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살아있는 자의 슬픔

권은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6-18 15:20

권은경/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생명의 빛이 온 세상을 따스하게 비추는 초여름이다. 풀과 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푸르게
물들고, 꽃들은 알록달록 사방으로 퍼져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고 있다. 눈을 들어 보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인 것처럼 힘찬 기운을 뿜어낸다. 마치 슬픔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렇게 말간 얼굴로 계절은 다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죽음이란 말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날에 고모는 죽음을 맞았다. 하나뿐인 아빠의 동생이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고모가.
 
고모는 여장군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씩씩했다. 공무원인 남편의 얄팍한 월급봉투에 불평
한 번 하지 않았고, 부족한 부분은 늘 제 손으로 벌어 채웠다. 작은 식당을 열고, 맛깔스러운
한 상을 차려내던 고모. 고모는 음식 솜씨가 좋고 인정이 넘쳤다. 손님상의 음식들은 모두
신토불이 특산품으로 만들어졌다. 밥이며 국, 반찬 하나하나에까지 고모는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엄마의 마음을 담아냈다. 작은 식당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고, 고모는 점점 더
바빠졌다. 고모의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와 화통한 웃음소리는 그녀의 손끝을 통해 퍼져
나오는 참기름 냄새만큼이나 구수하고 맛났다. 식당 일이 고되었을 텐 데도 고모의
발걸음에는 언제나 힘이 넘쳤고, 신선한 고기와 채소를 사 나르는 팔의 근육은 단단히
단련되어 있었다.

고모는 아들이 둘이다. 어릴 때부터 짓궂고, 말썽 많던 아들들을 키워내느라 고모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고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살을 꿰매야 했던
아들내미 뒤치다꺼리에 고모는 편할 날이 없었다. 고모의 아들들이면서 나의 고종사촌이
되는 녀석들은 사춘기도 참 별나게 보냈다. 집안 살림에 식당 일까지 겸하는 바쁜 엄마의
사정을 조금만 알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는 어른들의 기대는 빗나가기 일쑤였다.
씩씩한 여장부 고모도 아들의 일 앞에서는 늘 겁먹은 아이가 되곤 했다. 고모의 전화를 받는

날이면 아빠는 바람처럼 현관문을 박차고 동생에게 달려갔다. 이것은 고모의 아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아빠는 고모를 늘 어린아이처럼 여겼던 것 같다. 때로는
무엇이 못마땅 한지 고모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딸아이를 달래 듯 부드럽게
타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고모가 아들 문제로 속을 태울 때면 아빠는 잔뜩 그늘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고생 하는 동생이 안쓰러워 남몰래 한숨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 두 아들이 엄마의 눈물과 사랑을 먹고 지금은 너무나 훌륭한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어느덧 고모의 장성한 아들이 장가를 가고, 아빠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부는
퇴직했고, 고모도 전에 없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SNS로 전해지는 고모의
노년은 참 평온했다. 고모는 연분홍 진달래꽃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옛적 열 여섯 소녀처럼 화사한 얼굴로 수줍게 웃고,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여장군 고모의 평온한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고모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폐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어디가 특별히 아팠던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던 고모는 단지 매년 받던 건강 검진을 받았을
뿐인데 의사는 꿈에서도 생각 지 못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침상을 받아 놓고 굵은 눈물을 흘리던 아빠는 곧 소리 내 꺼이꺼이 울었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가련한 동생 때문이었다. 그 후로 고모는 항암치료를 받았고, 삼 년을 더 살았다.
이년 전에 고모를 마지막으로 봤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도 모른 채. 고된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진 고모는 멍한 눈으로 살고 싶다고…. 조금 더 살고 싶다고
속삭이다 가는 이내 엄마가 있는 곳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 단다. 어쩌다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고모는 이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며 울먹였다. 그럼 나는 의연한 척하며
곧 보러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고모를 만나면 따뜻하게 두 손을 맞잡고, 아무
염려 말라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이틀 후면 고모를 만나러 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고모는 그 이틀을 기다려 주지 않고 먼 길을 떠나버렸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가끔 시누이
노릇을 하는 고모에게 엄마를 대신에 바른말을 쏟아내던 조카가 얄미웠을 법도 한데 고모는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나도 고모를 사랑했다. 늘 씩씩해 보였던 고모가 얼마나
여린 마음을 가졌는지도 어른이 되고 알았다. 그녀의 과장된 몸짓과 웃음의 의미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였음을 언젠가부터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고모를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고모가 아플 때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기회가 없다.
 
고모가 떠나고 없는데도 세상은 푸르고 찬란하게 생명을 과시한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
괴롭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찮다. 그리고 아빠를 떠올린다. 하나뿐인 동생을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우리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할까? 고작 환갑을 넘기고 간 동생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아빠는 또다시 목놓아 울 것이다. 이제 아빠가 아프다고 해도 울면서
쫓아올 동생은 없다. 진하게 고운 사골국을 싸 들고 수선을 떨며 들어올 고모는 없다. 고모의
걸쭉한 강원도 사투리도, 그 호탕하던 웃음소리도 이젠 들을 수 없다. 살아있는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의 슬픔을 간직한 채 나는 이 눈부신 계절을 한탄하며 고모를 기억한다.
고모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녀의 사랑은 아직도 살아서 흐르고 있다.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마주 보고 웃을 수도 없는 고모가 나는 벌써 그립고, 보고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2025.07.11 (금)
엄마를 잃고도밥은 먹어야 한다고눈 붓도록 울고도숟가락은 들어야 한다고눈물 섞인 국도삼켜야 한다고뜨거운 불의 식사 밥을 먹는다배고픔은 슬픔을없애주지 않는다엄마가 사라진 방 안에도밥상은 놓인다빈자리가 뼈처럼 드러나도뜨거운 불의 식사밥은 식지 않는다남편 잃고홀로 9남매를 길러낸울 엄마자식이 뭔지밥 묵고살아내게 되더라살아지게 되더라 란 말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가장 잔인한 위로 같다이젠 부를 엄마도 없는데목구멍은...
김회자
  지난 5월, 빌 게이츠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재산 중 99%를 기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미 지난 25년 동안 1천억 달러 넘는 돈을 사회에 환원했는데, 앞으로 20년 동안 1,070억 달러(약 150조 원)로 추정되는 그의 재산 중 1퍼센트만을 남기고 모두 세상에 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어떤 책에서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김보배아이
오늘이 그날이다 2025.07.11 (금)
   오늘은 아내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68년이 되는 날이다.예전 같았으면 달력에 큰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리고, 별표와 하트도 그려 넣었을 테지만, 오늘 서재 왼쪽 벽에 걸린 달력에는 그런 표시 하나 없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 아내의 생일이 오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여 놓고 출근하곤 했다.아내는 아침 잠이 많아 내가 출근한 뒤 에야 일어나기 때문에,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아예 기대하지...
우제용
칠월의 에필로그 2025.07.04 (금)
초록이 물오르면포도 광주리에 둘러앉아시퍼런 입술들이 깔깔대며구름 위를 달린다포식자의 먹잇감이풀을 뜯는 칠월은가슴에 품은 진초록이다칠월마다 삶의 이삿짐이옮겨갔지만진초록이 마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칠월은등줄기 진땀이어미의 젖가슴을훑고 가는 여름감기나의 노스텔지어 칠월에발을 담구면시리고 저리는 삶의 변주곡이장조로 화답을 한다
반현향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호텔 신세를 지곤한다. 강남보다는 강북에 있는 호텔을 선호한다. 강남은 남에 나라에 온 것 같아 낯설다. 그래서 강북에 머문다. 60년대 모습과 정감이 조금은 남아 있어 길 찾기가 편하다. 또 혹시나 내가 남긴 옛 추억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해서다. 50년대 후반 주경야독, 신문팔이, 고학시절, 자주 찾던 신문사들이 아직도 현존하는 광화문 근처에 머물고 있다. 석간 신문을 박아내는 우렁찬...
심정석
만년설 2025.07.04 (금)
소복이 쌓인 눈이어느새 쌓인 눈이하얗게 쌓인 눈이 봄이 왔다고마음대로 눈물이 된다 숨죽여 울고소리 내어 울고가슴 치며 울어도 녹지 않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
문선혜
분가 2025.07.04 (금)
    아들이 분가했다. 처음 집을 떠나 독립해서 살아보겠다고 했을 때, 내 안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훅! 들어왔다. 살인적인 고물가, 렌트비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아이가 지는 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그런 염려스러운 엄마 맘이 먼저였다. 장남에게 은연중 믿고 의존해 왔던 내 기대어진 몸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아이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혜롭고,...
고희경
아침 이슬이여, 너는 어둠의 울타리에 걸어 놓은  내밀(內密)의 창(窓) 지순한 그리움의 초상이구나    춥고 습한 긴밤들을 눈물로 견디며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결국 숭고한 환희로 통하는 길이라는 지혜를 터득한 너의 맑은 이마여!                                           ...
안봉자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