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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까치 설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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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3-27 15:32

김아녜스/(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까치걸음으로 살금살금, 할머니 방에 들어간다. 오동나무 반닫이 3층장을 조심스레 연다.

 

‘이거, 내 색동저고리!’ 손가락을 꼽아본다. 설날까지 몇 날이나 남았나.

 

 동지 지나 섣달이 들면 할머니는 가마솥에 장작을 때 하루 종일 조청을 고셨다. 안방 아랫목이 설설 끓어 콩댐으로 길들인 노르스름한 장판이 탈까 봐 놋대야에 찬물을 담아 이리저리 옮기셨다.

 

“아가”하고 부르시면 나는 냉큼 달려가 장독대 뚜껑을 뒤집어 들고 섰다. 엿물 한 바가지를 퍼 주시면 그것을 마당으로 옮기는 것이 내 몫의 일이었다.

 

섣달 추위 속에서 엿은 타다닥 소리를 내며 금세 굳어 투명한 갈색의 갱엿이 되었고, 할머니는 굳기 전에 모양을 잡아 깨도 묻히고 콩도 섞어 네모난 대바구니에 기름종이를 깔고 차곡차곡 쟁여 다락에 올려두셨다.

 

해가 반짝 나는 날이면 쌀가마니를 잘라 펴고 놋 제기를 꺼내 닦았다. 기와지붕 조각을 갈아 짚수세미에 묻혀 빡빡 문질러 물로 헹구면, 칙칙하던 놋그릇이 신기하게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밥주발, 대접, 수저, 양푼, 세숫대야, 심지어 요강까지! 온 집안의 놋그릇이 환골탈태하는 날이었다. 설맞이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호였다.

 

 불린 쌀과 찹쌀을 다라이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막냇삼촌이 애오개 방앗간에 다녀오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길게 담겨 돌아왔다. 요즘처럼 길이로 잘려 있지도, 떡국용으로 미리 썰려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도마 옆에 턱 괴고 앉아 있으면 한 가래쯤은 얻어먹을 수 있었고, 그것을 할머니가 주신 조청에 푹 담갔다가 먹다 보면 조청이 뚝뚝 흘러 옷을 버리기 일쑤였다.

 

찹쌀로 만든 흰 인절미는 콩가루 위에 쏟아 노란 옷을 입혀 네모반듯하게 잘라 담았다. 남은 콩가루는 덧뿌리고 그래도 남으면 밥을 비벼 먹기도 했다. 윗목에 광목 면포를 덮어 꾸덕꾸덕하게 말린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면, “왜 동글게 안 써냐”라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어슷썰어야 커 보이지.” 하고 웃으셨다. 떡을 썰며 들려주시던 한석봉 이야기는 역시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녹두를 타서 껍질을 벗기고 불린 물에 치자 한두 송이를 깨 넣으면 주홍빛 물감이 화르르 번져 녹두의 틱틱한 색이 노르스름하게 변했다. 심하게 얽은 맷돌 아래위를 맞추고 함지박 위에 우물 정자 각목을 놓아 고정한 뒤, 한 수저씩 녹두를 넣고 물을 찔끔 더해가며 손잡이를 돌리면 우둘투둘 갈린 알갱이가 맷돌 허리에서 삐져나왔다. 그 맷돌 돌리기가 재미있어 보였지만, 요령을 모르던 나는 힘만 빼고 결국 구경꾼으로 물러섰다.

 

아버지가 목재소를 하셨기에 화목이 흔했다. 마당 화덕에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돼지기름을 흠씬 녹여 녹두빈대떡을 부쳐냈다. 양념한 배추김치도 길게, 고사리도 길게, 움에서 나온 쪽파도 길게—그러나 나는 ‘음… … 돼지고기 들어갔네.’ 하며 고소한 냄새만 맡고 먹지는 않았다. 숙모들은 첫 소당을 맛봐야 한다며 뜨거운 빈대떡을 죽 갈라 나눠 먹었고, 할머니 눈을 피해 하나씩 집어 먹으며 “산 조상이 먼저지” 하고 낄낄거렸다. 생선전 부치는 틈에서 덩달아 킥킥대던 나에게 “아가, 밀가루나 탈탈 털어라!” 하고 조무래기도 일을 시켰던 종갓집. 전도 종류별로 한 채반씩 쌓아두면 할머니가 갈무리하셨다.

 

섣달그믐날 밤, 잠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는 어른들의 농담에 눈 부릅뜨고 있던 그 밤, 숙모들은 둘러앉아 만두를 몇백 개씩 빚었다. 밖에 내놓기만 해도 띠글띠글 얼어붙던 추위였다. 육촌 시누이가 결혼하고 처음 오는 명절이라고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특제 만두를 하나 만들어 새신랑 떡국에 넣어주던 장난도 있었다. 나는 그걸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그믐밤, 자정이 지나서 복조리 장사가 외치는 복조리 한 쌍을 사서 벽에 걸었어도 새벽에 대문 안에 투척된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온 젊은이에게 후하게 값을 줬던 할머니.

 

 삼촌 넷, 숙모들, 사촌들, 작은할아버지들, 고모할머니, 오촌 당숙들까지 모이면 잠자리 하나 찾는 일도 북새통이었다. 사촌들과 한 이불 속에서 속닥속닥 나누던 이야기들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의 체온이 만들어낸 따스함만은 오래 남아 ‘정’이라는 울타리를 쌓아주었다.

 

설빔을 차려입고 차례가 시작되면 부엌에서는 대가족을 먹일 떡국이 끓었다. 가마솥에 소고기 장국이 펄펄 끓으면 떡을 넣고, 미리 쪄둔 만두도 넣었다. 차례상에는 떡만 올리라는 할머니의 명령이 부엌에 쩌렁쩌렁 울렸다. 활활 타오르던 불에서 시뻘건 숯을 조금 끌어내 노란 양은 냄비를 올리고 멸치 몇 마리로 육수를 내어 1인분 떡국을 따로 끓였다. 숙모 중 한 분이 고기를 안 드시는 채식주의자였다.

 

차례가 끝나면 부모님이 먼저 할머니께 세배를 올리고, 삼촌 내외가 그 뒤를 잇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배드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뱃돈은 빳빳한 신권, 그 출처가 아버지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대가족의 장점은 세뱃돈의 출처가 많다는 데도 있었다.

 

세배가 끝나면 우리는 떼를 지어 윗동네 외가로 향했다. 외가 친척들도 세뱃돈을 주셨고, 뒤돌아 앉아 액수를 확인하는 동안 점심상이 들어왔다. 그 상이 그 상인 듯해도 외숙모 통영 친정에서 보내온 해산물로 외가 점심상은 더 풍성했다.

 

 오후가 되면 삼촌들의 윷놀이가 펼쳐지고, 어른들의 환호성에 애들도 덩달아 이리저리, 팔짝팔짝 뛰었다. 숙모들은 가마니를 깔고 널을 뛰었다. 널 가운데 나를 앉혀놓고 양쪽에서 쿵, 쿵 소리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던 숙모들의 까르륵 넘어가는 소리. 제일 작은 숙모에게는 널 밥을 유난히 많이 주었는데, 밥 많이 먹고 얼른 크라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한바탕 놀다 안방에 들어가면 놋화로 위 석쇠에 구운 인절미와 얼음 둥둥 뜬 식혜 한 사발, 발그레 상기된 뺨에 와닿았던 엿기름 냄새. 그 소란과 냄새와 온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설날을 함께했던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밤, 세뱃돈을 세고 또 세다 보면 골목 저편에서 “메밀-묵~~”하고 길게 늘어지는 소리. 김장김치를 쫑쫑 채 썰어 들기름 듬뿍 넣어 버무린 메밀묵을 덜덜 떨며 먹었던 겨울밤은 끝이 없을 만큼 길었다. 그 모든 것들이 세월에 묻어간 지금, 나 홀로 기억의 동굴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가만히 불러본다. 그들이 내 곁으로 와 살며시 앉는다. 그때 그 이불 속 온기와 함께.

 

내일은 묵이라도 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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