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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 마라 이야기

지연옥 ch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12-23 13:24

지연옥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는 봄날의 아침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내 피부를 건드리자, 무언가를 참을 수 없어 무작정 집을 나섰다. 동네라도 한 바퀴 돌면서 바람이나 쐬자면서. 빨강, 분홍, 다홍, 노랑 색색의 로드덴드론과 봄 꽃들이 한창 피어나는 골목길을 걷는 것은 늘 내게 즐거움을 준다. 내가 보태준 것도 없는데, 저들은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그 화사한 자태로 내 마음을 마구 흔든다.

 

 동네 어귀를 지나자 잘 가꾼 텃밭과 비닐 하우스가 있는 하얀색 벽의 이층집이 눈에 들어 온다. 텃밭은 꽤 넓었는데, 파릇파릇한 새순들이 흙 바닥에서 마구 솟아 나오는 중이었다. 바로 옆 비닐 하우스엔 한 뼘 이상 자란 토마토 모종 수 십 그루가 옆에 세워 둔 지지대에 기대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흙 밭의 어린 초록 생명들 사이에서, 언제나처럼 노인 한 분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만 보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는다. 주름진 얼굴은 무표정하고 조금 무서운 인상이었으며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은 키에 뚱뚱한 체형과 전체적인 모습을 봤을 땐 여자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몇 년 동안 보았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내가 옆을 스쳐 지나가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표정이 굳어 있어서 인사조차 먼저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텃밭의 상추, 쑥갓, 케일, 파,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을 너무나 훌륭하게 키운 것이라든지, 온실 속에 어른 주먹보다 큰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볼 때면 그녀의 재배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봄 햇살과 바람에 실려오는 꽃 향기에 취해서였을까?  나는 갑자기 용기 내어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도 이 동네 살아요. 텃밭과 비닐 하우스를 정말 잘 가꾸시네요. 여기를 지날 때마다 감탄했습니다.” 인사치레를 하니 그녀가 엷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I’m blind.”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다면서 내 소리를 듣고 반응한다고 했다.‘Oh, My God!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낼 뻔했다. 늘 밭일을 하는 그녀가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을 상상조차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몰랐던 것에 대해 내가 미안해하자, 괜찮다면서 자기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부터도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보스니아인이라고 했다. 메트로타운 몰에서 그녀가 고국에서 온 사람들을 그냥 지나쳤을 때, 그들은 그녀가 거만해서 아는 체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니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텃밭 일을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손 끝의 감촉으로 잡초도 구별해서 뽑는다고 했다. 나는 놀라움이 가득한 그녀의 일상이 궁금해져서,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녀의 아름은 마라’이다. 보스니아에서 18세 때에 여기로 와서 60년을 살았다고 한다. 보스니아를 떠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고, 가족 전체와 함께 왔다고 한다.

 

 떠날 때의 조국인 유고슬라비아는 현재 지구상에 없는 국가란다. 유고슬라비아는 현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나라들로 분리 해체되었다고 한다. 없는 갈등과 내전으로 인한 결과였다. 나는 유고슬라비아가 완전히 사라진 것에 대해 슬픈 마음이 들었는데, 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현재 이층집 아래층엔 52세인 아들과 47세인 딸 가족이 살고 있고, 자신은 위층에 살고 있다고 한다. 딸에겐 18세 손녀가 있다. 각 층은 잠글 수 있어서 각자의 키를 가지고 비교적 독립적으로 산다고 했다. 가끔씩 딸이 시장을 봐와서 냉장고를 채워 주고, 잼이나 소스를 만들어 주는 외엔, 마라는 대부분의 쿠킹을 스스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원래부터 앞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22년 전 이탈리아인 남편이 암으로 61세에 세상을 떠난 후, 12년 전엔 그녀도 유방암으로 양쪽 유방을 모두 절제했다. 이후 원인 모르게 8년 전에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폐암이 발병했는데, 수술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했다. 평생 담배를 하루 서너 갑 피웠는데 지금은 한 갑으로 줄였단다. 적극적인 치료는 받지 않고, 담담하게 암과 함께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녀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기 때문이란다. 나는 기꺼이 도움을 많이 받으시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라도 자녀들의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고, 나의 경험을 섞어서 얘기해 드렸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조금은 펴지면서 잔잔한 미소를 띤 것처럼 보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보는지에 대해 깊이 반성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한 무뚝뚝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긴 이민 생활 동안 열심히 살았고, 숱한 고난을 잘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다. 현재도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녀의 방식대로 잘 적응하면서 강인하게 살고 있다. 텃밭 가꾸는 일은 지금도 최선을 다해서 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텃밭의 식물뿐만 아니라, 그녀 인생 전체를 예민한 그녀 손 끝으로 잘 보살피면서 살아왔다고 믿는다.

 

 밴쿠버에 와서 많은 나라 사람들을 만났다. 보스니아에서 온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피부색이나 생각, 입장이 모두 다르지만, 다름이 틀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은 때론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모여 힘겹게 살아가는 가여운 존재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차이를 보지 말고, 인류라는 공통 분모를 지지대로 삼아, 똘똘 뭉쳐 함께 살아 가고 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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