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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길 위의 여행

정효봉 jacob@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6-04-24 08:49

정효봉/(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헉, 헉, 심장이 터질 듯 다리가 마비될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의 뇌는 달리고 있는 다리, 정확히 말하면 허벅지 뒤쪽 근육, 햄스트링에 계속 더 힘을 내 달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십여 분간 뇌와 다리가 사투를 벌인 끝에 나는 마침내 목표선을 통과 했다. 완주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만족스러운 기록에 나 자신을 조용히 칭찬했다.

 

  나는 사십 년 넘게 달리기와 함께 살아왔다. 처음에는 체력 단련을 위해 체육관 트레드밀 위에서 시작한 달리기였다. 그러다 마라톤 대회 봉사 요원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나의 본격적인 ‘달리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만 나면 달렸다. 해외 출장을 가면 호텔 짐(Gym)에서, 혹은 근처 공원을 찾아 달렸다. 언제나 10킬로미터가 기본이었다. 밴쿠버에 정착한 뒤, 나는 맨 먼저 나만의 길을 만들었다. 집을 중심으로 이어 붙인 10킬로미터의 코스. 나는 그 길에 ‘토마스 코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을 달릴 때마다 시간 기록을 쟀고, 언제나 한 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익숙한 길이 낯설어졌다. 가볍게 달리던 길에서 숨은 쉽게 차올랐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기록을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저조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쉬지 않고 달렸다. 마지막 도전이라는 심정으로 연이어 달렸지만, 결과는 더 나빴다. 마치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결국, 몸이 먼저 무너졌다. 내 다리가 단단히 굳어버린 그날, 나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남은 길을 절뚝이며 걸어야 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저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나는 걸음을 늦춘 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하게 펼쳐진 호수,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대, 그 사이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 햇빛은 투명하게 내려앉아 물 위에서 잔잔히 부서지고 있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조용히 피어 있었고, 공기마저 맑고 깊었다. 난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이 아름다운 자연의 정원 속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껏 수없이 달려왔지만 단 한 번도 이 풍경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늘 앞만 보고 달려왔고 오직 숫자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나는 절뚝거리며 토마스 코스를 완주했다. 기록은 평소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은 편안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냉찜질과 마사지를 하며 근육을 풀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고, 며칠 후에는 걷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나는 한동안 달리기를 멈추고, 대신 같은 코스를 천천히 걸어 완주하기로 했다. 걸음은 느렸지만, 시선은 넓어졌다. 코스 초입의 평평한 길을 걷자 양옆의 나무들이 나를 감싸주는 듯했다. 조금 더 걸으니 갈대 사이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 가까이 다가가 보려 했지만, 빽빽한 갈대와 잡목이 길을 막고 있었다. 나는 돌아서서 옆길을 따라 걸었다. 길은 다시 숲속으로 이어지고 작열하는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져 발밑에서 반짝였다. 그 길 위를 밟으며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호수 전경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명한 ‘레이크 루이스’나 ‘가리발디’ 호수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풍경이 펼쳐졌다. 경치가 압도적이거나 확 트인 시원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안개 위를 떠다니는 새와 그 위에 얹힌 듯한 시간의 정적. 그것은 내가 마치 오래된 그림 속에 조용히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걷자, 조류 관찰대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바라본 호수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작은 섬처럼 떠 있는 습지들, 그 위에 머무는 새, 그리고 햇빛이 잔잔한 수면 위로 퍼지며 만들어내는 평온함. 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시간이 멈춘 듯 그 풍경에 깊이 잠겨 들었다. 길은 다시 숲으로 이어졌고, 나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의 완주는 그 어떤 기록보다도 값지고 풍요로운 것이었다. 기록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이 길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매번 기록에 쫓겨 시계를 보며 달리던 어느 때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같은 길이었지만, 천천히 걸을 때 그 위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몇 주 뒤,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길이였지만, 전과는 전혀 다른 내가 그 길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았고, 더 이상 쫓기지 않았다. 나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의 리듬을 느끼며 그 길과 함께 달렸다. 내친김에 가족의 이름을 딴 코스 몇 개를 더 만들었다. 그 길을 달릴 때마다 나는 가족과 함께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달리는 길 위의 여행은 매번 새롭고 흥미로웠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10킬로미터의 길을 찾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달리며 발견하게 될 또 다른 나만의 코스를.

 

   여행은 멀리 떠나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타고 차를 달려 유명한 곳을 찾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의 숨소리를 따라 달리는 이 길,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여행이었다. 내가 걷고, 내가 달리는 이 길 위에서 이미 달리기 여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위의 여행은 오늘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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