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LP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한참 노래를 듣다가 오디오를 껐다. 고요해진 방 안에 여전히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 마지막 소절이 짙은 여운으로 맴돌았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주는 명곡. 오늘도 그 노랫말에 깊은 마음을 얹고 지그시 눈을 감자,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맺혀 흘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상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건강하셨던 두 분이… 작년 가을, 아버지는 15년 전 수술을 받으셨던 지주막하출혈이 재발하면서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고, 결국 치매로 이어졌다. 나는 황급히 아버지 곁으로 달려가 석 달 동안 함께 생활하며 병세가 호전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결국 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지셔야만 했다. 평생 함께 살아온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곁을 떠나 요양병원으로 가버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저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셨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시간이 갈수록 커다란 불안과 스트레스로 변해갔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잠자리에 드셨던 어머니는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중환자실을 거쳐 아버지와 같은 요양병원으로 옮겨지셨고, 어머니는 지금도 혼수상태이다. 한 지붕 아래 평생을 함께 살아오신 두 분이 이제는 같은 병원에서 서로 다른 병상에 누워 계신 것이다.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 상황 역시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내 인생, 나의 길이다.
부모님과 정든 고향, 그리고 형제자매를 태평양 너머에 남겨둔 채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너른 품을 내어준 꿈의 나라 캐나다로 떠나온 지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기나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오며 고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남긴 발자취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하나둘 선명하게 펼쳐졌다. 참으로 다양하고도 굽이진 길을 지나왔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인생길을 걸어간다고 하지만, 유년과 청춘을 지나 중년을 거쳐 걸어온 나의 궤적을 돌아보면 다채로우면서도 험난한 고개가 적지 않았다. 어떤 길은 눈앞이 훤히 트여 있음에도 두 발이 겁을 먹어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들어섰고, 또 어떤 길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의 거센 물결과 풍파에 떠밀려 얼떨결에 발을 디뎌야 했다. 그런가 하면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낯선 길목 깊숙이 들어서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빗장을 하나씩 열며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 시절에는 ‘왜 이리 험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섰을까?’ 하며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고, ‘이 길이 아닌 다른 평탄한 길을 걸었더라면 내 삶이 훨씬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며 깊은 후회에 잠기기도 했다. 한때는 곧게 뻗은 탄탄대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친구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처럼 그 길을 가겠다며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오히려 굽이진 비포장도로를 만나 진흙탕을 뒤집어쓴 채 망연자실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자신을 탓하며 삶의 의미마저 흔들리던 때도 있었다.
지금 나는 기나긴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고, 인생의 뒤안길에 서서 지나온 나의 길을 차분히 돌아볼 나이가 되었다. 어쩌면 세상에는 칼로 베어낸 듯 분명한 ‘옳은 길’과 ‘틀린 길’이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저마다의 빛깔과 사연을 품고 걸어온 서로 다른 길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거친 가시밭길을 걸으며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포기하고 싶었던 길도, 가파른 언덕을 홀로 오르며 힘에 부쳐 다시는 오르지 않겠다며 거친 불평을 쏟아냈던 길도, 결국에는 모두 저마다의 삶의 교훈과 뼈아픈 배움을 품은 소중한 여정이었다. 비록 그때는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 거친 길 위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모여 오늘의 단단한 나를 만들었음을 이제는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 삶 속에서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알량한 지식과 얄팍한 계산만으로 반듯하게 설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몸을 싣고 흘러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길 역시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선택하고 결정해 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선택했다고 믿었던 길조차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에 이끌려 들어선 길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걷게 될 길 역시 내가 원하는 대로만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뜻밖의 거센 바람에 떠밀려가고, 때로는 깊은 물결에 조용히 몸을 싣듯 그렇게 걸어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다가올 날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지만, 흐르는 대로 그 순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유연함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는 어떠한 길이 내 앞에 나타나도 조급하게 생각하거나 따져보려 하지 않으려 한다.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더 지혜롭고 안전한 길인지 고민하는 대신에 내게 주어진 그 길 위에서 당당하게 그저 묵묵히 두 발을 내딛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정답인 길이란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걷는 길이 진흙탕이든 아름다운 꽃길이든, 그 길 위에서 슬퍼하거나 화내기보다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면, 그것이 곧 나만의 진정한 길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옳은 길을 찾아 헤매는 방황의 여정이 아니라, 내가 걷는 모든 길을 기꺼이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완주해 나가는 아름다운 순례가 아닐까?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불안감 역시 받아들여야 하는 내 삶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깊은 생각과 묵상을 마친 뒤, 나는 조용히 눈을 뜨며 일상의 평온 속으로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새 나는 LP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다시 올려놓고 있다. ‘ My Way’를 다시 듣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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