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여유를 잠시 즐기는 것은 나의 삶에 작은 낙 중 하나다. 이때 혼자 앉아 여러 생각을 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거나,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함을 즐기려고 하기도 한다. 문득문득 가구 배치를 바꾸고 싶다 거나, 집안의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하루는 주방의 서랍장을 다 정리하고 싶어 져서 서랍들을 열어 정리를 시작했다.
가장 위에 있는 서랍을 열어보니, 그곳엔 수저가 가득했다. 낡아진 나무 젓가락은 모아서 묶어 버리려고 담아두고, 낡은 포크, 숟가락 등을 분류해서 버리려고 했다. 그러다 작고 낡은 하늘색 손잡이의 어린 아이 숟가락이 눈에 띄었다. "로보카 폴리"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낡은 숟가락이었다. 5살, 7살이던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올 때, 당시 아이들이 사용하던 숟가락과 에디슨 젓가락 등등을 모두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10년간 자연스럽게 하나 둘씩 망가져서 버리고, 이사할 때 사라지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것들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흔적이었다. 아마도 둘째 아들이 한국에서부터 사용하던 작은 숟가락이었던 것 같다.
이 수저가 들어있는 서랍을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봤을 텐데,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너무 자주 봐서, 익숙해져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이렇게나 눈에 띄는 색상과 모양을 가진 아이용 숟가락을 보지 않았다니 스스로도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마음이 일었다. 숟가락을 좀 더 자세히 보니 메탈 부분과 플라스틱의 연결 부위에 작은 녹이 보였다. 숟가락 머리 아래 부분은 약간 휘어져서 제대로 쓸 수 있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또한 손잡이 색은 바래 져서 예전에 알록달록하던 로보카 폴리 캐릭터는 이제 거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글씨도 원래 알던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닳아져 잘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작은 숟가락 안에 남아있었다.
처음 정리를 시작했던 것이 안 쓰는 물건을 버리고자 함이었으니, 이 작은 캐릭터 숟가락 또한 버려야만 하는데 좀처럼 쓰레기를 분류해둔 곳으로 손이 가지 않더라. 이제는 낡고, 쓸모없는 숟가락인데 이를 버리려니 마지막 하나 남아있는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을, 그 기억을 버리는 것만 같아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몇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제자리에 넣어두었다. 어차피 사용하지도 않을, 사용할 사람도 없는 낡고 작은 숟가락이지만 어린 시절의 손때가 묻어 있고, 한국에서부터 캐나다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온 그 흔적을 지우기가 못내 아쉬워서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생각보다 미련이 많고, 지난 것들을 정리하지 못하는 성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나는 결단코 그렇게 단순하고 깔끔하게 잘 정리해내고 살아갈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 여전히 낡고 지난 것들을, 그것이 유행이 지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닳아졌어도 추억이 담겨있고, 세월이 담겨있는 것들이라면 다시 그대로 그 자리에 둘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걸 다시 꺼내어 추억을 떠올리거나 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내 손으로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잘 정리 정돈된 깨끗한 집에서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 미련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다시 내 손으로 비워두려던 그 자리에 버리지 못한 물건을 또다시 채워 놓았다. 그 채워놓는 순간, 그것이 비단 찰나일지라도 어린 시절 마냥 예쁘기만 했던 아이들 과의 추억을 잠시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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