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화 / 캐내다 한국문협 회원
그녀는 빵빵한 엉덩이를 갖고 있다. 주말마다 다니는 산행을 위해 주중에는 헬스장에서 반나절을 보낸다. 엉덩이가 빈약한 나는 수시로 그녀의 엉덩이를 훔쳐보며 부러워한다. 그래도 운동하기는 귀찮다. 엉덩이 근육만 집중적으로 키워주는 음식은 어디 없을까.
어느 날, 그녀가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둥산 모임에서 반을 바꾸었다고. ‘아니, 등산 모임에 다른 반도 있나.’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정상반’에서 ‘언저리반’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하산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릎이 시큰거려서 더는 정상반 회원들과 템포를 맞출 수 없더라고 했다.
언저리반 회원들은 등산 대신 무얼 하느냐고 물으니 정상반이 등산을 다녀올 동안 그 산의 계곡을 둘러보거나 그 산이 품고 있는 사찰을 탐방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상반이 돌아올 무렵에는 시원한 물을 들고 산 아래에서 그들을 맞이한다고 했다. 등산을 못해서 허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날의 산행 장소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즐겁고, 산 아래에서 산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가 등산 모임에 들어갈 무렵, 나는 수필 모임에 들었다. 그때 나에게는 가슴속의 답답함을 털어놓을 ‘대나무숲’이 필요했다. 햇살 좋은 날 빨랫줄에다 빨래를 널며 느끼는 개운함이 덤으로 딸려왔다. 구겨지고 접혀지고 눌려 있다가 빨랫줄에서 제 모습을 찾는 옷가지들처럼 나의 지난날이 하나 둘 내 결렸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것들, 누가 알까 봐 숨겨두었던 일들, 글로 옮기기에 민망한 얘기들을 나는 망설임 없이 ‘수필’이란 줄에 걸었다. 나의 지난날이 너무나 아득하게 떠오르면서, 산다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언저리반 얘기를 했을 때, 속으로 뜨끔했다. 나야 말로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나의 문학적 감성에 가뭄이 든 지 한참 되었다. 이전에는 돌 틈에 핀 풀꽃 한 송이만 봐도 감탄하며 들여다보곤 했는데 요즘은 더 애처롭게 핀 꽃도 멀뚱멀뚱 쳐다본다. 소재를 찾는 눈에 노안이 왔는지 온통 부옇게 보인다. 게다가 문장까지 내 허리를 닮아 두루뭉술해 졌다. 가까스로 소재 하나를 잡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한 페이지를 채우기도 힘들다. 소재가 시원찮은가 싶어 다른 소재를 잡아보지만 마찬가지다. 수필이 나올 듯 하다가도 금세 사그라들고 마는 이 변비 증상에는 약도 없다.
“작가란 자신의 전두엽을 부여잡고 무력감과 한심함, 막막함과 싸우다가 어느 날 문장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남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걸 보았다. 작가라면 누구나 절망감을 느낀다는 의미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는 꺾임이 심상치 않다. 수필의 바짓가랑이를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초조함을 여우처럼 감추고 남들 앞에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것도 마땅치 않다.
나의 수필의 한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데다 나의 역량을 꾸준히 계발하지 않은 탓인 듯하다. 여러 분야의 책으로 간접 경험을 넓히고, 다양한 체험과 문화적 탐색을 꾸준히 해왔더라면 어땠을까. 주로 지난날에서 수필 소재를 가져오다 보니 동종교배의 글이 많았다. 수필은 소재 싸움이라고 하던데, 다양한 소재와 참신한 소재를 찾아내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지금 나는 수필반과 수필 언저리반의 경계에 있다. 한때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처럼 독자의 반응에 꽤 신경을 썼다. 잘 쓴 글처럼 보이려고 글에 억지를 부리다 보니 자주 한계에 부딪쳤다. 이젠 독자를 의식하는 글쓰기는 그만두고 싶다. 책상 위에 놓인 인형 ‘못난이 삼 형제’를 본다. 서로 보기만 해도 못난이들은 즐겁다. 못난이들이 행복한 비결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내가 언저리반으로 옮겨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수필에 대한 애정과 애착은 그대로다. 수필 등반에 최선을 다하는 수필가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들이 좋은 작품을 쓸 때마다 박수를 보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새로운 일이다.
언저리반이 되어도 나는 변함없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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