쳐지면서 제게 맡겨진 일을 잘도 해낸다.
사람의 일생도 그런 것 같다. 젊어 한때 주목받는 ‘신문’이 되지만 곧 ‘신문지’의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신문’으로 살았던 때를 곱는다면 아마 첫 부임지에서 근무하던 시절일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학교로 달려갔다. 초임 교사로서 꿈도 많았고 할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생활하는 게 즐거웠다.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조간신문’이었다. 항상 일찍 출근하는 것을 빗댄 별명이었다. 동료들에게 다소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신문’하면 성실함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별명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고는 했다. 매일 새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지, 모든 아이들에게 공정한지를.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내 몸에 맞지 않을 때는 벗어 놓을 수밖에 없다.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느 일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세 살 된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한껏 억양을 살려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자꾸만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걸레 하나를 손에 들고 와서는 거실 유리문에 붙어 서서 유리를
닦는 게 아닌가. 저를 돌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하는 양 그대로였다. 그 다음에는 걸레를
뒤집어 거실 바닥도 닦고 식탁 의자의 다리도 닦았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에 지는 것
같았다.

교직을 그만두고 나니 한동안 공허하고 울적했다. 애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마치
전쟁을 치르는 듯 힘겨웠다. 그러나 나는 분명 이전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었다. 가끔
‘119대원’이 되어 시댁이나 친정으로 출동도 해 가면서 내가 그렇게 바뀐 데에는
시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참 바쁘게 사셨다. 너무나 바빠서 죽을 새가 없다고 하셨다.
당신 도움이 필요한 자식이 많다는 것을 항상 기쁘게 생각하셨다.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한
딸을 병간호하느라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숙식하신 적이 있다. 집을
팔려고 내놓은 둘째 딸 집에 가서 부동산 사무실의 연락을 기다리며 그 집 강아지와 함께 두
달간 집을 지키신 적도 있다. 노환으로 더는 거동을 못하게 된 어머님을 뵈러 갔더니 누운
상태로 당신 배 위에다 소쿠리를 얹어 놓고 깻잎을 차곡차곡 챙겨 실로 묶고 계셨다. 깻잎
김치를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서라고 하셨다. 손가락에 남은 마지막 힘까지 가족과 집안을
위해 다 내어 주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나는 문득 신문지의 마지막 한 장을 떠올렸다.

잘 살다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죽고 난 뒤에 그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잘 산 삶이 아닐까. 그리고 신문지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이 세상에 다 내어주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삶이 아닐지. 오늘은 신문처럼, 내일은 신문지처럼 살다 가는 것은
어떨까. 매일 아침 문 앞에 놓인 ‘세상’을 집어 들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칠월의 에필로그 2025.07.04 (금)
초록이 물오르면포도 광주리에 둘러앉아시퍼런 입술들이 깔깔대며구름 위를 달린다포식자의 먹잇감이풀을 뜯는 칠월은가슴에 품은 진초록이다칠월마다 삶의 이삿짐이옮겨갔지만진초록이 마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칠월은등줄기 진땀이어미의 젖가슴을훑고 가는 여름감기나의 노스텔지어 칠월에발을 담구면시리고 저리는 삶의 변주곡이장조로 화답을 한다
반현향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호텔 신세를 지곤한다. 강남보다는 강북에 있는 호텔을 선호한다. 강남은 남에 나라에 온 것 같아 낯설다. 그래서 강북에 머문다. 60년대 모습과 정감이 조금은 남아 있어 길 찾기가 편하다. 또 혹시나 내가 남긴 옛 추억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해서다. 50년대 후반 주경야독, 신문팔이, 고학시절, 자주 찾던 신문사들이 아직도 현존하는 광화문 근처에 머물고 있다. 석간 신문을 박아내는 우렁찬...
심정석
만년설 2025.07.04 (금)
소복이 쌓인 눈이어느새 쌓인 눈이하얗게 쌓인 눈이 봄이 왔다고마음대로 눈물이 된다 숨죽여 울고소리 내어 울고가슴 치며 울어도 녹지 않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
문선혜
분가 2025.07.04 (금)
    아들이 분가했다. 처음 집을 떠나 독립해서 살아보겠다고 했을 때, 내 안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훅! 들어왔다. 살인적인 고물가, 렌트비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아이가 지는 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그런 염려스러운 엄마 맘이 먼저였다. 장남에게 은연중 믿고 의존해 왔던 내 기대어진 몸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아이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혜롭고,...
고희경
아침 이슬이여, 너는 어둠의 울타리에 걸어 놓은  내밀(內密)의 창(窓) 지순한 그리움의 초상이구나    춥고 습한 긴밤들을 눈물로 견디며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결국 숭고한 환희로 통하는 길이라는 지혜를 터득한 너의 맑은 이마여!                                           ...
안봉자
작은 아씨 2025.06.27 (금)
  어머니는 젖이 풍부하신 분이셨다. 우리 형제들을 키우면서도 일부러 젖을 떼려고 애쓰지 않고 아이가 먹겠다면 언제까지고 먹이려고 하셨다. 나도 거의 세 네 살까지 젖을 먹었다고 들었다. 내 밑에 막내 동생은 여섯 살이 넘도록 젖을 먹었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도 들어와서는 어머니 품을 파고들어 젖을 먹었다. 주위 사람들이 젖을 떼지 다 큰 애를 무슨 젖을 먹이냐고 하면 어머니는 이제 더 먹일 아이도 없는데 나오는 젖을, 먹겠다는...
심현섭
그리움 2025.06.27 (금)
사그라져 가는 물안개 아침 햇살에 부서지고   파도가 뿜어낸 당신 닮은 은빛 숨결 물 비늘이 허공 위로 흩어지네   그대 향한 서성임이 아픔의 태산 되어 울고   요란한 살여울 지쳐 밀려온 그 자리 차디찬 빙산 이어라   볕 뉘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당신 목소리에 오늘도 목이 메이네
김정임
바람이 전해준 말 2025.06.27 (금)
  캐나다 웨이에서 오클랜드 스트리트로 우회전 핸들을 틀자마자, 눈부신 초록의 나라가 시야에 확 펼쳐졌다.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시원해진다.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되는 설국(雪國)의 첫 페이지가 떠올랐다. 하얀 눈의 나라로 들어가는 대신, 나는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든 별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은 조금 지나면, 디어 레이크 파크 숲을 우측으로 끼고 돌면서 계속...
지연옥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