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멋지네’
사하라
사막에서 보내온 아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정지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굽이굽이
펼쳐진 모래 결
위에서 낙타에 올라탄
채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모래바람이 사진
밖으로 불어오는 듯해
농담처럼 대꾸했다. 나도
연말에 적금 타면
낙타를 사겠노라고. 하지만
사진을 덮고 난
뒤에도 시선은 한참이나
허공을 헤맸다. 사실
원하던 것은 낙타가
아니었다. 모래 위를
걷는 ‘시간’을
사고 싶은 마음이
천천히 모래 결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삶의
소음이 하루 종일
귀를 때리는 현실에서,
나는 침묵 위를
걷는 시간을 갈망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막 하나를 품고
있었다. 그 사막은
황금빛 모래 위가
아니라, 분주함과 욕망,
사회적 동물로서 차려야
하는 체면 뒤에
숨어 있었다. 세속의
허황된 말과 기대가
모래바람이 되어 뒤에서
불어오면 그만 길을
잃었다. 사막을 적셔
줄
물이 있는 곳을
찾았다. 낙타가 아닌
종소리, 모래 대신
회색 돌담, 고독과
침묵 속에 내
자리가 있음을 알았다.
그곳은 신앙의 공간을
넘어,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자아를 마주하게
하는 장소였다.
친구들은
묻는다. 왜 하필
고립과 절제의 상징인
수도원이냐고. Y는 내가
거기 들어가면 페이스북
못해서 안 된다
하지만, 내 숨결은
이미 오래전부터 회색
돌담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느 작가의
수도원 기행문을 열렬히
탐독했고, 유튜브에서 얼마나
봤는지, 알고리즘이 밀어
올리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종소리에 넋을 잃는다.
성소자가 줄어 문을
닫는 곳이 늘어간다지만,
천
년을 버텨온 차가운
돌벽에는 여전히 기도의
숨결이 스며있을 것이다.
그
돌
위에 손을 얹고,
내
안의 분주한 파도를
잠기게 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삶의 굽잇길마다 수도원은
늘
간이역처럼 다가왔다. 처음으로
오래 머물렀던 남양주
요셉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회의 회칙을 온몸으로
배웠다. 배밭에서 일하다
종이 울리면 미련
없이 삽을 내려놓고
성당으로 향하던 수사님들의
뒷모습.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그
정직한 단절은 삶의
첫
칼날이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더 많은
것을 찾으러 헤매고
다녔다. 도착한 날,
실컷 자고 난
뒤
벽에 걸린 십자고상이
건넨 무언의 위로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섰다. 내가
붙들고 살던 욕망의
문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퇴소 길,
숙박비 대신 마음만
헌금함에 놓고 가라던
그들의 계산법에 세상
탐욕의 무게가 부끄러웠다.
태백
예수원은 종파를 초월한
곳이다. 디지털 디톡스를
선언한 내게 최적격지.
안내실에 휴대전화를 맡기자,
세상과 이어진 마지막
끈을 스스로 끊어냈다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저녁
식사 후 ‘대
침묵’이 시작되어
입을 닫자, 비로소
마음이 말을 걸어왔다.
묵언은 소리 없는
공백이 아니라, 영혼이
다시 숨을 얻는
공간이라는 것을 그곳의
소박한 식탁과 낮은
찬송 속에서 찾았다.
말이 줄어들수록 생각은
투명해졌다. 내면의 소음이
잦아들자, 비로소 허접한
민낯이 보이기 시작했다.
퇴소하면서 돌려받은 전화기가
낯설었다.
강화
바다의 일몰이 가슴까지
스며들던 관상수도원, 퀘벡의
Saint-Benoit-du-Lac, 늦가을 바람
속에서 세상 평화로운
표정을 짓던 수사님의
올이 드러난 목도리.
‘적게 가진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BC 미션의 종탑과
데로쉬 카르멜산의 ‘십자가의
길’에서도 늘
같은 질문이 나를
향해 왔다. 무엇을
위해 앞만 보고
분주히 달렸는가.
그리고
환갑의 선물로 찾은
몽생미셸의 돌계단을 오르며,
왜
그토록 허겁지겁 살아왔는지를
돌아봤다. 밀물과 썰물
사이에 아스라이 떠
있는 몽생미셸처럼, 나
역시 세속과 영성의
경계 그 어딘가에서
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을
느낀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흔들릴지언정 중심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는 순례였다.
이제
생의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원들을 꿈꾼다. 토머스
머튼의 영성이 깃든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하루
일곱 번의 기도와
긴
침묵 속에 나를
던져두어야지. 빈곤은 결핍이
아니라 자유의 다른
이름임을 확인해야 한다.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며,
가난은 영혼의 자유"라는
그들의 모토는,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
쳤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한다. 죽으면 관도
없이 입던 수도복
그대로 땅에 묻히는
수도자들의 무소유로 증명하는
삶의 풍요로움, 그
앞에서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의 무게와
부질없는 감정의 사치를
봉헌하고 올 것이다.
한
달
만이라도 인터넷을 끊고,
뉴스를 끊고, 성서
한
구절을 입안에 넣고
온종일 굴리며 침묵이
말이 되는 시간을
살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
안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정돈되고, 깊은 곳까지
내려앉은 세상의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순간을
만나고 싶다. 오늘도
마음속 회색 돌담을
따라 묵묵히 걷는다.
나지막한 종소리가 울릴
때, 비워진 자리에
천천히 채워질 고요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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