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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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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3-19 16:14

아청 박혜정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2025년 정기연주회 때의 일이다. 그 해는 갑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한국을 다녀오자마자 “유엔젤 보이스”라는 한국팀의 초청 공연이 있어 슬퍼할 틈도 없이 매우 바쁘고 힘들었다. 
한국에서 공연 팀을 초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인프라가 높은 수준이어서 웬만해서는 초청 팀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나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이탈리아로 연주하러 갔을 때 초청된 입장에서 보면 이탈리아가 선진국이라는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있는 것이 초청한 사람이 소홀한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민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정도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연을 오고 싶다고 많은 팀이 부탁했지만 괜히 힘만 들고 원망받는 것이 싫어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하지만 교민분들에게 멋진 크로스오버 팀의 공연을 선사하고픈 마음으로 일을 벌였다.
그 팀이 이곳에 있는 동안 식사와 라이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분께 도움을 부탁하러 다니고 또 후원과 광고까지… 내게는 이 많은 일들이 매우 벅차게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여러 단체와 개인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계획대로 준비가 다 되었다. 하지만 직접 움직여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몸이 힘들다고 이미 여러 번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신호를 외면한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결국 몸이 따라와 주지 않았다. 이미 연주 전에 번아웃이 되어 버렸다.
연주자 특히 지휘자는 연주 전에는 몸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아파서도 안 되고 다쳐서도 안 된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내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다. 만약에 연주를 못 하게 되면 관객들과 단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는 연주 전에 많은 스트레스가 생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연습하는 과정은 즐겁지만, 연주 외에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매번 연주 때마다 힘이 든다. 
이번에는 연주 전부터 건강에 무리가 오면서 결국 몸이 먼저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아프다는 사실보다 더 힘들었던 건, 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이 상태로 연주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관객들과 단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든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연주 당일, 관객분들과 단원들은 전혀 몰랐겠지만 너무 힘들어서 중간 휴식 시간에 쉬고 있는데 고맙게도 유니스 김 원장님이 관람을 오셨다가 침을 놓아주셨다. 그래서 정신력으로 버텼고 혼신을 다한 연주를 했다. 총연습 때 “이번 연주를 무사히 할 수 있을까요?“라고 80세가 넘으신 유포니움 연주자에게 별 기대 없이 여쭈어보았다. 그분이 “살면, 살아져요.”라고 하셨다.
그분은 10여 년 전에 뇌졸중(stroke)으로 쓰러지신 후 재활에 힘쓰셔서 왼쪽이 조금 불편하신 정도이다. 원래는 트롬본을 연주하셨는데 몸이 완전치 못한 상태라 트롬본의 슬라이드를 움직이시기 힘드셔서 비슷한 음색의 유포니움을 왼쪽 어깨에 얹고 연주하신다. 그분의 말이 위로되었던건, 그 말이 경험에서 나오는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잠깐 순간에 들은 말이었어도 내 마음속엔 도돌이표가 찍힌 듯 자꾸 되뇌어졌다. 
“살면, 살아진다”라는 말은 아주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순간이 지난 후 뒤돌아보니 그렇게 되더라’라는 뜻 같지만, 어느 정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래도 어차피 지나갈 시간을 조금만 참고 견뎌보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위안과 힘이 된다. 나의 경우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무대 위에 3시간. 총연습까지 하면 8시간 정도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되뇌며 잘 버텨낼 수 있었다. 덕분에 앙코르까지 외치는 관객분들을 위해 혼신의 연주를 잘, 감사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말은 희망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힘든 순간에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손잡이가 될 수도 있다. 등산할 때 비탈진 곳의 꼭대기를 올려다보면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지?’라고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발밑만 보면 그곳은 그렇게 경사로 보이지 않고 완만하게 보인다. 그럼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정상까지 다다른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이처럼 길게 인생 전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이 순간 숨을 고르고 오늘 하루하루를 무사히 마무리하면서 힘을 내어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 보자. 그리고 나중에 “살면, 살아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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