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사전 준비 세미나를 찾았다.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이 보인다. 오랫동안 그를 만나고 싶었다. 한 생(生)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을 경험한 이, 그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이다. 죽음은 인생이 피할 수 없는 필연이지만, 종잡을 수 없고 순서가 바뀐 죽음은 한(恨)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 나는 그런 삶을 만나면 다가가 말을 걸고 싶다.
매일이 지옥 같아 꿈이길 간절히 바랐던, 살아갈 의지조차 없던 시간에도 허우적대고 싶지 않아 그는 새로운 일을 찾았다. 누구나 언젠가 마주하게 되는 죽음,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남겨진 가족들을 돕고 싶어 엄마는 장례 플래너가 되었다. 인간의 회복력은 슬픔으로부터 회피가 아니라 마주함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던가. 죽음을 가장 외면하고 싶을 그가, 장례를 준비하는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삶을 원망하며 살아간다면 인생이 비극으로 끝날 것 같아, 허락된 시간을 고귀하게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무엇보다 훗날 아들을 다시 만나면,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그가 살아야 할 이유에는 아들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더해졌다. 아들 규민이가 엄마 곁에 두고 간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같은 슬픔을 공유한 사람들 곁에서 장례 절차를 돕고, 묘지공원에서 평화를 찾는다.
우리를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상실의 신비. 어떻게 슬픔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까. 상실이 우리를 기꺼이 삶의 진심에 닿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으로서 유쾌하고 진취적인 삶의 태도를 가졌다. 장례 사전 준비 세미나에서 만난 그는 젊고 활기찼다. 자신의 살갗 같은 아이를 잃은 그가, 어둡고 암울한 장례 문화를 좀 더 편안하고 산뜻하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일을 대하고 있는지 헤아려졌다. 일터에서 만난 그는 자신이 가진 고유한 빛을 잃지 않았다. 아이를 보낸 경험 이후,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에서 마주한 모든 얼굴이 애틋하다. 이 사람은 고통이 가진 깊이를 온전히 감내해 삶을 아름다운 의미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이유’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와 싸우던 시절, 빅터 프랭클은 자신과 수용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라는 점을 알고자 했다. 시련을 피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주하는 것 자체가 삶이 나에게 부여한 이유라는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가장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언어에 자식을 잃은 부모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이런 상황을 표현할 단어조차 남겨두지 않은 건 감히 담아내거나 정의할 수 없을 만큼의 참혹한 고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의 증거’로 살겠다는 규민이 엄마, 젬마. 결국 그는 아들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아이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시련이 의미를 가지려면, 남은 삶을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한다. 아들의 남겨진 몫까지 살아간다는 이유가 있어 엄마의 삶은 계속된다. 문득 아들의 부재가 크게 찾아와 먹먹한 마음에 견디기 힘든 날에도, 엄마 안에 살고 있는 규민이가 엄마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가기 때문이다. 소년의 밝은 웃음이 엄마 안에 있어서, 엄마는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모자(母子)의 시간을 내어주며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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